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여유롭게 웃는 모습을 보며 괜히 애가 닳았다. 벨라는 문 쪽을 힐끔힐끔 살피며 종이에 불안감을 표시했다.
[여기 있다가 걸리면 안 되는데…….]
이러다가 갑작스레 벨리아르 공작이라도 나타나면, 그러다 이 모습을 들키면…….
굳이 뒤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저 잘 도망가요. 저번에 봤잖아요.]
……그렇긴 한데.
대체 어떻게 도망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빠르게 사라지긴 했다. 이번에는 남자가 사라지면 창문을 꼭 잘 닫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이름은 엘리아스예요. 엘리라고 불러도 돼요.]
남자는 뜬금없이 제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것도 친근한 애칭까지. 벨라는 그를 경계 어린 눈으로 힐긋거리면서도 착실히 대답을 썼다.
[저는 벨라예요.]
남자는 또 한 번 소리 없이 웃었다.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눈빛으로 물으니 그는 다시 종이에 끄적였다.
[당신이 잊어버린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솔직히 남자의 생김새가 묘하게 숲을 연상시키긴 했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저런 사람을 만난 기억은 없었다. 살면서 잃어버린 기억이 있지도 않고. 역시 온전히 마음을 놓기엔 수상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나가게 해 줄까요?]
순간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수상한 남자가 건네는 솔깃한 제의보다, 벨리아르 공작이 몸에 새겨 놓은 공포가 더욱 진했기 때문이다.
벨라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엘리아스가 의외라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다시 잡힐 거예요.]
그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벨라는 그 모습을 보고서 조금 황당했다.
저렇게 쉽게 인정할 거면 무슨 자신감으로 나가게 해 준다고 한 건지.
[그럼 내가 가끔 올게요.]
[왜요?]
[벨라 외로울까 봐요.]
벨라는 눈을 깜빡이며 글자를 빤히 쳐다봤다. 자신이 글을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 황당하고 우스운 건, 저런 말에 조금이나마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벨라는 제 생각을 한심해하며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그사이 엘리아스는 또 종이에 무언가를 썼다.
[밥 먹을 시간이네요.]
똑똑.
글자를 다 읽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벨라는 반사적으로 문 쪽을 돌아보았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의 음성이었다. 다시 앞을 돌아보니 저번처럼 남자는 감쪽같이 사라진 채였다. 늘 기척 없이 왔다가 기척 없이 사라지니,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종이에 남은 글자들, 그리고 코끝에 남은 숲의 향기만이 그의 흔적이었다.
벨라는 종이를 태워 버리고 창문을 닫았다.
* * *
교황 로셀은 페이트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로드릭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기사단장인 루크 아이솔루스가 지난날 벨리아르 공작에게 상처를 입고 돌아온 뒤로 로드릭이 당분간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로셀의 책상 위엔 아직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따끈한 고발장이 올려져 있었다.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벨리아르 공작에게 정식으로 기사들을 보낼 확실한 명분이었다.
“로드릭 경께서 이번에 베른에 파견할 조사단을 맡아 주세요. 쉽지 않은 상대니, 경의 역할이 큽니다.”
“중책을 맡겨 주셔서 황송할 따름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겨우 이 정도로 벨리아르 공작가를 무너트리기엔 턱도 없지만, 그 위세를 조금 주춤하게 만들 순 있다.
피로 세워진 나라인 데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만큼, 아직 제국민들의 마음속에 심어진 불안의 싹이 파릇파릇했다.
신전의 권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선 벨리아르 공작의 권세를 줄이는 것이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공작만 꺾어 놓으면, 황제는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엔 정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시간이 좀 걸려도 좋으니 허점이 없도록 확실히 하세요. 제국민들의 불안을 어루만져 주어야지요.”
“예, 걱정하시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로셀의 입장에서 로드릭은 오래 알고 지낸 루크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쓸만한 인재였다. 융통성은 조금 없는 편이지만, 그만큼 우직하고 올곧은 성품을 지녔다. 그런 로드릭 앞에선 사사로운 욕심을 드러내는 건 불필요한 짓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지시는 신권을 강화하기 위해 벨리아르 공작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안위를 위해 교활한 마녀를 색출해 내는 것이어야 했다.
로셀은 루크 앞에서는 굳이 할 필요 없었던 연기를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로드릭을 다소 불편해했다.
“루크 경은 좀 어떻습니까?”
“점점 상태가 호전되고 있습니다. 당장 복귀하시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준비되는 대로 보고해 주세요.”
“예.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성하.”
로드릭이 물러간 뒤 로셀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를 빠득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사단장을 그런 꼴로 돌려보낸 것은 괘씸해서 상기할 때마다 열이 올랐다.
수족처럼 부리던 루크가 없으니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 *
에릭이 서류 한 장을 벨리아르의 앞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신전으로 접수된 고발장입니다.”
각지에서 날아오는 고발장들은 신전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외부로 유출되는 일은 없었다.
