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남자는 없었다. 대신 낯익은 새가 있었다. 벨라가 반갑게 웃으며 얼른 창문을 열었다.
“너 그때 그 애구나.”
작은 새는 총총 다가와 그녀의 손에 부리를 비볐다. 그저 착각일 수도 있지만, 새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듯했다.
벨라는 기분 좋은 얼굴로 새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보다 살짝 큰 새는 딱 쓰다듬기 적당한 크기였다. 새는 곧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에 관심을 보였다.
새들은 정말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나?
부리로 붉은 보석을 콕콕 찌르려 하자 그녀는 다급히 손을 뺐다.
“안돼. 선물 받은 거란 말이야.”
안 그래도 버거운 선물인데 흠집까지 나면 속상할 것 같다. 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다른 손으로 다가왔다.
너무 매몰차게 손을 뺐나 싶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침마다 하녀가 빵을 가져다 두는 것이 생각났다.
“빵을 좀 줄까? 잠시만 기다려 봐.”
벨라는 새가 좋아할 생각에 들떠 얼른 테이블로 다가갔다. 다행히 평소처럼 따끈한 빵이 올려져 있었다.
빵을 반 정도 떼어 내어 다시 창가로 다가갔으나 그 짧은 시간에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손에 든 빵이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에 버석해졌다.
벨라는 작은 새가 남기고 간 깃털을 만지작거리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가 버렸네.”
그래도 흔적은 남겨 주었구나. 너른 하늘을 날다가 지쳤을 때 또 찾아와 쉬고 갔으면 했다. 작은 온기를 전해 받는 것이 그녀에겐 큰 행복이고 기쁨이었다.
* * *
기어코 해가 떨어지고 본격적인 연회의 밤이 시작되었다.
“연회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녀는 프릴로 장식된 새하얀 드레스를 가지고 왔다. 벨라는 드레스를 보자마자 곤란한 듯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 화려한 드레스에 보란 듯한 자수정 장식. 이건…… 귀족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자수정은 귀족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자수정은 귀족들의 전유물이라며 귀하게 여기면서도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마녀를 배척하고 경멸했다.
모순적인 태도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그런 귀족들 사이를 이런 차림으로 활보하는 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저, 다른 옷은 없을까요? 조금 덜 튀는 색으로…….”
“주인님께서 이 옷으로 고르셨습니다.”
“……아, 네.”
벨리아르 공작이 직접 골랐다고 하니 토를 달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녀의 무감정한 표정을 보니 어떻게든 결과가 바뀔 것 같진 않았다.
가다가 어느 성격 나쁜 귀족에게 붙잡혀 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벨라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체념했다.
뒤이어 하녀 몇 명이 더 들어왔다. 여러 손길에 둘러싸여 벨라는 베일리 남작 영애로 변신했다.
화장을 한 것이 난생처음이라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마치 거울 너머로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그리 싫어하던 귀족이 말이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똑바로 마주 봤다.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자 베일리 남작 영애 역시 미소로 답했다.
심장을 간질이는 묘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했다.
“제가 연회장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세요.”
분명 조금은 자신감이 붙은 채로 하녀를 따라나섰던 것 같은데, 연회장과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무뎌졌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절벽 위의 다리로 발을 들이는 느낌이었다. 저 아래로 추락하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의지하며 붙잡고 건널 줄조차 없었다.
혹여 다른 사람이 말을 걸면 어떡하지. 연회장에서 지켜야 할 예법이나 귀족들의 법도 같은 건 전혀 모르는데.
이런저런 걱정이 들자 벨라는 두 손을 꼬옥 맞잡았다. 정확히는, 그가 준 반지를 감싸 쥐었다. 위태로운 다리 끝에 벨리아르 공작이 있다.
성의 정원은 평소와 매우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사람 사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적막하던 곳이 고즈넉한 활기를 띠었다.
곳곳에 담소를 나누는 귀족들이 보였다. 온통 격식 차린 귀족들뿐이었다. 그 사이로 걸어갈 때마다 여지없이 불편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누구지?”
“벨리아르 공작가에 저런 사람이 있었어?”
새로운 얼굴인 그녀를 두고 수군대는 말소리가 물감처럼 사람들 사이로 번졌다.
“근데 눈 색이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러게.”
“귀족 중에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
자세히 들리지는 않지만 이따금 아픈 말들이 마음을 할퀴었다. 평생 그녀의 자존감을 야금야금 갉아먹던 말들이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몸을 웅크리고 경멸스러운 시선들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일 연회 땐 그냥 얼굴만 한 번 비추고 방에 돌아가 있어.”
