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감정 없이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이 버거웠다.
……황녀를 다치게 한 것이 그렇게 화가 나는 일인가.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사는 내가 감히 귀한 사람을 다치게 해서?
치미는 억울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떨궈진 고개 위로 그의 분노 어린 시선이 거세게 내려앉았다. 보다 못한 에릭이 조용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가시죠.”
그제야 벨라는 겨우 걸음을 뗐다.
연회장에서 그가 방으로 가 있으라고 했을 때, 벨라는 당연히 공작의 침실로 돌아갔다. 마땅히 제 방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쫓겨나니 마치 버림받는 기분이었다.
눈앞에서 치우라고 했으니……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일 것이다.
에릭은 원래 그녀가 쓰던 방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벨리아르 공작의 침실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어둑히 해가 진 밤이라 오는 길을 잘 보지 못했다. 굳이 밤이 아니더라도 주위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 머릿속이 멍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에릭이 낯선 방의 문을 열며 들어가라 눈짓했다. 원래 쓰던 방보다 좀 더 소담하고 수수한 방이었다.
“지내시기에 불편하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무언가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에릭 경.”
“예, 아가씨.”
“……저, 갇히는 건가요?”
담담하고 먹먹한 물음에 에릭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그는 대답 대신 어설픈 위로를 택했다.
“놀라셨을 텐데 일단 주무세요. 복잡한 머릿속도 좀 정리하시고…….”
“그러면요? 그러면…… 언제 나갈 수 있어요?”
언제 죽는 거냐고 묻는 것이 옳은 걸까?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인님께서 찾으시면요.”
벨리아르 공작이 찾을 때까지……. 이대로 영영 찾지 않으면, 그러면 언제까지고 이 방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건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막연한 두려움이 제 숨길을 막던 그의 손으로 실체화되었다. 벨라는 떨리는 손으로 목을 더듬거렸다. 눈동자가 불안에 심히 떨렸다.
“……에릭 경, 제발 공작님을 뵙게 해 주세요. 오해가 있어요. 말씀드려야 할 게 있는데…….”
에릭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그런 벨라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가씨, 죽고 싶으십니까?”
“……네?”
“그게 아니라면 일단은 주인님 말에 따르세요. 아가씨를 가둔 것이 아니라, 다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시는 겁니다.”
에릭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치지 않게 하려고……. 가끔 그의 생각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마음을 좀 가라앉히세요. 내일 해가 뜨면 다시 오겠습니다.”
“……오실 거죠?”
“예, 걱정 말고 주무세요.”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벨라는 푹신한 이불을 품에 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색색 내쉬는 숨이 가빴다가 잦아들었다가 했다.
숲에서 지낼 적 바깥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면 불안감을 억누르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
새벽 내내 그의 차가운 음성과 눈빛이 새까만 시야에 아른거렸다.
* * *
에릭은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벨리아르의 침실 앞에 섰다. 어젯밤 벨라를 다른 침실로 옮겨 놓고 보고하러 돌아왔지만 그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아침에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돌아가야 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처음 겪는 일이었다.
에릭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오늘 아침까지 신경 쓸 일이 많았던 탓에 머리가 좀 지끈거렸다. 짧게 숨을 고른 뒤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버릇처럼 주인의 목소리에서 기분을 파악해 보려 애썼으나, 의외로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방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다채로운 향이 섞인 채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릇 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천천히 발을 디디다 파삭, 하고 들리는 소리에 발밑을 살폈다. 곳곳에 무언가 깨어진 잔해가 널려 있었다. 언제나 흐트러짐 없던 곳이 낯설도록 엉망이었다.
그 사이에서 제 주인은 홀로 고고했다. 평소처럼 느긋한 손길로 차를 우려내는 모습이 오히려 괴리감을 뿜어냈다.
마치, 거세게 분화하고 난 후 숨을 고르는 화산을 보는 듯했다. 언제 또 터질지 몰라 섣불리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벨리아르는 별 희한한 것을 묻는다는 듯한 어투로 답했다.
“안 괜찮을 건 뭐 있어.”
“신경 쓰실 일 없도록 처리해 놓았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지난밤 벨라의 거처를 옮겨 놓은 것에 대한 보고에, 그는 역시나 태연한 어조로 노고를 치하했다.
에릭은 어렸을 적부터 벨리아르의 곁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지금까지도 제 주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어제 연회에서 있었던 일도 그렇고, 감히 유추할 수조차 없는 것들이 에릭을 착잡하게 만들곤 했다.
