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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36)화 (36/180)

36화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제대로 찾아본 게 맞아?”

“예, 확실합니다.”

프리스틴은 ‘벨라 베일리’라고 쓰인 문서를 세차게 노려보았다. 그런 귀족은 있을 수가 없는데. 그녀의 상식선에선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심증으로 의심한다고 해도 조사해서 나오는 물증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심지어 며칠 뒤 베일리 남작과 포르타 백작까지 직접 황궁으로 불러들여 확인해 보았다.

남작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유약해서 집안에서만 키운 둘째 딸이 맞다고 하고, 백작 역시 그 영애의 존재를 안다고 증언했다.

여기서 자신이 아무리 우겨 봤자 스스로만 우스워지는 꼴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말 먼 친척이 맞으니 둘의 사이를 의심할 필요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친척이라고 부르기에 곤란할 정도로 관계가 멀긴 했지만…… 그 사실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공작이 직접 자신의 먼 친척이라고 밝힌 이상, 섣부른 추문을 만들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분명 마음이 편해져야 하는데, 자꾸만 그 여자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전하, 아들린 후작 영애에게서 온 서신이에요.”

프리스틴은 델리아가 건네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표정이 점차 어둡게 가라앉았다. 흡사 무서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안색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전하? 어디가 불편하세요?”

“……델리아, 영애에게 선물을 좀 보내야겠구나.”

“네, 말씀해 주시면 제가 꼼꼼히 확인해서 보낼게요.”

“혹시, 벨리아르 공이 황궁에 온다는 소식은 없었지?”

“네, 그런 소식은 없었어요. 왜요? 공작 각하께서 수도로 오신대요?”

“……아니야, 됐어.”

프리스틴은 곧장 편지를 태워 버렸다. 당장 벨리아르 공작이 온다는 소식은 없다고 하니 일단은 안심했다.

두 달 뒤 있을 건국제가 걱정이긴 했지만, 그때쯤이면 그도 잊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 * *

벨라는 난생처음으로 행복한 고민이란 게 무엇인지 경험해 보는 중이었다. 하녀가 가져다준 여러 개의 옷을 침대 위에 펼쳐 놓고 깊이 고심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에릭이 들어와도 모르는 눈치였다.

에릭은 일부러 기척을 숨기고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언뜻 상황을 보니 소만에 갔을 때 입을 옷을 고르는 듯했다. 그가 옅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리 좋으십니까?”

갑자기 나는 소리에 놀랐는지 동그란 어깨가 화들짝 튀었다. 벨라는 숨을 들이켜며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에릭이 쭉 지켜본 결과, 그녀는 놀랄 때 소리를 내지 않았다. 버릇처럼 입을 틀어막고 눈만 동그랗게 뜨는 게 전부였다. 아마 평생을 숨어 지내며 몸에 밴 습관일 것이다.

벨라는 천천히 숨을 폭 내쉬고 나서야 가슴에 두 손을 올리며 입을 뗐다.

“……에릭 경! 오신 줄 몰랐어요.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요. 뭘 그리 열심히 하시길래 제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셨습니까?”

“옷을 고르고 있었어요. 음……. 옷을 몇 벌 챙겨 가야 할까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다음 날 오후 정도에 돌아올 테니 그리 긴 일정은 아니었다. 에릭은 침대 위의 옷들을 흘끗 보며 말했다.

“두 벌 정도 챙기세요. 도톰한 겉옷도 하나 챙기시고요.”

바로 그게 문제였다. 다섯 벌 정도 되는 옷 중에 두 개만 골라야 한다는 것. 벨라의 입에서 곤란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차피 다섯 벌 다 가져가도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에릭은 일부러 두 벌이라고 콕 집어 말했다.

“……에릭 경 눈엔 어떤 옷이 예뻐 보이세요?”

“그걸로 고르시게요?”

“뭘 골라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골라 보세요. 아가씨가 직접 고르셔야죠.”

하긴, 그녀에겐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천천히 골라 보고 또 챙길 게 없는지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에릭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알맞은 조언을 건넸다.

“어차피 짧게 다녀오실 테니 짐은 너무 많이 챙기실 필요 없습니다. 자잘하게 필요한 것들은 별저에 다 준비되어 있고요.”

“소만에 따로 집이 있어요?”

어찌 보면 황당한 질문에 에릭은 낮게 웃었다.

“그럼 설마 주인님과 여관에서 묵을 생각이셨습니까?”

“……그것도 좀 이상하긴 하네요.”

“예, 많이 이상하죠.”

멋쩍게 웃던 벨라는 불현듯 에릭에게 부탁할 것이 생각났다. 곧바로 침대 옆 서랍을 열어 실크 주머니를 꺼내 왔다.

“아, 에릭 경, 이것 좀 공작님께 전해 주세요.”

“이게 뭡니까? 직접 전해 주시지 않고요.”

에릭은 주머니 안을 확인했다. 제법 묵직하다 했더니, 금화가 제법 많이 들어 있었다.

“전에 폴번 갔을 때 공작님께서 저한테 주셨어요.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직접 돌려드리면 왠지 화내실 것 같아요.”

화낼 걸 알면 그냥 조용히 가지는 것도 방법인데, 이 아가씨는 그런 요령이 없었다. 에릭은 주머니를 다시 벨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안 돌려주셔도 됩니다. 아가씨 쓰세요.”

“네? 하지만……. 제가 가지기엔 너무 많아요. 부담스러워서 싫어요.”

아무리 그녀가 오랜 시간 숲에 숨어 사느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지만, 이 정도의 금화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지 정도는 알았다.

“이제 벨리아르 공작가의 일원이신데 이 정도로 부담스럽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가지세요.”

“음…….”

