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술잔을 쥔 아들린 후작의 손바닥에 슬금슬금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예, 예……. 당연히 농담이었습니다. 귀여운 강아지한테……. 예…….”
“그리고 저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다 비슷하게 생긴 순혈 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체 어떤 개길래 그 까다로운 벨리아르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은 걸까. 아들린 후작은 진심으로 그 개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한번 보고 싶군요.”
“이미 보셨을 텐데.”
벨리아르는 뺨을 붉게 밝히던 벨라를 떠올렸다.
“하얀 털…… 비슷하고, 눈동자가 예뻐서 눈에 확 띌 텐데요.”
오늘은 좀 풀어 두어서요.
벨리아르 공작이 작게 덧붙인 말에 아들린 후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회장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곧 자기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는지 허무하게 웃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털 날리는 짐승을 연회장까지 풀어 두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 후작의 모습을 지켜보며 벨리아르는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우리 벨라는 제집으로 잘 돌아갔으려나.
* * *
연회장 밖으로 나오니 막혀 있던 숨이 트였다. 저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하고 있었는지 다리도 후들거렸다.
바깥의 정원에도 몇몇 귀족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득실득실한 연회장보단 훨씬 나았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쳤다고 생각하니 더욱 몸에 힘이 빠졌다. 그녀는 하얀 기둥을 붙잡고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숨을 고르고 난 뒤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서, 푹신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 싶었다. 벨라는 자연스럽게 공작의 침실을 떠올렸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영애.”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에겐 닿지 않았다. 그 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애?”
또 한 번의 부름이 들리고, 벨라는 그제야 그 목소리에 귀가 뜨였다. 그렇다고 돌아본 것은 아니었다.
가벼운 손가락이 어깨를 톡톡 건드렸을 때, 벨라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또래로 보이지만, 그보다 살짝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다분히 귀족다운 미소였다.
“……네?”
설마 자신을 불렀던 건가 싶어 멍하니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벨라는 여자의 미소가 참 신기했다. 어쩜 저리 그림으로 그린 듯 군더더기 없이 예쁘게 웃는지.
“불러도 안 돌아보길래요. 전 아들린 후작가의 장녀 제니스 아들린이에요. 반가워요.”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귀족은, 벨라에겐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자신을 소개한 제니스가 벨라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아…… 네.”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속은 혼란스럽게 뒤집힌 상태였다. 그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혹은 무례한 대답이 나갔다. 역시나, 제니스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무례했나요?”
그 말 한마디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예의 있게 상대의 기분을 묻는 말 한마디에, 허술한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내렸다. 벨라는 다급히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에 응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저…….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죄송해요.”
습관적으로 죄송하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벨라는 그 순간 벨리아르 공작의 서늘한 얼굴이 떠올랐다.
남에게 함부로 무릎 꿇지 말라는 말엔 함부로 숙이고 들어가지 말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었음을 안다. 벨라가 지레 찔려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선가 공작이 자신을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죄송하긴요. 사실 아까부터 영애와 대화해 보고 싶었어요. 영애랑 친해지고 싶거든요.”
친해지고 싶다니……. 이안 외에는 처음 들어 본 말이라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귀족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대놓고 경멸스러워하며 욕하면, 차라리 그게 더 편할 듯했다.
제니스가 그녀와 눈을 맞추며 상냥하게 말했다.
“머리칼 색이 참 아름답네요. 눈도 그렇고요.”
“……감사합니다.”
대체 언제부터 그녀는 자신에 대한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을까.
여태까지 경험한 바로는 그 칭찬들의 십 분의 구는 비꼬는 것이었다. 나머지 십 분의 일은 이안의 칭찬이었다. 그 말은 곧, 이안을 제외하고선 그녀에게 순수한 칭찬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니스의 말 역시 투명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머리로는 알면서, 마음으로는 그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태 그랬듯이 말이다.
“벨리아르 공작 각하께서 제게 좋은 기회를 주셨네요.”
“네?”
“각하께서 아까 할 말이 더 있었는데 못 전하셨다고 영애를 다시 불러와 달라고 제게 부탁하셨거든요.”
제니스는 살며시 본론을 꺼냈다. 하지만 벨라는 그녀가 하는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정말 공작님이 보낸 사람이 맞을까? 자신을 부르려는 거면 에릭을 보냈을 텐데.
그러나 생각해 보면 오늘 에릭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에릭이 지금 부재중일 수도 있고…….
여러 생각을 하느라 대답이 늦어지자 제니스는 의아한 얼굴로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
“베일리 남작 영애?”
그 호칭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연회장에서 사람들에게 제 소개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런 호칭으로 부를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단순히 벨라가 알기로는 벨르아르와 에릭, 둘뿐이었다.
“……아, 미안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요.”
제니스는 개의치 않는 듯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인사를 건넸는데 영애께서 받아주셔서 기뻐요. 그럼, 절 따라오시겠어요?”
