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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34)화 (34/180)

34화

벨리아르는 일어나 제 발밑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벨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그리 끊임없이 눈물이 샘솟는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는 잠시 화를 가라앉히고 그녀의 무릎을 발끝으로 톡 건드렸다.

“일어서.”

이럴 땐 어찌나 말을 잘 듣는지, 벨라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지 벨리아르의 눈치를 살피며 여전히 훌쩍거림을 멈추지 못했다.

“눈물 그치고 따라와.”

벨리아르가 먼저 나가고 눈물을 훔치기에 여념 없는 벨라가 그 뒤를 따랐다.

에릭은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판단하고 사용인들을 불러 방을 정리하라 일렀다.

벨라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의 걸음을 따라가기 위해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걷는 속도가 워낙 차이가 나서 그런지 금방 숨이 차올랐다.

서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아 간간이 울음은 새어 나왔지만 찬 바람에 눈물이 금방 말라 버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공작의 침실로 돌아갔다. 벨리아르 역시 벨라가 없던 며칠 동안 집무실에서만 지냈기에 이 방은 오랜만이었다.

벨리아르는 자연스럽게 집무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벨라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벨리아르는 그 모습을 무덤덤하게 바라봤다. 그냥 저리 세워 둘까도 생각해봤지만, 하도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이며 상처투성이인 입술이 퍽 안쓰러워 보였다. 그는 옅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해 졌잖아. 네 자리로 가.”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벨라가 조용히 움직였다. 혹시나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침대로 가는 걸음마저 매우 조심스러웠다.

푹신한 이불에 몸을 파묻고 침대 헤드에 살며시 몸을 기댔다. 긴장에 억눌렸던 숨을 폭 내뱉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내내 눈물을 쏟느라 고생했던 눈가가 뻑뻑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벨리아르는 의자에 기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벨라가 이불을 매만지느라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나른하게 귓가로 감겼다. 그는 벨라의 소리를 배경 삼아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각하, 저는 그저 황녀 전하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프리스틴 황녀가 뭐라고 지시했습니까?”

“그건…….”

“괜찮습니다. 말해 보세요.”

“벨라라는 아이를 데려오면 된다고……. 그래서 전하의 앞에 그 영애를 데려갔을 뿐이에요. 정말이에요.”

거기서 섣부른 결론을 내렸다. 사실은 명확했다. 제니스가 프리스틴의 지시로 벨라를 데려갔다는 것. 거기에 다른 변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심한 벨라의 성격상 황녀가 부르니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갔다는 건 매우 확률 높은 가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제니스가 자신을 이용해 벨라를 꾀어 낸 발칙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줄은.

황녀와 벨라에게 신경을 치우친 나머지 제니스 아들린이라는 복병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실수…….

그 단어를 다시 곱씹은 벨리아르가 조소를 내뱉었다. 다시 머리로 열이 오를 즈음,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조금 떨어져 선 채 말을 걸까 말까 우물쭈물하는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말을 걸어올 것을 안다.

“……공작님.”

들릴 듯 말 듯 자그맣게 부르는 소리에 그는 느긋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말없이 바라보자 벨라는 눈을 내리깔고서 습관처럼 입술을 물어뜯었다.

저러니 나을 새도 없이 상처가 덧나 엉망이지.

저 버릇없는 입술을 어떻게 해 놔야 하나 고민하느라 그의 눈가가 설핏 찡그려졌다.

“왜.”

“이거…….”

조심스럽게 두 손을 내밀길래 뭔가 싶어 봤더니, 그가 선물로 준 반지였다.

벨리아르는 기가 차서 황당한 시선으로 벨라를 바라봤다가 다시 눈길을 내렸다. 공손하게 내민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설명해 보라는 듯 눈을 마주치자 상처투성이인 입술이 우물쭈물 움직였다.

“아까, 빼라고 하셔서…….”

말을 잘 듣는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건가 싶다. 아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착실히 반지를 빼 들고 오는 모습이 예뻐 보이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지를 가져갔다. 동시에 벨라의 손을 잡아챘다.

“벨라, 딱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네.”

그는 벨라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에릭이 끼워 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났다. 마치…….

“이 반지가 빠지는 날엔, 네 손가락이 잘리든 네 목이 잘리든 둘 중 하나인 거야.”

족쇄를 거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반지를 빼면 죽여 버리겠다는 뜻인 듯했다. 벨라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들었어요.”

“무슨 말인데.”

“……네?”

정작 그가 되짚어 묻자 멍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벨라는 엉켜 있던 머릿속을 다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는 결과는 하나였고, 그는 그것을 원했다.

“반지…… 절대 안 뺄게요.”

그는 옅게 미소 지으며 반지의 붉은 보석을 지그시 눌렀다.

