37화
나가게 해 주겠다는 듯 말씀하셨으면서…….
앞서 그가 했던 말을 곱씹으니 양분 삼아 원망의 씨앗이 쑥쑥 자라났다.
벨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읽었다고 하기에도 뭐했다.
당연한 것이었다. 누가 여행지에 와서 밖은 안 보고 방안에 틀어박혀서 그 여행지에 관한 책이나 보고 있겠는가.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아, 놀리는 건가?
벨라는 문득 든 생각이 상당히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눈치를 흘끗 살폈다. 그는 붉은 빛깔의 술을 마시며 책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아무리 봐도 일과 관련된 책 같지는 않았다. 말할까 말까 달싹이던 입술이 기어코 목소리를 내뱉었다.
“……공작님.”
“왜.”
여전히 책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날아오는 무뚝뚝한 대답에 절로 주눅이 들었다. 부르긴 했지만 막상 본론을 꺼내려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음…….”
곤란한 소리를 내자 그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그제야 책을 내리고 벨라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책은 다 봤어?”
“……아니요, 아직.”
“재미없어?”
이건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왠지 억울한 마음에 입이 살짝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상황은 충분히 마음이 상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희망을 주지 않았더라면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읽어야지. 낯선 여행지에 왔으면 최소한의 공부는 해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다니면 위험하잖아, 그렇지?”
“……네.”
별로 공감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의 말에 반박할 용기가 없어 그냥 얌전히 답하고 말았다. 작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책 안 들어?”
“……들어요.”
내일 베른으로 돌아가야 하니 시간은 오늘뿐인데.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지만 괜스레 마음이 급해졌다. 그만큼 서운한 마음 또한 짙어졌다.
내키지 않는 손길로 겨우 책을 집어 드는 그녀를 보며 벨리아르가 짐짓 표정을 굳혔다.
“원하는 게 있으면 제대로 말해야지. 그따위로 마음에 안 드는 티만 팍팍 내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이야.”
원래도 다정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오늘은 대체로 그의 기분이 조금 안 좋은 듯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벨라는 자신이 너무 그의 심기를 긁었나 싶어 움츠러들었다.
“……저, 밖에 구경해 보고 싶어요.”
“그게 부탁하는 태도야?”
마음 같아선 그냥 다 포기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있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의 압박을 받아 내기가 버거웠다.
“먼 곳까지 왔으니까……. 언제 또 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살짝 울먹이듯 말하자 그가 술을 한 모금 삼켰다.
“그렇게 나가고 싶어?”
벨라는 분명 보았다. 그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려 손을 뻗는 순간 입꼬리가 살짝 휘어 올라간 것을.
온몸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긴 소만이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잃어버리면 답도 없잖아.”
벨라는 직감적으로 그가 무엇을 잃어버릴까 걱정하는지 알았다. 자신이었다. 정말 나갈 생각이 없을까 봐 다급히 부정했다.
“저 그럴 마음 하나도 없어요. 정말이에요. 절대 안 그래요…….”
그가 설핏 웃으며 술잔마저 내려놓았다.
“그럼 목줄이라도 걸까?”
“……네?”
벨라는 순간 제 귀가 이상한가 했다. 하지만 아무리 되새겨봐도 ‘목줄’이라고 말한 것이 맞았다.
그의 표정을 보니 장난 같지가 않아서 더 문제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거긴 왜…….
설마, 하는 생각에 그의 뒤로 따라붙는 벨라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는 서랍 제일 위 칸의 손잡이를 잡고서 그녀에게 눈짓했다.
“이리 와.”
그의 부름에 좋지 않은 상상이 뒤따랐다. 아무리 낯선 나라의 바깥 구경을 하고 싶다지만, 그런 꼴로 나갈 수는 없었다.
갑자기 따듯한 방안에서 향긋한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님.”
애원하듯 불러보았으나 가만히 맞받아치는 그의 시선이 점차 차갑게 얼어붙을 뿐이었다.
그의 인내심이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벨라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의 앞에 서자 나지막한 지시가 내려앉았다.
“눈 감아.”
서랍 안에 무엇이 있을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이 보이지 않으니 소리에 예민해졌다.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무언가를 꺼내는 듯했다. 그의 손이 머리칼을 모아 잡다가 목에 스치자 벨라는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정말 목줄을 채우려는 건 아니겠지.
훤히 드러난 목으로 무언가 폭신하고 부드러운 것이 감겼다.
목줄에 모피를 감아 놓은 걸까?
생각했던 목줄의 촉감과는 상당히 달라서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이 뜨였다.
“누가 눈 뜨래.”
그러나 그의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하고선 곧바로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뜬 보람도 없게 까만 시야에 아른거리는 건 붉은 눈동자뿐이었다.
그가 목에 감은 것을 잠시 매만져 주는 듯했다. 손길도 떠나고, 그는 말이 없었다.
벨리아르는 눈을 질끈 감고서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내렸다.