벨라는 제니스를 따라 다시 연회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작을 찾으려 안을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제니스가 살며시 말을 얹었다.
“각하께선 테라스에 계세요.”
“아, 네.”
제니스는 그녀를 이끌고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로 발을 들이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건 벨리아르 공작이 아니라 프리스틴 황녀였다.
황녀는 한 손에 붉은 포도주가 넘실대는 와인 잔을 든 채 날카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역시. 귀족이 정말 친해지고 싶어서, 순수한 호의로 다가왔을 리가 없다. 벨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잠깐이지만 그 호의에 설렜던 스스로를 알기에, 그 사실이 미칠 듯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앞에선 저렇게 웃으며 다가와도 뒤에 가선 비웃을 게 뻔했다. 제 태도가 얼마나 우스웠겠나.
이런 것이 더 악질이었다. 황녀의 앞으로 끌고 가려던 것이었으면 애초에 대놓고 말할 것이지, 왜 쓸데없이 공을 들여서…….
“전하, 찾으시던 영애를 데려왔어요. 부디 즐거운 대화 나누시길 바랄게요.”
제니스는 끝까지 상냥하게 웃으며 응원하듯 벨라의 등을 토닥였다. 그 손길이 닿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벨라.”
프리스틴은 일부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속엔 상대를 찍어 누르려는 묘한 기세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대가 어느 가문에 속해있는지 모르니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불러야 하네요. 벨라도 이해하죠?”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라 오히려 그녀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벨라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연회 전날, 에릭이 가르쳐 준 인사법이었다.
“……저는, 포르타 백작령에서 온 베일리 남작 가의 차녀 벨라 베일리입니다. 전하께 소개가 늦었습니다.”
프리스틴은 그녀의 제대로 된 인사가 오히려 떨떠름한 듯했다.
“아…… 그래요? 포르타 백작과는 몇 번 보았는데……. 음, 미안해요. 내가 자잘한 가문까지 모두 꿰고 있진 않아서 말이에요.”
가문이 별 볼 일 없다고 비꼬는 의미거나, 그런 가문은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의심일 것이다.
“……괜찮습니다, 전하.”
들릴 듯 말 듯 작은 코웃음 소리가 얼핏 들렸다.
“반지가 참 특이하네요. 자세히 보고 싶은데, 손을 좀 내밀어 볼래요?”
이상하게 황녀에게 반지를 보이려 손을 내미는 것은 탐탁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벨라가 입을 꾹 다문 채 움직이지 않자, 프리스틴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녀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평민이 황족의 말을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분명 그가 완벽하게 처리해 놓았다고 했으니 황녀가 제 원래 신분을 알진 못할 텐데……. 아니지, 그래도 제국의 황녀인데 그 정도 정보는 입수할 수 있지 않을까?
벨라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동안 프리스틴이 그녀의 손을 잡아채 갔다. 반지를 낀 오른손이었다. 곧바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프리스틴의 힘이 생각보다 셌다.
프리스틴은 원래 벨라를 불러내 지난날 받지 못한 사죄를 받아 낼 예정이었다.
연회장 안쪽에서 투명한 유리창으로 보이는 테라스를 장소로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벨라가 제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것. 그게 프리스틴이 원하는 것이었다.
프리스틴은 굳은 얼굴로 벨라의 반지를 쳐다봤다. 기분 나쁜 감정이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났다.
“참 아름다운 반지네요.”
내용은 칭찬이었으나, 말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놔주세요.”
“이 반지 역시 훔친 것이 아니겠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선물 받은 건가요? 벨리아르 공작에게?”
프리스틴 역시 연회장에서 벨라가 그에게 인사하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대화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했다.
“반지…… 감사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순진한 척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꼴이 심히 달갑지 않았다.
벨리아르 공작이 그녀에게 반지를 선물로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도저히 가라앉지 않는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벨리아르 공작은 여태껏 제게 무엇 하나 준 적이 없었다. 늘 자신이 편지를 보내고, 꽃을 보내고 마음을 표현했다.
매번 돌아오는 건 형식적인 대답이 담긴 편지뿐이었다. 그것마저도 공작이 직접 쓴 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이 태생도 알 수 없는 여자에게는…….
벨라가 제 눈앞에 나타난 순간 손가락의 반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왜 하필 붉은색의 루비가 박힌 반지를 선물로 주었을까.
그의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반지를 보고 있자니 너무나도 열이 뻗쳤다. 겨우 저런 불길한 여자 따위에게 부러움을 느끼는 것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살면서 누군가를 부러워한 적이 있었던가. 프리스틴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지, 부러움을 느끼는 위치는 아니었다.
프리스틴은 열 살 무렵에 벨리아르 공작을 처음 보았다. 그녀는 세상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 벨리아르 공작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