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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27)화 (27/180)

27화

다음 날, 혹여나 황녀가 다시 자신을 찾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아마 연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제게 신경 쓸 겨를은 없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연회가 끝나면 황녀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간다고 들었다. 그럼 이제 더 이상 부딪칠 일이 없을 사람이었다.

오히려 황녀보다 더 걱정해야 할 존재는 벨리아르 공작이었다. 전날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그는 또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오히려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도 같고. 물론 그건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일어나자마자 몰래 거울을 봤지만 목이 조금 붉어졌을 뿐 확연한 흔적은 남지 않았다. 그는 주로 기억 속에 공포를 새기는 편이었다.

에릭의 말처럼 정말 연회 전날이 되자 고요하던 성이 조금은 활기를 띠었다.

성 곳곳을 장식하느라 사용인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녔다. 소란한 분위기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창문 너머로 사용인들을 구경하고 있던 그녀에게 벨리아르가 다가와 서류를 하나 건넸다.

“숙지해. 네 가문 정보야.”

“……네?”

가문이라니, 그게 무슨.

성도 모르는 그녀에겐 마냥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당최 무슨 소린가 싶어 서류를 확인해 보는데, 익숙한 듯 낯선 이름이 있었다.

벨라 베일리.

포르타 백작령의 베일리 남작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머나먼 남쪽 땅의 귀족이었다.

그 아래로 벨리아르 공작가와의 관계가 설명되어 있었지만, 대충 보기에도 상당히 복잡했다.

“사람들에게 널 내 먼 친척이라고 소개할 거야.”

그의 말이 딱 맞았다. 먼 친척. 이 정도면 그냥 남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관계로 보였다.

“그걸…… 믿을까요?”

“내가 그렇다는데 누가 반박해.”

벨라는 곧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벨리아르 공작이 직접 제 친척이라고 하는데 딴지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제 황녀조차 그런 반응이었으니.

“서류상으로도 완벽하게 처리해 놨으니까 문제 될 건 없어.”

벨리아르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베일리 남작가의 영애가 되신 소감은 어떠십니까?”

그의 존댓말은 정말 낯설었다. 너무 이상한 나머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제 손에 들린 서류 역시 그랬다. 벨라 베일리. 성이 생겼는데 그리 기쁜 마음은 아니었다.

“……제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어색해요, 불편하고.”

“그래, 네 것이 아니지. 그건 단지 임시적인 신분일 뿐이야. 언제든,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지.”

제게 주어진 것들은 오로지 그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입고 있는 값비싼 옷들, 장신구, 그리고 그럴듯한 신분. 모든 것이 그가 예쁘게 가꾸어 놓은 것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제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무언가를 가져 본 적이 없기에.

“내일 연회 땐 그냥 얼굴만 한 번 비추고 방에 돌아가 있어.”

연회 얘기가 나오자 벨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참석해야 하는 거예요?”

“말했잖아. 얼굴만 한번 비추라고. 그럼 네 할 일은 끝이야. 방에서 놀고 있으면 돼.”

아, 그래서 귀족의 신분을 준 건가.

귀족들이 득실거릴 연회장에 발을 들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긴장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평민들보다 더한 것이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그녀의 눈동자를 싫어했다. 싫어했다는 표현으로는 아쉬울 만큼, 경멸하고 혐오함이 옳았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위협에 민감하고 그만큼 더 철저히 짓밟으려는 욕구가 강해지는 탓이다. 그들은 평민들보다 더욱 그녀의 눈동자를 두려워했다.

“……저, 그날도 에릭 경이 같이 있나요?”

“왜. 있었으면 좋겠어?”

어쩐지 에릭이 곁에 있으면 조금 든든했다. 아니, 많이 든든했다. 연회장에서도 에릭이 같이 있어 준다면 훨씬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데…….

벨라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벨리아르는 조용히 입매를 비틀었다.

“에릭이 마음에 드나 보네.”

“……네.”

“네?”

거의 망설임 없이 수긍하자 그는 황당한 듯이 그녀의 대답을 따라 했다.

“친절하시잖아요. 늘 정중하시고, 저한테 잘해 주시고…….”

벨리아르는 수줍게 웃으며 에릭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벨라를 보곤 참지 못한 조소를 내뱉었다.

에릭이 친절하고 정중하다, 라……. 대체 언제부터.

애정에 목마른 아가씨 눈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여러 가지로 재밌게 하는 아가씨였다.

그는 열심히 에릭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또?”

“네?”

“계속해 봐. 에릭 칭찬.”

벨라는 그제야 아차 싶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에도 이렇게 무표정할 때가 많아 늘 그의 감정이 헷갈렸다.

묘하게 날이 선 말투를 보면 확실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벨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화나셨어요?”

“내가 화난 걸로 보여?”

벨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로 낮게 조소가 흐르는 걸 보고선 곧바로 사죄했다.

