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자신이 쓴 편지이니 굳이 내용을 다 읽지 않아도 곧바로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건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보낸 편지인데.”
프리스틴이 낮게 중얼거린 말에 델리아가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그래서 공작님이 전하가 오시는 것을 몰랐나 봐요!”
확실히, 많이 이상하긴 했었다. 매번 답장이 오진 않더라도 대화해 보면 적어도 편지를 읽은 티는 났었는데.
“요즘 바쁜 일이 있어서 미처 읽지 못했습니다.”
이번엔 정말 자신이 베른에 방문한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맞이할 준비도 전혀 돼 있지 않았고.
같은 생각을 하던 델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어쩐지 이상했어요. 각하께서 전하의 편지를 읽지 않으셨을 리가 없잖아요.”
결국, 벨라가 프리스틴의 편지를 중간에 가로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프리스틴이 주먹을 꽈악 말아쥐었다. 덩달아 손에 들고 있던 편지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불길한 눈동자를 가졌다 했더니, 행동 역시 천박하기 그지없구나.
천천히 숨을 고른 프리스틴은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델리아, 그 아이를 좀 봐야겠어.”
* * *
벨라는 조금은 당혹스러웠던 산책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럼 쉬고 계십시오.”
에릭은 다른 일이 있다며 그녀를 방에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방안의 잔잔한 고요가 그녀를 맞이했다. 간혹 이렇게 홀로 있는 시간이 오면 멍한 기분이 들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긴장하게 만드는 벨리아르 공작도 없고, 말동무가 되어주는 에릭도 없으면 정말 할 일이 없었다. 벨라는 방안을 의미 없이 서성이다 방문으로 다가갔다. 이 방 안에만 있으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나가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한동안 가지 않았던 제 방이었다.
특별한 뜻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고, 그저 공작의 침실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기에 조금 더 편한 곳을 찾아 움직였을 뿐이었다.
벨라는 전에 쓰던 방으로 들어오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습지 않나. 예전엔 이 방조차도 감옥 같아서 미친 듯이 답답했었는데.
침대에 풀썩 앉은 그녀는 습관처럼 협탁의 서랍을 열어 보았다. 여전히 이안에게 썼던 편지 조각들이 그녀를 반겼다. 그러나, 어딘가 허전했다.
“……어?”
편지가 없다.
잘게 찢긴 편지 조각들은 그대로인데, 황녀의 편지만 쏙 사라졌다. 그 이후로 한 번도 건들지 않았는데. 하녀가 방을 정리하다가 치웠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 대체 어떻게…….
똑똑.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벨라가 화들짝 놀라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살며시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가씨.”
누구였더라. 잠시 기억을 더듬던 중,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누군지 떠올려 냈다. 황녀를 모시던 시녀였다.
“황녀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잠시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전하께서 저를요?”
“네.”
벨라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서 델리아를 따라나섰다. 감히 황녀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공작님이 오시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불안에 초조함이 더해졌다.
“전하, 데리고 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황녀의 앞에 서자 긴장에 몸이 얼어붙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겨우 움직여 예를 갖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프리스틴은 벨라를 빤히 쳐다볼 뿐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침묵이 불편했던 벨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그제야 프리스틴은 벨라의 앞으로 무언가를 던져 놓았다. 벨라는 제 발치에 떨어진 편지를 보곤 숨을 들이켰다. 그 반응에 프리스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지?”
이게 왜 지금 이곳에…….
오랜만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지러웠다.
“……전하.”
“예의가 없다 했더니 하는 행동마저 상스럽구나.”
“전하, 그것이…….”
“그래, 뭐라 변명할지 궁금하구나. 말해보아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말문이 턱 막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차마 벨리아르 공작이 편지를 버리라고 했다고, 그런데 버릴 수가 없어 갖고 있던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황녀가 상처받을 것이 분명하니까.
황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벨리아르 공작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모습이었다.
괜히 전에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황녀와 닮은 여인과 벨리아르 공작이 연인으로 나오던 꿈. 단순히 꿈일 뿐이겠지만 이상하게 지울 수 없는 찝찝함이 남았다.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벨라에게 프리스틴의 조소가 떨어졌다.
“그렇지, 황족의 물건을 훔쳐 놓고 무슨 변명을 하겠느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테지.”
지난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곧장 편지를 처리했어야 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괜한 짓을 해서 쓸데없는 여지를 주고 말았다.
“그 옷도 훔친 거 아니니? 네 수준에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닌 듯한데.”
“아, 아닙니다, 전하.”
“하, 그건 바로 아니라고 하네? 그럼 내 편지를 빼돌린 건 맞다는 거니?”
“그것 또한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전하.”
저 순진해 보이는 얼굴로 벨리아르 공작을 꾀었겠지. 그리 생각하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프리스틴의 언성이 바짝 높아졌다.
“도둑질에 무슨 의도가 있어!”
벨라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냥…… 잘못했다고 빌까. 무릎 꿇고 잘못했다 빌면 그래도 조금은 노여움을 푸시지 않을까.
무릎을 꿇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살면서 누군가의 발아래 엎드려 비는 건 익숙했으니까. 고작 그걸로 넘어가 줄까 싶은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무엇이든 해 봐야 했다. 입술을 짓씹은 벨라는 프리스틴의 앞으로 다가가 살며시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제가 잘못…….”
