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어떤 급한 일이 있더라도 부르지 마. 에릭 네가 알아서 처리해.”
“예, 알겠습니다.”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녀는 이 방에서 절대 나갈 수 없다는 소리와 같았다. 에릭을 향해 불안한 눈빛을 한 번 보내 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팔을 잡고 방안으로 밀어 넣었다. 가차 없이 닫히는 방문이 야속했다. 오로지 둘만 존재하는 너른 침실 안에 아찔하고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이번엔 정말 화가 났다. 평소엔 그의 기분을 파악하기 헷갈릴 때가 종종 있었는데, 지금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시선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그의 손이 자신을 덮칠까 두려워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벨라.”
그의 입안에서 부드럽게 이름이 굴러 나왔다. 뿜어내는 분위기와는 달리 제법 다정한 부름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의 가면에 어리석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벨라는 떨리는 손을 맞잡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잘못을 빌었다. 얌전히 순종하면 그의 화가 좀 누그러질까 싶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건 차가운 물음이었다.
“뭐를 잘못했는데.”
그리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의 지시를 어기고 황녀의 편지를 보관하고 있던 건 명백한 잘못이었으니까.
“공작님께서…… 편지 버리라고 했는데, 안 버린 거요.”
“그리고, 또.”
또?
벨라는 그때부터 살짝 당황하기 시작했다. 대답을 재촉하는 그의 서늘한 눈빛에 억눌려 애써 머리를 굴렸다.
“……어, 음……. 말없이 황녀 전하를…… 만나러 갔어요.”
그는 벨라의 턱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자 눈을 맞추라는 듯 손아귀의 압박이 거세졌다.
결국, 피할 곳을 찾지 못한 보랏빛 눈동자가 애처로운 떨림을 품고서 그를 향했다.
“또.”
“공작님…….”
“부르지 말고 생각을 해. 또 뭘 잘못했어.”
“그건…….”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먹먹했다.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못한 것이라곤 편지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뿐인데.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리 화를 내는 건가 싶어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없어요. 이제…… 없는 것 같아요.”
“확실해?”
“……네.”
그의 입꼬리가 조용히 사선을 그렸다.
“아니지, 벨라. 넌 오늘 네가 가장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잖아.”
마치 아이를 어르듯 차분하고 느긋한 말투였다. 그러나 턱을 쥐고 있는 손엔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이러다가 그가 제 턱뼈를 으스러트리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이 급격히 솟구쳤다.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 같아서.
“지하로 갈까?”
그가 ‘지하’라고 얘기하자마자 벨라의 숨이 가쁘게 흐트러졌다. 거의 다 나아서 통증이 없던 발목으로 지난날의 공포가 다시 스며들었다.
그의 손에 처참한 몰골로 죽어 가던 기사의 모습, 어둡고 축축한 지하의 만연한 피비린내.
그는 그날 손쉽게 제 목을 비틀어 버릴 수 있었다.
지하로 갈까.
그 말 한마디에 그녀는 공포에 잠식되었다.
“……아, 아니요, 공작님……. 저는…….”
하얗게 질려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는 벨라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무감정했다.
그 시선을 받아 내는 것이 버거웠는지 벨라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작은 파동을 일으키던 보랏빛 밤하늘은 곧 물기로 어룽졌다.
“내가 뭘 했어?”
“아니요…….”
“근데 왜 울려 그래. 벌써 울면 곤란하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린 소리에 그녀의 뺨으로 눈물 한 방울이 톡 흘러내렸다. 그녀가 눈물을 보인 건 오로지 벨리아르 공작 때문이었다.
“벨라, 네 주인이 누구지?”
주인……. 그녀는 그의 말로써 제 처지를 다시금 상기했다. 그가 목줄을 느슨하게 쥐었다고 잠시 착각했다. 어차피 묶인 것은 똑같은데. 그는 느슨히 잡고 있던 사슬을 바짝 당기기 시작했다.
“……공작님이요.”
“자, 그럼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 벨라는 오늘 무엇을 잘못 했을까.”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머릿속은 엉망이고, 그 어지러운 생각들을 겨우 헤쳐 보았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엉킨 가시덤불 속에서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다.
“……공작님,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래, 그러니까. 벨라.”
그는 가시덤불을 제치고 그녀를 일으켜줄 만큼 친절하지 못했다.
턱을 쥐고 있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가녀린 목을 쥐고서, 서서히 숨길을 조였다.