“그래, 우리 벨라는 그것만 기억하면 되는 거야.”

불안한 아픔에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 * *

며칠 만에 돌아온 공작의 침실은 금방 익숙해졌다. 마치 짧은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느낌 마저 들었다.

전날 밤은 불안에 뒤척이다 거의 동틀 무렵이 겨우 잠들었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떠올라 늦게까지 괴롭혀 댔다.

그럴 때마다 손의 반지를 꼭 쥐고서 마음을 다독였다. 이 반지를 끼고 있는 한, 그는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그러자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릇과 테이블이 맞닿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 여러 사람이 오가는 듯 간간이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먹음직한 음식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더 이상 침대에 파묻혀 있을 수가 없어 살며시 이불을 걷어 내고 상체를 일으켰다. 몸이 찌뿌둥하면서도 개운하고 가벼웠다.

옆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보인 건 의자에 앉아 저를 보고 있던 벨리아르의 모습이었다. 그다음은,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푸른 달빛이었다.

분명 거의 아침이 되어서 잠들었으니 지금이 새벽은 아닐 테고, 그러면…….

“……설마 지금 저녁이에요?”

“두 번 깨웠어. 혹시 죽었나 해서 지켜보고 있던 참인데.”

“아…….”

“충분히 잔 것 같으니까 잠투정 그만 부리고 일어나.”

잠투정이란 말에 벨라의 눈이 번뜩 뜨였다. 남아 있던 잠이 말끔하게 달아나 버렸다.

“제가…… 잠투정을 했어요……?”

말도 안 돼. 미쳤어. 감히 누구한테 잠투정을…….

벨라의 경악하는 표정을 본 벨리아르가 낮게 웃었다.

“걱정 마. 귀엽게 봐줄 만했어.”

“……죄송해요.”

“일어나. 식사해야지.”

그의 말에 벨라는 아까부터 들리던 소리와 냄새를 떠올렸다. 침대에서 내려오니 방 가운데에 차려진 너른 테이블이 눈에 띄었다.

평소의 식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음식의 가짓수가 더 많았고 보기에도 화려한 만찬이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벨라를 향해 그가 의자를 빼 주었다.

“앉아.”

얼떨결에 앉고, 얼떨결에 그가 쥐여 주는 포크까지 들었다. 옆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벨라는 카나페를 하나 입에 넣었다. 그가 벨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칭찬하듯 다독였다.

“……공작님은 안 드세요?”

“이거 다 네가 먹을 거야.”

한눈에 보기에도 절대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아무리 먹성 좋은 사람이 오더라도 이걸 다 먹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저는…… 이렇게 많이 못 먹어요. 배가 터질 것 같은데……. 체할 거예요.”

벨리아르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이럴 땐 말을 참 잘해.”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드러난 목을 쓸어 보기도 했다. 혹여 어제 칼을 댄 것 때문에 상처가 났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흔적 없이 매끈했다.

“말도 안 듣고, 밥도 잘 안 먹고. 우리 벨라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네.”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는 말이라 그런 것일까. 질책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듣고도 그리 울적해지지는 않았다.

대신 조금 억울했다. 아무리 밥을 잘 먹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많이 먹진 않을 텐데.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올 때까지 열심히 먹고 있어. 천천히 먹어도 돼. 식으면 다시 만들어 올 거야.”

이 많은 음식을 다 먹으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 식으면 다시 만들어 올 거라는 말에 벨라의 표정이 걱정스럽게 가라앉았다.

“……어디 가시는지 여쭤봐도 돼요?”

“사냥.”

“아…….”

“왜, 뭐 잡아다 줄까?”

벨라는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아니요. ……괜찮아요.”

“밥 잘 먹고 있으면 토끼 안 잡아 올게.”

“네…….”

그 말은…… 거꾸로 말하면, 잘 먹지 않으면 토끼를 잡아 오겠다는 소린가?

순간 말의 의미를 깨달은 벨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그러니까 잘 먹고 있어.”

벨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은 배가 고프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버거운 지시였다.

그는 침울한 얼굴로 식탁 위의 음식들을 쳐다보고 있는 벨라를 뒤로한 채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에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 대기하고 있던 에릭이 바로 뒤따르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발칙한 아가씨 교육하러.”

벨리아르는 곧장 아들린 후작가로 향했다.

저번에 방문했을 땐 제법 신사적이었다. 가기 전에 미리 연락도 넣었고, 가서도 이성적으로 정보를 얻은 뒤 돌아왔다. 그저 확인이 필요했을 뿐이니.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해가 진 무렵, 푸르스름한 저녁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벨리아르는 거센 폭풍처럼 아들린 후작가를 한바탕 뒤집어엎었다.

물론 이성적이었다. 감히 저를 이용하고 거짓을 고한 것에 대해 알맞은 응징을 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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