“눈 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바로 시선을 내렸다. 목에 무언가 감기긴 감겼는데……. 동물의 부드러운 모피로 만든 목도리였다.
입꼬리가 옅게 올라가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선 완전히 당했음을 깨달았다.
“……공작님!”
살짝 소리치자 그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가기 싫은가 봐.”
벨라는 부드러운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풀이 죽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이게 무척 마음에 들어서요…….”
“그럼 공손하게 말해야지.”
“……감사합니다, 공작님.”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니 다시금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나가자.”
그 한마디에 벨라의 얼굴이 발갛게 피어났다. 목도리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 * *
중립국인 소만은 여러 나라와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그중 가장 넓은 면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이 블루벨 제국이었다.
아까 책에서 얼핏 보니 지금 있는 도시는 하탐이었다. 하탐……. 그 이름을 몇 번이고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도시 이름마저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곳곳에 붙어 있는 글자가 낯설었다. 아주 간혹 제국의 글씨로 쓰인 것이 보이면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벨리아르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는 벨라를 붙잡아 제 앞에 세워 두었다.
“정신 팔려서 잃어버리면 그땐 진짜 목줄 채울 거니까 명심해.”
“저 공작님 뒤만 열심히 따라다닐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새하얀 털목도리를 하고서 동그랗게 올려다보는 모습이 정말 설원의 토끼 같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에서 새어 나오는 하얀 입김마저 소박했다.
정말, 잃어버리면 꽤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러므로 방금 한 말은 한 치의 거짓 없이 진심이었다. 그는 벨라의 몸을 빙글 돌려 제 앞에 세웠다.
“내 앞에서 걸어.”
“네? 제가 감히 어떻게…….”
“뒤에서 따라오는 게 더 신경 쓰이니까 잔말 말고 앞에서 걸어.”
벨라는 잠시 눈앞이 새하얗게 흐려지는 듯했다. 뒤에 그가 있다고 생각하니 걸음을 내딛는 것마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좁은 보폭으로 몇 걸음 걷던 벨라는 결국 뒤를 돌아 그에게 물었다.
“……공작님, 어디로 갈까요?”
그가 정말 뒤에 서 있는지 궁금해서 확인하려 한 것도 있었다. 그렇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는데, 저도 모르게 그의 자취를 더듬었다.
“그렇게 나가고 싶어 하더니. 뭐가 제일 보고 싶었어?”
“음……. 그냥, 사람들이요…….”
잠시 고민하던 벨라는 결국 두루뭉술한 대답을 내놓았다. 딱히 소만의 풍경 때문에 오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럼 앞으로 쭉 걸어가. 가다가 보고 싶은 거 있으면 보고.”
“……네.”
소담한 자유를 얻었다. 벨라는 양쪽으로 늘어진 상점가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하탐은 베른과 가까운 만큼 제국과의 무역으로 발달한 도시였다. 그만큼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이 제국풍인 것이 많았고, 제국에서 오는 여행객들을 위해 준비된 소만의 물건들도 많았다.
벨라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에겐 제국의 물건이든 소만의 물건이든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어차피 다 새로운 것들이었다. 이렇게 남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도, 특별할 것 없이 남들 사이에 섞여 드는 것도.
이런 해방감마저 그가 주는 것이었다. 제힘으로는 감히 가져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그는 늘 쉽게 주고, 쉽게 가져갔다.
“벨라.”
“네?”
사람들의 말소리가 섞여 거리가 소란스러웠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만은 뚜렷하게 귓가로 파고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그가 어느 옷가게 앞에서 손짓했다. 전혀 특별한 것 없는 가게였다.
“옷 하나 골라 보자.”
“무슨 옷이요?”
“네 옷. 여기서 골라 봐.”
“……그래도 돼요?”
“잘 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이 가게에서 파는 것은 평민들이 편하게 입고 다니는 옷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벨리아르와 벨라가 입고 있는 옷은 상당히 튀었다. 옷감과 재질부터가 달랐으니 당연했다. 사뭇 긴장한 주인의 눈초리가 힐끔힐끔 둘에게 닿았다.
벨라는 천천히 진열된 옷들을 둘러보았다. 제 몸에 대어 보기도 하면서 열심히 하나를 골라 그의 앞에 들고 왔다.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준 튜닉 원피스였다.
“그게 제일 마음에 들어?”
“……네. 아, 물론 공작님이 주신 옷이 더 예쁘지만…… 여기선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요.”
벨리아르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평소엔 우물쭈물 말도 못 하다가 이럴 땐 어찌 저런 말을 술술 하는지.
“요령이 늘었네.”
그는 정말 벨라가 고른 옷 하나만 계산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평소라면 절대 사지 않았을, 그의 눈엔 티끌만큼도 차지 않는 옷이었다.
어차피 성으로 돌아가면 마담 폴린이 최고급 옷감으로 직접 지은 옷이 옷장에 한가득했다. 매일 하녀가 가져다주는 대로 입었던 벨라는 정작 그 옷장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