에릭의 눈엔 고작 금화 몇 닢을 두 손으로 떠받든 채 깊이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이 황당하면서도 새로웠다. 문득, 잊고 있었던 제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조금 어려우시면 이건 어떻습니까?”

에릭이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무언가를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벨라의 표정에 언뜻 생기가 돌았다.

“……그래도 될까요?”

“안 될 이유가 전혀 없는데요.”

조금 어려울 것 같긴 하지만, 아주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다. 어차피 그에게 금화를 다시 돌려줘 봤자 별 의미는 없어 보이니 말이다.

“고마워요, 에릭 경.”

“별말씀을요.”

* * *

소만에 간다는 설렘 때문인지 새벽에 잠을 조금 설쳤다. 먼저 마차에 올라타 있던 벨라는 짧게 하품을 했다.

살짝 물기가 맺혀 어룽진 시야에 대화하는 벨리아르와 에릭의 모습이 비쳤다.

“어차피 내일 올 거니까 혹시 그사이에 무슨 일 생기면 알아서 잘 처리해. 그냥 돌려보내진 말고.”

“예, 걱정하지 마시고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둘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가 마차 쪽으로 다가오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소만으로 가는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벨리아르는 맞은편에 앉아 벨라를 가만히 바라보다 설핏 웃었다.

“벨라, 기분 좋아?”

“……네, 그런 것 같아요.”

설렘으로 뺨이 붉게 달아오른 건 또 색다른 모습이었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는 몸의 열기도 쉽게 드러냈다.

“옷도 예쁘게 차려입었네.”

그의 칭찬에 벨라는 살며시 미소를 내비쳤다. 전날 내내 열심히 옷을 고른 보람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라기보다, 처음 가는 여행이니만큼 모든 것이 완벽했으면 했다.

마차가 움직이며 바깥의 소리가 들려왔다. 창이 닫혀 있었기에 벨라는 청각에 바짝 신경을 집중했다.

바람에 나뭇잎이 쓸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사람들의 어수선한 말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들려오는 소리로 지금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지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것마저 즐거운지 그녀의 입가엔 내내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도 바깥의 풍경이 궁금하긴 한지 소심한 손끝으로 창을 톡톡 건드려 보았다.

벨리아르는 말없이 그 모습들을 감상했다. 언제쯤 저 작은 입술을 움직여 물어 올까 싶었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아주 미세하게 바깥의 빛이 새어 들어오는 작은 틈으로 그녀의 시선이 뚫어져라 고정됐다. 벨리아르가 설핏 웃고는 넌지시 물었다.

“밖이 궁금해?”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렇다고 했으면 기꺼이 열어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을 텐데.

벨리아르는 그녀의 대답에 딱히 말을 더하지 않았다. 미세한 후회로 애달파하는 모습도 흥미로웠다.

먼저 손을 뻗지 않는 아이에게 사탕을 쥐여 줄 만큼 그는 친절하지 않았다.

마차가 잠시 멈춰 섰고, 마부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마차는 다시 움직였다.

감히 벨리아르 공작가의 마차를 안까지 확인해 볼 간 큰 병사는 없었기에 국경은 편하게 통과했다.

국경을 넘었으니 지금은 소만 땅인 것이다. 겨우 가라앉았던 심장이 또 조용히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 열기에 기대어 벨라가 살며시 입을 뗐다.

“저…… 공작님.”

“말해.”

그의 눈을 보면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일부러 시선을 내리깔았다.

“도착하면…… 밖에 나가 볼 수 있어요?”

“산책도 시켜 줘야 해? 손이 많이 가네.”

역시, 바깥을 돌아다니는 건 무리겠지. 그의 타박에 곧바로 기대를 접었다.

“……아, 바쁘시면 안 나가도 괜찮아요. 그냥 저택에만 있어도…….”

“벨라.”

“……네?”

그의 부름에 살짝 고개를 드니 마주한 표정이 매우 냉혹했다. 마차 안의 분위기가 일순 무거워졌다.

“누누이 말했을 텐데. 그런 건 네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고.”

“……네.”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그가 주는 것들이어야 했다. 그의 일정을 마음대로 넘겨짚고 단정 짓는 건 벨리아르의 기준에서 소위 버릇없는 짓이었다.

그 대가로 무거운 정적을 견딘 그녀에게 벨리아르는 작은 당근을 주었다.

“소만에선 마음껏 고개 들고 돌아다녀도 돼. 다양한 인종이 섞이는 곳이기도 하고, 멍청한 예언 따윈 없으니까.”

그 얘기는…… 나가게 해 주겠다는 뜻일까?

그의 말이 움츠려있던 설렘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행복하다는 기분이 든 순간,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불행하기만 하던 인생에 갑작스레 이런 행복이 다가오니 불안하기도 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다 제 것이 될 리 없다고 믿었다. 꿈꾸는 것조차 버거웠던 것을 손에 쥐자 불안이 앞섰다.

성마른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 후에 남을 공허함이 벌써 무서웠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짝 어두워지려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서 벨리아르는 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벨라, 내가 주지 않은 건 생각하지 말아야지.”

그녀는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려다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불안은 걷어 내고 행복한 감정만 남겨 소중하게 보듬었다.

“공작님……. 저, 창문 열어도 될까요?”

“열어.”

그의 허락에 벨라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창을 열었다. 쌀쌀한 바람이 훅 몰아쳐 들어왔지만 벨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제국과 별다른 것 없는 평원인데도 새로운 걸 본 아이처럼 신기해했다.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차올라 붕 뜬 모습은 그가 인간들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이기도 했다.

희망과 절망이 만들어 내는 간극은 늘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의 입꼬리가 조용히 휘어 올라갔다.

“우리 벨라는 좋은 것만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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