원칙적으로는 그랬지만, 이 땅에 벨리아르 공작의 권세가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아무리 대신전이라고 하나, 고발장 하나 빼내오는 건 에릭에게 일도 아니었다.
고발장의 주된 내용은 벨리아르 공작이 마녀를 숨겨주고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여신 타라를 섬기는 교리에 반하여 악한 마녀와 결탁했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예언에 따라 벨리아르 공작이 제국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올지도 모르니, 사전에 마녀를 색출해 내어 처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특히 여신 타라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벨리아르는 참지 못한 조소를 흘려보냈다.
이것들은 건국 역사에 관해서 공부도 안 하나.
벨리아르는 쭉 시선을 내려 이 발칙한 고발장의 작성자를 확인했다.
“아들린 후작가?”
“아들린 후작의 성정으로 미루어 봤을 때, 나서서 이런 짓을 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할 이유도 없고요.”
아들린 후작은 그럴 배짱이 없었다. 특히 벨리아르 공작가와는 여러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만큼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렇다면 범인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아들린 후작이 자식 교육은 영 엉망이네. 연회 때 보았던 그 맹랑한 아가씨의 짓인가?”
“예, 맞습니다. 제니스 아들린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보입니다.”
“황녀와 친분이 있어 보이던데.”
“……예. 유추해 보면, 프리스틴 황녀의 지시가 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게 아니고선 굳이 이런 고발장을 보낼 이유는 없으니까요.”
이런 고발장을 보낸 건 대놓고 벨리아르 공작가와 척을 지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물론, 철없는 후작 영애의 단편적인 행동이었겠지만.
“황녀의 지시에 따라 아가씨를 꾀어 낸 것도 후작 영애였으니 이런 짓을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황녀의 마음에 들기 위한 행동인지, 아니면 황녀에게 무언가 대가를 받은 건지는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로셀 반응은.”
“아무래도 이런 기회를 모른 척하기엔 성하의 욕심도 만만치 않죠. 아마 곧 움직임이 있을 듯합니다.”
“좋게 좋게 해결하려고 했더니. 꼭 귀찮게 일을 만드네.”
그냥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조용히 살면 될 것을, 굳이 기어오르려 하니.
그래도 덕분에 지루하진 않으니 아직까지는 봐줄 만한 정도였다. 제 손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면 기꺼이 맞장구쳐 줄 용의가 있었다.
“벨라는?”
“얌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에릭은 그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대답을 해 주었다. 실제로 벨라는 에릭의 생각보다 훨씬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나가게 해 달라고 조르지도 않고 벨리아르 공작을 불러 달라 애원하지도 않고, 그저 벽난로의 장작이 타들어 가는 것만 쳐다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밥은 잘 먹고?”
“……아니요. 살짝 입만 대는 정도입니다.”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벨리아르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벨라가 마음고생이 심한가 보네.”
나름 애잔하다는 어투였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처리해야 할 일들을 훑고 있어 어디로 신경이 쏠려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들린 후작가에 연락해. 오늘 방문하겠다고.”
* * *
일부러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낮이든 밤이든 커튼을 치고 시간에 무던해지려 했다.
그러지 않으면 하루든 이틀이든, 끊임없이 날짜를 세며 언제 올지 모르는 그를 기다릴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마치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 같아 비참하고 두려웠다.
벨리아르 공작에겐 그저 말 잘 듣는 장난감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데 거하게 심기를 거슬렀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을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그로서는 몇 번의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처음엔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자신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길래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까, 하고.
하지만 그녀는 곧 근본적인 것을 깨달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벨리아르 공작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였지.
고의였든 아니든 그를 화나게 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주로 죽음에 대해 체념했다. 어차피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기사들에게 쫓기던 수많은 순간이 모두 한 끗 차이로 죽음을 빗겨 나간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죽는다고 아쉬워할 것 없다. 어차피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가느다란 삶이었으니까. 살면서 이런 호사도 누려 보았으니 정말 아쉬운 것이 없다. 정말…….
“……살고 싶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스스로 흠칫 놀랐다. 촘촘히 쌓아 올리던 벽의 틈새로 쓸데없는 희망이 새어 나왔다.
벨라는 아직도 미련한 희망을 가두지 못한 것에 침울해하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깟 삶이 뭐라고.
나을 만하면 짓이기는 탓에 입술이 피딱지로 엉망이었다. 쓰라린 아픔에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예고 없이 방문이 덜컥 열리는 바람에 벨라의 동그란 어깨가 움찔거렸다. 뒤를 돌아 그를 마주했을 땐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복합적인 감정이 휘몰아쳤다. 눈치 없이 반가움이 고개를 들었고, 곧 두려움과 불안이 덮쳐와 너울졌다.
그의 표정만큼이나 알 수 없는 감정 사이에서 벨라는 맥없이 흔들렸다. 잔잔히 입꼬리가 올라가 있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벨라.”
붉은 눈동자에 일렁이는 건 짙은 지배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