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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30)화 (30/180)

30화

그를 둘러싼 무수한 소문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오히려 그 위험한 분위기와 위압감은 그가 가진 것들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그의 옆자리는 제 것이어야만 했다. 모든 제국민들이 자신을 사랑하는데 벨리아르 공작이 예외일 리 없다.

그는, 마땅히 저를 사랑하고 제게 청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제국의 권력을 쥔 사람이기에,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 길이 느리지만 순탄히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걸…… 전하께 말씀드려야 하나요?”

이 천박한 여자가 나타나 공들여 쌓은 것들을 무참히 무너트리고 있었다. 감히, 저런 불길한 눈동자로 벨리아르 공작을 홀리고 있었다.

저게 마녀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조금씩 프리스틴의 이성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전까진 그래도 유리창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으니 행동은 유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벨리아르 공작이 친히 선물했을 그 반지를 직접 보고 있으니…… 눈과 귀가 막히는 느낌이었다. 심장을 지지는듯한 분노가 그녀의 이성을 잠식했다.

점점 손아귀의 힘이 세지는 걸 느낀 벨라가 불안한 듯 작게 소리쳤다.

“……전하!”

프리스틴의 손이 곧 반지로 향했다. 억지로 반지를 잡아 빼려는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빼. 주제넘게 네가 낄 만한 것이 아니잖니.”

“이, 이러지 마세요. 전하!”

아무리 황녀라 한들 반지를 뺏길 수는 없었다. 그냥 반지라면 굳이 저항하지 않았겠지만, 이건 벨리아르 공작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뺏기지 않으려는 벨라와, 뺏으려는 프리스틴의 실랑이가 점점 거세졌다.

“이 천한 것이 감히……!”

프리스틴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거슬렸는지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와인 잔이 소란스럽게 깨지며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테라스와 실내가 연결된 창이 열려 있었기에 그 소리는 연회장 안까지 파고들었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잔잔한 음악 소리를 해치고 사람들의 귀까지 닿기엔 충분한 소음이었다. 동시에, 조금 격해진 실랑이를 벌이던 프리스틴의 몸이 갸우뚱 옆으로 넘어갔다.

“꺄악!”

뒤이어 프리스틴의 비명이 덧씌워졌다.

굳이 벨라가 밀친 것이 아니라 프리스틴이 홀로 중심을 잃고 넘어진 것이었다. 벨라는 그저 계속 이어지는 실랑이에 저도 모르게 반지를 뺏기지 않으려 방어한 사실밖에 없었다.

넘어진 프리스틴을 보고선 벨라는 당황 어린 숨을 내뱉었다. 자신이 밀친 것이 아님에도 자그마한 죄책감이 불안한 마음을 두드렸다.

음악이 뚝 끊기며, 적당한 이야기 소리가 넘실대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유리창 너머, 테라스의 바닥에 넘어져 있는 황녀에게로 향했다.

그중엔, 벨리아르 공작도 있었다.

깨진 유리잔의 파편에 베인 프리스틴의 손에서 새빨간 피가 새어 나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오직 그 모습만이 가득 들어찼다. 옛사랑과 닮은 얼굴, 그 얼굴로 주저앉아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은…… 그의 이성을 끊어 놓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프리스틴은 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감히, 황족의 몸을 밀치는 것도 모자라 피를 보게 해?

“이……!”

벨라를 확 쏘아보며 화를 터트리려던 찰나, 사람들이 테라스로 몰려왔다.

“전하! 괜찮으세요?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세상에, 피가 나잖아! 어서 의사를……!”

프리스틴은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모이자 날아갔던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화를 내 봤자 제 감정만 풀릴 뿐 실질적인 이득은 전혀 없다. 오히려 여태 힘들게 쌓아 올렸던 이미지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저 아이에게 분노를 푸는 건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언제든지 기회를 만들 수 있으니. 그렇다면 지금은…….

“흐윽…….”

눈물을 보여 사람들의 마음을 제게 기울도록 만들어야 한다.

프리스틴은 유리에 베인 손의 상처에 감각을 집중하며 서러운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프리스틴이 눈물을 보이는 순간, 사람들의 술렁임이 더욱 거세졌다.

“전하! 어쩌다가 이런 일이…….”

“어쩜 좋아…….”

사람들은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는 프리스틴을 안쓰럽게 여기며 벨라를 흘끗거렸다.

벨라도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곱지 않음을 느꼈다. 원래도 좋게 보진 않았지만, 황녀가 저리 눈물을 보이니 천하의 못된 년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제 말을 들어줄 사람도, 일의 자초지종을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오직 결과만을 중시했다.

