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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33)화 (33/180)

33화

벨리아르가 한 걸음 다가오면 벨라는 주춤거리며 겨우 반걸음 물러섰다. 삽시간에 그의 반경 안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문 쪽을 흘끗 쳐다봤다. 혹시나 에릭이 같이 들어올까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방안에는 정말 그와 단둘뿐이었다.

그러다 그의 눈길에 얽매인 순간, 옅은 후회와 함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고요하게 얹어지는 눈빛이 숨구멍을 꽉 짓누르는 듯했다.

“어딜 눈 돌려.”

무심코 뒤로 물러서려다 테이블에 부딪혔다. 그가 바짝 다가오자 숨을 내쉴 수도, 들이킬 수도 없었다. 목을 잡힌 것도 아닌데 숨이 막혔다.

“반성하라고 가둬 놨더니 영 효과가 없었나 봐.”

곧이어 그의 손이 벨라의 턱을 거칠게 잡아챘다.

“주인이 왔는데 반기지도 않고.”

희미하게 조소가 곁든 어조가 두려움을 더욱 부풀렸다. 그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묵직한 향이 그녀를 절벽으로 내몰았다.

“……죄송해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움직였다. 혀가 굳은 듯 둔해져서 말이 느릿했다.

그는 생각보다 빠르게 턱을 놔주었다. 그러나 곧 벨라의 팔을 잡고서 벽 쪽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딱딱한 벽과 자신 사이에 그녀를 세워 두었다. 무감한 눈빛이 벨라를 서서히 압박하며 옭아맸다.

“벨라.”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내가 분명 방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벨라는 그것이 연회 때 이야기임을 빠르게 알아챘다. 절대 잘못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 그의 성격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벨라는 뭐라 말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잘못을 빌었다.

“……그건……. ……잘못했어요.”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그것뿐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방으로 돌아가 있으라는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제 잘못이었다.

갇혀 있는 동안 아예 체념만 한 건 아니었다. 간간이 반성 비스름한 것도 했다.

조금 더 확실히 알아보고 움직일 걸, 거기서 왜 그런 섣부른 선택을 했나 하고.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가 섞여 있었다.

“더 할 말은.”

벨라는 고개를 떨구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잠시 맴돌던 정적이 그의 잔잔한 화를 머금고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문득,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진 듯해 숨쉬기가 빠듯한 느낌이 들었다.

“없다는 거지.”

대답하려 입을 벙긋거렸지만 목구멍이 먹먹하게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벨라는 얼른 고개라도 끄덕였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일은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막연한 두려움이 덮쳐와 또다시 버릇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에릭.”

순간 입술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아픔과 더불어 그의 목소리에 놀라 어깨가 움찔거렸다. 에릭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잠시나마 바깥 공기가 섞여 들었다.

“찾으셨습니까.”

“이 방 정리해.”

땅을 향하던 고개가 살짝 들렸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든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안도, 불안, 희망, 절망. 결코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극과 극인 감정들이 맞부닥쳤다.

“그리고 벨라가 쓰던 방도 정리해. 옷이랑 물건도 하나도 빠짐없이 싹 다.”

“……주인님 침실로 옮기면 되겠습니까?”

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에릭이 다시 확인하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벨리아르의 날카로운 시선이 에릭을 꿰뚫었다.

“말귀 못 알아듣지. 다 버려. 내 침실에 있는 것도 벨라 관련된 건 모두 다. 태울 수 있는 건 태워 버리고.”

“예, 알겠습니다.”

다소 당황스러운 지시였으나 에릭은 의연하게 대답했다. 이 방안에서 선연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오직 벨라 뿐이었다. 표정에 혼란스럽고 불안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살며시 들었던 기대와 희망은 마구잡이로 짓밟혀 형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의 얼굴엔 언뜻 지루하고 귀찮다는 기색이 감돌았다.

“벨라, 반지 빼.”

그의 말이 거대한 선고처럼 마음을 내리찍었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말일 수도 있다. 그저 단순히 반지를 빼라는 말일 뿐이다.

그러나 가슴은 머리의 이성적인 사고를 따라가지 못하고 엉망으로 날뛰었다. 맞잡은 두 손끝이 애처롭게 떨렸다.

권태롭고 무감한 그의 눈빛을 받아 내려니, 마치 그와 처음 만난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코앞으로 바짝 다가온 죽음을 앞두고 한없이 무력해지는 기분.

손쉽게 제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존재 앞에서 얌전히 목을 드러낸 채 벌벌 떨고만 있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머릿속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벨라는 손가락을 더듬어 반지를 꼬옥 그러쥐었다. 머리로는 그의 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마음으로는 알았다.