강압적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가 내린 지시를 똑똑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 지시를 어기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러니 아무리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쳐도, 그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벨라는 모든 감각을 벨리아르 공작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눈은 그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그의 나른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의 잔혹하고 무자비한 손길을 상기하며 온몸을 공포로 덧칠했다.
낯선 타인의 이유 없는 경멸에서 숨기 위한 가시 방패였다. 설령, 그 가시가 저를 찌르더라도 상관없었다. 아픔을 가리기 위해 또 다른 아픔으로 덧칠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
공허하게 움직이던 보랏빛 눈동자가 그를 발견하고선 짙은 빛을 띠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공작님.”
그는 어느 귀족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그를 불렀다. 물론 예법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벨리아르 역시 그녀의 무례한 태도를 지적할 마음이 없었다. 가르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단순한 쓰임에 쓸데없는 것을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대화를 나누던 귀족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선 온전히 벨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가 지시한 대로 꾸며져 있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귀족들을 자극하기에 딱 알맞았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앞으로 손을 내밀며 짧게 지시했다.
“손.”
벨라는 어느 손을 줘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반지 낀 오른손을 그의 손바닥 위로 살포시 올렸다. 그가 다시 한번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이 준 반지를 엄지로 한 번 쓸어내린 벨리아르는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며 옅은 포도주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잘했어, 벨라. 훌륭해.”
솜털처럼 날아와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의 목소리에 동그란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의 칭찬 때문인지 아니면 은근히 술기운을 품은 포도주 향 때문인지, 뺨으로 바짝 열기가 올랐다.
벨리아르는 다시 허리를 세워 벨라를 내려다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달싹이는 입술을 보며 느긋하게 시간을 주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요? 우리 아가씨께서 내게 할 말이 뭘까.”
그는 꽤 기분이 좋은 듯했다. 나른한 어투에서 안정된 여유가 느껴졌다. 벨라는 조심스럽게 입가로 미소를 퍼트렸다.
“반지…… 감사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의 앞에서 웃는 것은 처음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리 자연스럽지 않은 미소는 말을 끝마치자 곧장 사라져버렸다.
벨리아르는 기껏 말해 놓고 쑥스러운 듯 입술을 가만두지 못하는 모양새를 가만히 바라봤다. 짓씹고, 꽉 물었다가 놓고, 이따금 혀로 쓸고. 억울하게 혹사당하는 입술이 점점 붉어졌다.
그 입술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그의 눈에 거슬린 건 그 입술이었다. 물어뜯고, 거칠게 헤집어 놓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기어이 피를 보고 싶었다. 지난날, 지하에서 들었던 충동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위험한 빛이 서린 눈을 살며시 접어 미소 지었다. 문득 그녀에게로 쏠려 있는 뭇시선들이 짜증 나던 참이었다. 치미는 소유욕을 능숙하게 가린 그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단할 테니 방으로 돌아가서 쉬세요.”
그것 또한 명령이었고, 그녀가 바라던 바였다. 벨라는 허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왔던 길을 그대로 밟아 나갔다.
그녀는 그에게 온 신경을 집중한 나머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연회장 내의 모든 시선은 둘에게로 쏠려 있었다.
벨리아르는 벨라가 연회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완전히 제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대화를 나누던 아들린 후작에게 몸을 돌렸다. 그는 능숙하게 새로운 대화 주제를 던졌다.
“요즘 개를 키우는 게 여인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던데, 들어 보셨습니까?”
“어유, 들어 보다마다요. 제 딸아이와 부인도 하도 개 타령을 해 대길래 이번에 결국 두 마리를 들였지요. 그런 털 날리는 짐승이 뭐가 좋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들린 후작은 당연히 그가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넌지시 물었으나, 그는 의외의 답변을 하였다.
“글쎄요. 나쁘지 않은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예? 아, 각하께선 사냥을 즐기시니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매번 하던 것만 하면 지루하니까요. 가끔은 생명을 거두어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죠.”
평소 그의 행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이렇게 잘 대화하다가도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어떤 방식으로 응징이 돌아올지 모른다.
아들린 후작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춘 채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썼다.
“그럼 제가 혈통 좋은 녀석으로 한 마리 선물해 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하얀 털이 매력적이라…….”
“괜찮습니다. 이미 키우고 있어서요.”
“예? 공께서요?”
후작은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잔혹한 성정으로 명성이 자자한 벨리아르 공작이 개를 키운다……?
잠시 황당해하고 있던 후작은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폈다.
“아, 사냥개를 말씀하신 것이군요. 하하, 제가 잠시 착각할 뻔…….”
“아니요. 작고 앙증맞은 애한테 사냥개라니요. 농담을 하신 겁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매우 진지하고, 언뜻 기분 나빠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