목 전체를 쥐고 조르는 것이 아니라 딱 공기가 지나가는 기도만 압박했다. 깔끔하게 숨길만 막았기에 꼴사납게 컥컥대진 않았지만 숨을 전혀 쉴 수가 없었다.
“잘못한 게 뭔지도 모르면서 왜 잘못을 빌어.”
고작 십 초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곧 죽을 것 같았다. 애처로운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기어이 그의 손으로 스며들었다.
벨라가 다급히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하찮은 힘으로 제 손을 떼어내려는 것을 보며 벨리아르는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버릇없이 굴면 안 되지.”
이십 초.
그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두 손목을 붙잡아 등 뒤로 결박시켰다.
“네가 직접 깨닫기 전까진 절대 못 벗어나. 그러니 생각해.”
삼십 초.
인간은 고작 삼십 초간 숨을 못 쉰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하지만 제 가여운 벨라는 지금도 충분히 버거운 것 같으니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 주기로 했다.
그는 잠시 손에 힘을 풀어 숨통을 틔워 주었다. 작은 자비이자, 기회이기도 했다.
“허억, 헉…….”
숨을 몰아쉬는 것에 집중하느라 다른 말을 할 여유는 없는 모양이다.
그럼 더 이상 자유를 줄 필요가 없지.
그는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오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은하수에 폭포가 흐르는 듯했다. 그는 느긋하게 제 것을 감상했다.
그녀가 입을 벙긋거리자 막았던 숨길을 살짝 풀어주었다. 그제야 마땅히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흑, 고, 공작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한 손길로 목을 살살 쓸어주었다.
“왜.”
벨라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았다. 온몸이 가시에 찔려 생채기가 나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덩굴을 헤쳤다.
그러다 보니 약간의 빛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거의 울다시피 말을 이었다.
“흐윽, 제가…… 제가, 흑, 황녀 전하께 잘못을…… 빌려고, 했어요.”
이것이 정답이 맞는지 확실치 않아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목소리를 낼 때마다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듯 둔한 통증이 이어졌다. 그가 새겨놓은 공포의 흔적이었다.
“황녀에게 잘못한 것이 있었어?”
벨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없었어요.”
“그런데.”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말을 하려고 보니 그가 왜 화를 내는 건지 조금 짐작이 갔다. 저 멀리 보이는 빛이 점점 커지는 듯했다.
“……제가, 잘못했다고 하면…… 그냥 끝나니까요…….”
“그래서, 네 말은…… 그 상황을 회피하려고 무릎을 꿇은 거다?”
그가 다시 한번 짚고 나니 명확해졌다. 편지를 버린 것 외에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가 더 있었다.
“대답해.”
“……네.”
그는 짧게 한숨을 내뱉고선 붙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갈 길을 잃은 손이 앞으로 공손히 모였다. 곧이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를 꿰뚫었다.
“무릎 꿇어.”
갑작스러운 지시에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그녀는 곧 살며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드러운 카펫에 닿은 무릎이 미세하게 간질거렸다.
“옳지.”
그가 짧은 칭찬을 얹었다. 동시에, 동그란 무릎 위로 그의 구둣발이 올라왔다. 그는 뒤꿈치는 바닥에 닿도록 한 채 발끝으로만 그녀의 무릎을 지그시 밟았다.
“벨라, 잘 들어.”
아프진 않았지만 불안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벨라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차마 그를 올려다볼 수 없었다.
“이런 태도는 내 앞에서만 보이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네.”
“그럼 오늘 네가 잘못한 건 뭐야.”
그는 다시 처음에 했던 질문을 던졌다. 황량해진 그녀의 머릿속에 단 한 가지의 말이 떠올랐다.
“……공작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었어요.”
“그래, 네가 가장 깊이 반성해야 할 잘못이지.”
이제야 그가 화가 난 이유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것들에 대해서 분노하는지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가 발을 떼곤 명령했다.
“일어서.”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에게로 못마땅한 시선이 닿았다.
“고개 들어.”
굳이 고개를 들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말과 동시에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나 이외의 사람에게 무릎 꿇지 마. 그게 설령 황족일지라도. 알아들었어?”
“……네.”
얌전히 대답하자 그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고요한 흔적을 남겼다. 그가 발갛게 변한 그녀의 눈가를 살살 쓸어내렸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턱을 놓아주는 대신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한 번 통 튕겼다.
“밖에서 안 좋은 버릇을 들여왔네.”
상관없지.
못된 버릇을 고치는 건 그의 전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