“……죄송해요.”

“아쉽지만 네가 좋아하는 에릭은 내일 너랑 같이 못 다녀.”

“괜찮아요. 에릭 경도 바쁘실 테니까요.”

그럼 내일은 정말 혼자 연회장에 가야 하는구나.

벌써부터 솟구치는 걱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의 말대로 얼굴만 한 번 비추고 오는 거니까 별일 생길 것도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걱정에 복잡해진 머릿속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는데 잠시 말이 없던 그가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그래서.”

“네?”

“할 말은 그게 끝이야?”

……뭔가 더 해야 할 말이 있는 걸까?

벨라는 그의 말에 모든 생각을 쓸어내고 그에게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결국 고르고 고른 건 고작 짧은 인사였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데.”

“이렇게 귀한 신분도 주시고…… 배려해 주셔서요. 그리고 살려 주셔서 감사해요.”

그녀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벨리아르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고선 어이없다는 듯 낮게 읊조렸다.

“가관이네, 정말.”

* * *

드디어 연회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벨리아르 공작은 이미 침실에 없었다.

해가 높이 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듯싶다. 이제 이 너른 침대를 독차지하는 것에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잠을 깨려 애썼다. 예전엔 이렇게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건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는데. 그녀의 일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며 에릭이 들어왔다. 전엔 의미 없는 노크라도 하더니, 이젠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러나 벨라는 전혀 개의치 않고서 그를 맞이했다.

“저 너무 늦게 일어났나요?”

“괜찮습니다. 푹 주무셨습니까?”

“네, 오랜만에 꿈도 안 꾸고 잘 잤어요.”

에릭은 그녀에게 손바닥만 한 자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받으세요. 아가씨 겁니다.”

얼떨결에 받아들었다가 부드러운 벨벳 느낌에 눈이 동그래졌다. 처음 만져 보는 촉감이었다. 그래서 더욱 안에 무엇이 든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게 뭐예요……?”

“주인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선물, 이요?”

선물이라는 말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선물은커녕 작은 호의조차 받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순간 에릭이 자신을 놀리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조금 상처가 될 것 같았다. 그만큼 ‘선물’이라는 단어가 세상 어느 것보다 달콤하게 들렸다.

“예. 열어 보세요.”

에릭은 재촉하듯 상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벨라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안에 든 물건을 확인하자마자 벨라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이건…….”

그녀의 표정을 본 에릭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이, 이걸 제가 받아도 돼요? 이건 너무…….”

선물이라고 덥석 받기엔 너무 과한 것이었다. 동그랗고 붉은 루비를 백금의 달이 감싸고 있는 모양새의 반지였다. 주위에도 자잘한 장식이 있어 적당히 화려했다.

“전에 아가씨께서 세공사에게 의뢰서를 전달하러 가셨었죠. 그 안에 든 의뢰서는 두 장이었습니다. 하나는 프리스틴 황녀의 것, 또 하나는 아가씨 것이요.”

에릭은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가락에 직접 끼워 주었다. 막 잠에서 깨어 부스스한 상태로 이런 반지를 끼려니 부담스러움에 손끝이 오므라들었다.

“잘 어울리시네요.”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주인님께 하세요. 좋아하실 겁니다.”

“……네.”

“쉬고 계시면 저녁에 사용인을 보내겠습니다. 그때 연회장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 반지 때문에 잠시 연회를 잊고 있었다. 벨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가면 안 되는 거죠?”

이렇게 가기 싫은 티를 내면 혹시나 안 가도 된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기대해 보았지만, 에릭은 단호했다.

“예, 가셔야 합니다. 가셔서 주인님께 인사만 드리고 오세요. 그리 어려울 것 없습니다.”

“……네, 알겠어요.”

이번에 그가 지시한 것은 간단했다. 연회장에 가서 그에게 눈도장만 찍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 정도도 못 할까. 벨라는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럼 쉬고 계십시오.”

에릭이 나가고 온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 벨라는 다시 제 손가락의 반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자그맣게 콕콕 박혀 반짝이는 투명한 보석부터 가운데 자리한 붉은 루비까지. 보물이라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반지를 쓸어 보았다.

가운데 붉은 루비를 보고 있자니 벨리아르 공작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의 무서운 눈빛이 자꾸만 저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당장은 선물이 주는 설렘이 더 컸다.

“선물…….”

그녀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살며시 퍼져 나갔다. 연회장에 가기 싫다는 마음이 조금 옅어졌다.

가서 그를 만나면,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해야지.

뜻밖의 선물 덕분에 잠이 완전히 달아나 버렸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은 없어 반지만 계속 흘긋거렸다. 끼고 있기 아까운데 다시 상자에 넣어놓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혹여 잃어버릴까 불안하기도 하고.

그때 창문에서 톡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현듯 기척 없이 창문으로 나타났던 숲을 닮은 남자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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