그가 직접 선물해 준 이 반지를 빼라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이 그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벨라의 눈동자가 선연한 떨림을 머금고 그를 향했다. 그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그 표정을 보자 문득, 토끼를 쏘기 전이나 하녀의 팔을 베기 전이 떠올랐다.

벨리아르는 고민 없는 움직임으로 에릭에게 다가갔다. 그는 순식간에 에릭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빼 들었다. 칼날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그가 벨라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면, 당연히 살려 보내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것은 또 다른 자비이고, 그는 제 것이 아닌 것에 괜한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보라색 눈동자에 날카로운 칼날이 담겼다. 그의 의미를 확연히 깨달은 벨라는 곧장 그의 발아래로 무릎 꿇었다.

“……자, 잘못했어요, 공작님……! 살려 주세요……. 제, 제발 살려 주세요. 고칠게요. 뭐든 고칠 테니까 제발…….”

방안에 갇혀 있던 며칠 동안 했던 죽음에 대한 체념은 정말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저,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애처롭게 눈물을 매달고 살려 달라 비는데도 그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릭이 살짝 눈가를 찌푸렸을 뿐이다.

벨라는 새하얘진 머릿속을 유의미한 생각으로 채우려 애썼다. 살려면, 저 칼날이 제 목을 베기 전에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그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데, 머릿속엔 자꾸만 억울하다는 생각만이 치미니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매번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제 삶이 비참하고 가여워 서러움이 북받쳤다.

다른 사람들은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데, 나는 왜 살지 못해 죽어야 하는지. 왜 매번 이렇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지.

엄밀히 따져 보면 이번 일도 제 잘못이 아니었다. 그가 부른다고 하니 간 거고, 그저 속아 넘어갔을 뿐이었다. 바보같이 속은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아무리 그래도 죽을 만큼의 잘못 같지는 않았다.

벨라는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터진 울음을 애써 억누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저는, 저는 정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 잘못한 게 없어요…….”

울며 꾸역꾸역 말하느라 발음이 뭉개지고 엉망이었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저런 용기가 생기는 건가.

벨리아르는 제법 맹랑한 소리를 하는 벨라를 보며 기가 찬 듯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빠르게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무덤덤한 손길로 칼날을 그녀의 목으로 가져다 댔다. 예리한 칼날에 스친 머리칼 몇 가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서늘한 칼날이 목덜미에 닿자 벨라의 울음이 차츰 잦아들었다. 잦아들었다기보다, 무지한 공포에 억눌렸다는 것이 더 알맞았다.

“공작님께서…… 고, 공작님께서 부르신다고 해서 갔을 뿐이란 말이에요……! 저는 정말, 방으로……. 흑, 돌아가려고…….”

곧 다가올 죽음이 두려워 다급히 말을 뱉어 냈지만, 한계에 부딪혀 끝맺지 못했다. 잠시 억눌렸던 울음이 다시금 쏟아졌다. 벨라는 아예 바닥에 엎드려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고작 말 몇 마디 더 한다고 그의 잔혹한 성정이 어루만져질 리도 없고.

벨라는 하염없이 우느라 주위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가령, 목에서 거둬진 칼날이라든가, 바짝 인상을 찌푸린 그의 표정이라든가 말이다.

그녀는 더 이상 입 아프게 말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억울한 점을 털어 놓기라도 해야 미련이 없을 것 같았다.

“바로 방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저는 공작님이 부르신다고 하셔서……. 자, 잘못했어요. 흑……. 살려 주세요, 공작님……. 공작님은 그러실 수 있잖아요…….”

말하다 보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버릇처럼 살려 달라 빌었고, 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굳이 저를 죽이지 않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으면서 한낱 유희로 검을 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벨리아르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녀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보랏빛 눈동자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평소처럼 태연히 그 은하수 같은 눈동자를 감상하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벨리아르는 엄한 음성으로 다그쳤다.

“울음 그치고 똑바로 말해.”

정신없이 우는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는 뚜렷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똑바로, 똑바로……. 잠시 생각해 보려던 벨라는 이내 포기하고 가장 원하는 것을 말했다.

“……살려, 주세요…….”

“그건 네가 판단하는 게 아니지. 정신 안 차려?”

정신 차리라고 다그치는 그의 말 때문인지, 조금이나마 머릿속의 안개가 옅어졌다. 잘하면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아 가며 말했다.

“저는…… 공작님이 부르신다고 하셔서, 간 거예요……. 정말이에요, 공작님. ……정말 공작님 말을 잘 들으려고 했을 뿐이에요.”

벨리아르가 실소를 터트렸다. 곧이어 들릴 듯 말 듯 자그맣게 험한 말을 읊조렸다. 그답지 않게 화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 반응을 지척에서 고스란히 받아 낸 벨라는 깊은 체념에 잠겼다. 이토록 화를 돋울 줄 알았다면 그냥 얌전히 입 다물고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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