“전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용서를 구하려 차분히 내뱉는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든 누군가의 말소리에 의해 끊겨 버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이건 아마 에릭의…….
당황한 건 프리스틴도 마찬가지였다. 프리스틴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에릭이 아니라 벨리아르 공작이었다.
“……베, 벨리아르 공.”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그는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무릎을 꿇고 있는 벨라를 담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일어나.”
벨라는 숨을 죽인 채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허리를 다 펴기도 전에 그가 거칠게 그녀의 팔을 잡아 제 뒤쪽으로 잡아당겼다.
“읏…….”
팔에 가해지는 아픔이 셌던 탓에 꽉 다문 잇새로 참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벨라를 제 등 뒤로 던져 놓고서야 프리스틴에게 눈길을 주었다. 조금 전의 거친 행동과는 달리 입꼬리가 단정하게 호선을 그렸다.
“전하, 무슨 일 때문에 이러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프리스틴의 원망 어린 눈빛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저는 공께서 왜 저 아이를 감싸고 도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눈동자도 불길한 데다 태생까지 천한 것을요. 혹시, 정부로 두고 계시는 거라면…….”
“전하.”
그는 단호한 부름으로 프리스틴의 말을 끊어 냈다.
“이 아이의 태생이 천한지 어찌 아십니까.”
“살아온 흔적은 틀림없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법이지요. 귀한 옷을 입혀 놓는다고 해서 천한 행동거지까지 가려지진 않아요. 이 아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공께선 알고 계세요?”
“글쎄요. 이 아이가 대체 무슨 짓을 해서 전하의 심기를 거슬렀을까요.”
프리스틴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편지를 가리켰다.
“제게 바빠서 이 편지를 읽어 보지 않으셨다 하셨지요?”
“예, 그랬지요.”
“공께선 저 아이를 감싸기 위해 제게 거짓말을 하신 겁니다.”
프리스틴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고 벨리아르는 낮게 웃으며 되물었다.
“제가 그랬습니까?”
이곳에 오기 전까진 정확히 무슨 일 때문인지 잘 몰랐지만, 이제야 확실히 감이 잡혔다.
“저 아이가 제 편지를 몰래 훔쳤습니다. 공께서도 알고 계셨겠지요.”
그러니까 황녀의 말은, 벨라가 그녀의 편지를 몰래 빼돌렸고, 자신은 그걸 알면서도 벨라를 감싸기 위해 황녀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직접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벨라가 둘 사이를 질투해 편지를 빼돌렸다는 의미가 선연하게 담겨 있었다. 아니면, 자신이 마녀에게 홀려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거나. 참 저속한 추론이었다.
“감히 황족의 서신에까지 손을 대는 건 그리 쉽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에요. 저는 지금 당장 신전에 저 아이를 넘겨야겠어요.”
“그건 곤란합니다.”
“……정말 정부라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전하. 이 아이는 저의 먼 친척입니다. 집안의 사정이 조금 어려워져 제가 후견하기 위해 데리고 온 아이입니다.”
프리스틴의 입이 황당한 듯 벌어졌다. 고작해야 밤 시중을 드는 정부겠거니 했는데, 피후견인이라니.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정부이든 피후견인이든,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 다 최악이다.
“……그걸 지금 저더러 믿으라는 건가요?”
“전하께서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아이의 후견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벨리아르 공……!”
“그리고 그 편지는.”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편지로 한번 눈길을 주었다. 그러고는 주저 없이 사실을 말해 주었다.
“제가 벨라에게 버리라고 한 것이 맞습니다.”
“뭐, 뭐라고요? 제 편지를…… 버려요? 그럼 설마 공께서 정말 편지를 읽지도 않고 버리라고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제가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 누구도 아닌 저의 편지인데!”
“전하께서 무엇인데요.”
“벨리아르 공!”
프리스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가가 물기로 젖어 드려는 순간 벨리아르는 허공으로 눈길을 틀었다.
“그 편지는 단순히 제 불찰이었으니 책임을 물으시려거든 제게 말씀하세요.”
프리스틴은 옷자락을 꽈악 말아쥐었다.
그렇게 말하면 어찌 따질 수 있을까.
더 이상 몰아붙일 명분이 없었다. 벨리아르 공작이 직접 나서서 정부도 아니고 편지를 훔친 것도 아니라고 하니.
그녀의 시선이 공작의 뒤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벨라에게로 꽂혔다.
하, 공작의 먼 친척이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딱 봐도 평민인 것이 분명한데. 대체 어떻게 공작을 꾀어 낸 걸까. 정말 마녀라서 간악한 술수라도 부리는 걸까.
이 순간, 그녀가 미친 듯이 미우면서도 미친 듯이 부러웠다. 그의 단단한 등 뒤로 숨은 저 아이가, 끔찍이도 싫어졌다.
“……그만 나가 주세요. 쉬어야겠어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끝까지 황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눈치를 살피던 벨라 역시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뒤돌아서 벨라를 내려다봤다. 서늘한 눈길이 내려앉자 그녀는 설핏 입술을 깨물었다. 낮은 음성이 바짝 긴장한 그녀를 꿰뚫었다.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