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의 말대로 정말 음식이 식을 때쯤이면 사용인이 들어와 다시 따뜻한 것으로 바꿔 주었다. 덕분에 그의 말이 진심임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벨라는 음식을 조금 먹다가 배가 부르면 일어서서 방안을 걸어 다녔다. 좀 내려갔다 싶으면 다시 앉아서 식사를 했다.
그러길 몇 시간, 깊은 밤이 되어서야 벨리아르가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다.
“공작님, ……기다렸어요.”
그의 기분이 좋아질 만한 말을 해 보았다. 최대한 노력해 보았는데 역시나 그 음식들을 다 먹기엔 역부족이었다. 벨리아르는 오자마자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훑었다.
“다 못 먹었네.”
화가 나셨을까. 흘끗 눈치를 살피던 벨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른 인사를 건네 보았다.
“……잘 다녀오셨어요?”
“말 돌리지 말고.”
차가운 목소리에 벨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칠면조 구이를 노려보았다.
저 거대한 것만 아니면 그래도 좀 티가 덜 났을 텐데.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었는데 저것 때문에 별로 많이 먹은 것 같지가 않아 보였다.
그녀의 표정 위로 머릿속의 생각들이 훤히 떠올랐다. 그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한 번만 봐줄까?”
“네……. 다음부턴 잘 먹을게요.”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는 소리 없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래야지.”
벨리아르는 포도주를 잔에 가득 따르고서 침대로 다가갔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그는 벨라에게 눈짓했다.
“이리 와.”
드디어 기나긴 식사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벨라는 기쁜 마음으로 얼른 침대에 올라갔다.
벨리아르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직접 마시려고 따라온 줄 알았던 포도주가 제게 내밀어지자 그녀의 표정이 다시 울적해졌다.
“……저 너무 배불러요.”
“못 마시겠어?”
지그시 눈을 맞추며 물어 오니 차마 그렇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아니요…….”
잠시 머뭇거리던 벨라는 결국 포도주를 받아 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마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살며시 향을 맡아보고선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배가 불러서 그리 먹고 싶지 않았었는데, 막상 한 모금 넘기니 나쁘지 않았다. 느끼하던 목구멍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벨리아르는 나른하게 앉아 벨라가 포도주 마시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조그만 게 포도주를 마실 때도 홀짝거리니 나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포도주를 거의 다 마셔 갈 때쯤 벨리아르는 일어서서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온 그가 지시했다.
“눈 감아.”
벨라는 얌전히 눈을 감았고, 그는 빈 잔을 가져가 협탁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엄지로 벨라의 상처 난 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아직 아프다고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뭔가 축축한 것이 닿는데 서서히 쓰라린 것 같기도 했다. 눈을 감고 있으니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더욱 불안했다.
“공작님……?”
“쉿, 입술 가만히 있어.”
입술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상처에 스치는 손길이 쓰라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래로 훑고 내려가는 그의 눈길을 따라 으슬한 추위가 퍼졌다.
“아…….”
찢어진 곳만 골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바람에 참지 못한 신음이 삐져나왔다. 그가 일부러 상처를 헤집어 놓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게 왜 애꿎은 입술을 이렇게 물어뜯어 놔.”
이제 거의 나아서 안 아팠는데……. 애꿎은 상처를 헤집어 놓은 게 누구인데.
입술에 발라지는 미끈한 것의 정체를 모르니 절로 그의 악취미를 탓하게 되었다. 결국 저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다행히 그것을 나무라진 않았다.
묘하게 원망이 깃든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의 눈동자가 이채롭게 빛났다.
“네가 한 거잖아. 그래 놓고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면 안 되지? 버릇없이.”
벨라는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순간, 입술을 짓누르는 손길이 너무 아파서 하마터면 그를 노려볼 뻔했다. 대신 물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네.”
얌전히 따라붙는 대답이 황당해서 벨리아르는 순간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벨리아르는 협탁 위에 올려져 있던 부드러운 실크 천에 손을 닦아 냈다. 선홍색으로 묻어 나오는 피를 보며 벨라는 무심코 혀로 입술을 쓸었다.
그러자 엄청나게 쓴맛이 느껴지는 바람에 벨라는 인상을 팍 구기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차마 침을 삼키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벨리아르가 낮게 웃었다.
“먹으라는 밥은 안 먹더니 약은 잘 핥아먹네.”
……아, 약을 바른 거였구나.
벨라는 뒤늦게 그가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약을 발라 주는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벨라의 이마를 꾹 눌러 침대로 눕혔다.
“이제 자야지.”
“잠이 안 와요.”
제법 당당한 투정이었다. 그녀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적어도 벨리아르가 느끼기엔 그랬다.
“그럼 그냥 눈 감고 누워 있어.”
그는 다시 의자에 몸을 앉혔다. 벨라는 이불을 끌어 올려 덮곤 그를 흘끗 살폈다.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어서 매번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벨라 역시 가만히 누워 있는 걸 택했다.