제 주인이 프리스틴 황녀에게 비교적 관대하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어제의 일은 에릭조차 조금 놀랄 정도였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으나 이제는 벨라가 특별한 존재임을 인정하던 차였다. 아마 벨리아르 공작에게 예외가 생긴다면 그건 벨라일 것이라고.
그런 두 사람이 접점을 이루었을 때, 벨리아르는 잠시나마 이성의 끈을 놓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하고 침착함을 유지하던 제 주인의 그런 모습을 보았으니 불경한 호기심이 고개를 든 건 에릭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제 판단으로 아가씨의 침실을 멀리 옮겨 두었습니다. 혹시 그게 거슬리시면 다시 원래 지내던 곳으로 옮기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잘해 놓고 왜.”
“황녀 전하께선 오늘 아침 일찍 수도로 출발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릭은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보고를 해 가며 그를 떠본 것은 해선 안 되는 짓이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이 에릭에게로 향했다. 어서 답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이어졌다. 에릭은 무겁게 입을 뗐다.
“……주인님을 찾으시길래 급한 용무 때문에 외부로 출타하셨다고 했습니다.”
“에릭.”
“예.”
“사용인들 불러서 여기 정리하도록 해. 당분간 다시 집무실에서 주로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고. 그리고.”
소만 왕국에서 들여온 귀한 찻잔이 그의 손아귀에서 처참히 부서졌다. 아무렇지 않게 잔해를 털어 내는 것을 보며 에릭은 고개를 숙인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작작 기어올라.”
“……죄송합니다.”
벨리아르가 느릿하게 에릭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래로 내리깐 에릭의 시야에 그의 손이 보였다. 파편에 찔리고 베였던 상처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진 채였다.
에릭은 스스럼없이 제 주인 앞에 무릎 꿇었다. 권태로운 목소리가 묵직한 압박감을 품고 에릭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생각하는 건 좋은데, 불필요한 호기심은 갖지 말아야지.”
결코 뛰어넘을 수 없으니 복종해야 하는 상대였다. 자신의 신은 그런 존재였다.
* * *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깊은 새벽까지 몽롱하게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과 마주했었다. 그녀를 깨운 건 고요한 햇살이었다.
끌어안고 잤던 베개며 이불이 살짝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새벽 내내 마르지 않았던 눈가가 뻐근했다.
벨라는 상체를 일으켜 앉아 공허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다시금 침울해졌다.
……해가 뜨면 오겠다더니.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없었다. 괜스레 에릭에게 원망의 화살이 돌아갔다. 그래도 꾸역꾸역 자고 일어나니 어제보단 한결 나았다.
정말 가둬 둔 걸까?
벨라는 살며시 문 쪽으로 향했다. 가만히 귀를 대어보니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조금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문을 열었다. 문밖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곧바로 물어왔다.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정말 갇힌 거구나.
심지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 벨라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불편한 점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답하니 나가도 되냐고 물어볼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여태껏 그녀의 방문 앞을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네.”
벨라는 조용히 답하곤 방문을 닫았다. 그러나 돌아서자마자 보이는 낯선 남자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어찌나 놀랐는지 차마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니 낯선 것도 아니었다. 저번에 아무렇지 않게 창문으로 제 방을 들락거렸던 그 남자였다.
남자는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입 모양으로 ‘쉿.’이라고 하자 벨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마치 제방처럼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녀에게 앉으라 손짓까지 하며 의자를 빼 주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너무 익숙하게 행동하니 의심할 기회도 놓쳐 버린 것이다.
대체 누구냐고 물으려던 벨라는 순간 문밖의 기사들을 떠올리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곱게 눈매를 접어 웃었다.
벨라는 어디엔가 굴러다니는 종이와 펜을 찾아 테이블로 가 앉았다.
그는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지만 벨라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앞자리를 고집했다. 언뜻 보기에도 수상한 점 투성이라 선뜻 옆에 앉기엔 거북했다.
벨라는 종이에 한 마디를 쓱쓱 적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누구세요?]
저번에도 묻더니. 숲속의 다람쥐와 교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결같은 물음에 그는 낮게 웃으며 그녀의 손에서 펜을 가져갔다. 그 역시 저번과 같은 답을 써 주었다.
[창문으로 들어왔어요.]
질문과는 영 빗나간 대답이었다. 벨라는 남자가 제 물음에 답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금방 포기했다.
이 남자는 꼭 희망이 없을 때만 골라 나타나서 불쑥 다가왔다. 참 이상한 방법으로 경계심을 흩트려 놓는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