그때, 다소 소란스럽던 분위기가 일순 고요해졌다. 프리스틴의 주위로 몰려있던 사람들이 주춤주춤 옆으로 갈라졌고, 그 사이로 벨리아르 공작이 나타났다.

그는 프리스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빗나간 듯 공허했다.

“……벨라.”

벨라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제 것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걸 증명하듯 벨리아르는 그녀에게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프리스틴의 다친 손을 소중히 감싸 주었다. 벨라는 그런 둘을 지켜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인데…….

그 모습이 몹시 애처롭고 애틋해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도 함께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그의 입에서 벨라의 이름이 나오던 순간, 프리스틴은 이를 꽉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이름을 불러 봤자 무엇하나. 그의 눈빛과 손길은 오로지 저를 향하고 있는데.

“흐윽……. 벨리아르 공…….”

프리스틴은 눈물이 더 잘 흐르도록 눈을 잦게 깜빡이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벨라, 방으로 돌아가.”

이번엔 황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벨라를 부르는 것이 확실했다.

벨라를 향한 차가운 음성이 프리스틴의 화를 녹였다. 그가 말할 때마다 귓가로 옅은 진동이 전해졌다. 프리스틴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지금의 상황이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그렇지, 벨리아르 공작은 당연히 제 것이어야 했다. 저런 불길한 눈동자를 가진 마녀 따위가 아니라, 이렇게 저를 소중히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었다.

“……공작님, 이건…….”

벨라는 얼어붙은 입을 겨우 움직여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벨리아르 공작은, 적어도 그는 제 말을 들어줄 거라 믿었다.

“벨라.”

그러나 벨리아르는 그녀가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단칼에 잘라 냈다.

“내가 두 번 말해야 하나?”

그의 서릿발 같은 눈빛과 마주한 순간, 벨라는 제 심장도 같이 얼어붙는 듯했다.

얼음처럼 단단히 굳은 심장이 저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깨부숴졌다. 산산이 흩어진 파편들을 차마 주워 담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벨라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 * *

방으로 오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빼곡히 칼날이 솟아있는 길을 맨발로 걷는 것처럼 순간순간이 괴롭고 아팠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어머니라는 유약한 방패마저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없는 어린아이에게로 쏟아지던 그 시선들과 같은 결이었다.

그런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그가 프리스틴 황녀를 감싸서?

이유는 다양했고, 하나하나 짚을 때마다 더욱 서럽고 비참해질 뿐이었다. 벨리아르 공작을 당연히 제 편이라고 착각한 스스로가 너무 같잖아서 견딜 수 없었다.

벨라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지난날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보랏빛 눈동자를 하고서, 황녀와 닮은 여자가 벨리아르 공작과 애틋한 연인으로 나왔던 꿈 말이다.

몹쓸 꿈을 꾸었다 했더니 오늘을 겨냥한 예지몽이었나 보다. 이러려고, 이런 꼴을 보려고…….

벨라는 걷는 내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을 억누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짓씹었는지 입술이 다 터져 비린 맛과 함께 쓰라린 아픔이 몰려왔다.

힘겹게 방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숨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녀는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내가,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사람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아??하는 걸까.

벨라는 차마 침대에 올라가지 못하고 그 아래에 등을 받치고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은 채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흘린 눈물로 무릎이 온통 축축해졌을 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가 난 감정을 반영하듯 거칠게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벨리아르 공작이었다.

벨라는 몸을 일으켜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들어오는 것만으로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벨라는 황급히 눈가를 문질러 물기를 닦아 내곤 살며시 입을 뗐다.

“……황녀 전하는요? 많이 다치셨…….”

“입 다물어.”

냉정한 음성에 절로 목소리가 막히고 고개가 떨궈졌다. 제 말은커녕 목소리조차 듣기 싫다는 티가 역력했다.

잠시 메말랐던 눈가가 다시금 촉촉이 젖어 들었다. 한번 눈물이 맺히고 나니 그 뒤로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왜……. 그렇게 싫으면 번거롭게 살려 두지 말고 죽이지 그랬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찢어진 입술을 깨물어 봐도 차마 담아 내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죽죽 흘러내렸다.

“……공작님, 제가 이,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니라……. 황녀 전하를 만나러 간 것도…….”

“에릭.”

울음을 삼키며 꾸역꾸역 말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벨리아르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고는 밖에 있는 에릭을 부름으로써 다시 한번 그녀의 말을 끊어 냈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상처 난 입술을 꾹 짓씹었다. 아까부터 다시 터지기 시작한 상처가 더욱 벌어지는지 통증이 거세졌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으로 쓰게 맴돌았다.

에릭이 들어오자 벨리아르는 곧장 지시했다.

“내 눈앞에서 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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