아까 마신 포도주 때문인지 옅은 열기가 서서히 올라왔다. 뺨이 달아오르고 머리가 조금 멍해졌다.
사고가 흐리멍덩해지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제인가, 그의 손에 죽을 뻔했던 날이 마치 꿈처럼 흐릿했다.
그러나 옆에서 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 막상 잠을 자기엔 무리가 있었다. 왠지 그가 조금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공작님.”
“왜.”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뭘까.”
나른하게 묻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옅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아마 포도주 때문에 그냥 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저 억울해요.”
“뭐?”
“공작님이 부르시는 건 줄 알고 간 거예요. ……황녀 전하신 줄 알았다면 안 갔을 거예요.”
그래서 내내 마음 한구석에 뭉쳐 있던 덩어리를 꺼내 보일 용기가 났다. 이미 울면서 얘기했던 것 같지만, 다시 한번 그에게 제대로 말해 주고 싶었다.
“알아.”
“그리고…….”
몽롱한 와중에도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어서 망설였다. 괜한 말을 꺼냈다가 그가 또 화낼까 봐.
“계속해.”
“제가 일부러 밀려고 한 게 아니라……. 황녀 전하께서 제 반지를 가져가려고……. 그래서…….”
점점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가 결국 그의 실소에 막혀 끝맺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이걸 예쁘게 군다고 해야 하나.”
“……죄송해요.”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조금 주눅이 들긴 했지만 이상하게 그가 화가 난 것 같진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요, 공작님.”
“또 왜.”
또 부르는 소리에 벨리아르는 살짝 어이없어하며 답했다. 오후에 일어났으니 밤에 잠을 잘 안 잘까 봐 술을 먹여놨더니,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은 몰랐다.
자라는 잠은 안 자고 쫑알쫑알 말만 많아졌다. 이럴 땐 또 나름 귀여워서 살려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예쁘다고 덜컥 주워 왔더니 신경 쓰이는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 왜 살려 두셨어요?”
“예쁘게 울고, 잘 빌어서.”
“아…….”
벨라는 멍한 소리를 내며 반쯤 감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러고 보니, 매번 그에게 살려 달라 빌었구나. 그럼 그는 그대로 살려 주었다. 이번이 세 번째였으니까 다음은 없겠지? 그러면…… 그 전에 도망가는 게 나을까?
벨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생각에 지레 놀라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그래도 그에게 생각을 읽는 능력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을 마주하면 붉은 눈동자가 제 안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벨라는 이불을 얼굴까지 덮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 이불을 다시 가슴께까지 끌어내렸다.
“숲에 살 때 바깥소문은 어디서 들었어?”
“……이안이 전해 줬어요.”
이안의 이름을 꺼낼 땐 목소리가 조금 뭉개졌다. 이상하게 그의 앞에서 이안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눈치 보였다.
“그랬구나.”
그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
“그럼 오늘은 내가 밖에서 들은 소문 하나 말해 줄까?”
그동안 바깥의 소문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예전엔 알고 싶지 않아도 이안이 전해 줬지만, 요즘은 성에만 있으니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과연 그가 전해 주는 소문은 어떤 이야기일까. 새로운 상황에 대해 흥미가 바짝 고개를 들었다.
“……뭔데요?”
“아들린 후작 영애가 하도 울어서 눈도 퉁퉁 붓고, 어쩐 일인지 뺨도 퉁퉁 부어서 얼굴이 영 엉망이라던데.”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였다. 가볍게 듣고 흘리기엔 전해 주는 소문의 무게가 제법 무겁게 느껴졌다.
“그 예쁜 얼굴 한동안 못 쓰겠네. 안쓰럽다, 그렇지?”
선선히 웃으며 하는 말에 멍하니 입이 벌어졌다. 문득, 사냥을 하러 간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왜 하필 지금 그 말이 떠오르는 건지 잘 매치가 되지 않았다.
“……어쩌다가요?”
“글쎄.”
“혹시, 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끝맺진 못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차마 물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손이 발그스름한 벨라의 뺨을 쓸어내렸다.
살짝 열이 오른 피부에 차가운 손이 닿으니 그 선연한 느낌이 심장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 마음대로 생각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지 네 마음대로 잘라 붙여. 네가 원하는 쪽으로.”
늘 소문에 휩싸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자신이었는데. 그는 저더러 남들이 하던 것을 하라고 한다. 마음대로 살을 붙이고 부풀려, 마음대로 단정 지으라고.
“그러면…… 황녀 전하는요?”
아무리 세상에 거리낄 것 없는 공작님이라지만 설마 황녀 전하까지 건드렸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 벨라는 은근 욕심이 많구나.”
그는 낮게 웃으며 그녀의 눈을 손으로 덮었다. 벨라는 그가 주는 어둠에 순응하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벨라.”
그의 혀에서 굴려지는 제 이름이 둥글둥글하게 들렸다. 어머니가 그 이름을 지어주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신께 사랑받는 이름이라 하였는데.
“놀러 갈까?”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악마라 칭했지만, 그녀에겐 언뜻 신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