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공작님은요?”
“사냥하러 가셨습니다.”
“에릭 경은 같이 가지 않으시나요?”
“저는 아가씨를 보필해야죠.”
그녀는 쓰게 웃으며 에릭을 흘끗 쳐다봤다.
“……이젠 정말 안 도망가는데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에릭의 말도 쉽게 믿어지진 않았다. 그래도 예전보단 보필의 의미가 조금 더 커졌을 것이다. 전에는 정말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거셌지만, 요즘은 훨씬 편해지긴 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아마 제 마음가짐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창살 없는 감옥에 순응하고 나니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몸이 편안한 이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걸지도 몰랐다. 숲에서 숨어 지내던 지난날이 까마득한 옛일 같았다.
“내일모레면 북부 지역의 귀족들이 성으로 방문할 겁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연회 준비가 시작될 테니 소란스럽고 정신없을 거예요.”
“아…….”
막연히 연회가 열린다고만 알고 있었지, 당연히 손님들이 방문하는 날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아득한 걱정이 뒤따랐다.
“그러니 오늘 조용할 때 걸으시겠습니까?”
발목이 회복되는 동안 바깥바람을 쐬지 못했다. 살짝 답답해지던 차에 에릭이 반가운 말을 꺼냈다.
“……그럴까요? 발목도 이제 제법 괜찮아진 것 같아요.”
“무리하시면 안 되니 제 팔을 잡으세요.”
에릭은 기꺼이 그녀에게 제 팔을 내주었다. 벨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팔을 살며시 붙잡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시원한 바깥 공기를 쐬니 온몸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저, 에릭 경.”
“예?”
“오늘은 저쪽으로 가 보면 안 될까요?”
“북쪽은 기사들이 머무는 곳이라 아가씨께서 발을 들일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럼…… 저쪽은요?”
에릭은 그녀가 가리키는 서쪽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기사들은 없지만, 대신 황녀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그다지 내키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단순히 황녀와 마주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벨라는 최대한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히 걸으면서도 열심히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조금 낯선 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곧바로 에릭에게 물었다.
“저 건물은 뭐예요?”
마치 마을에서 보던 예배당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벨리아르 공작은 신전을 대놓고 싫어하니 정말 예배당은 아닐 거고…….
“예배당입니다.”
그녀의 고민이 무색하게 에릭은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 예배당일 줄이야.
보통 이 정도 규모의 성이라면 예배당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이 도시의 신전마저 허물어버린 벨리아르 공작의 성이라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안 어울리죠?”
“……네, 조금 그렇긴 하네요.”
“나중에 한번 가 보세요. 그래도 나름 도움은 됩니다.”
과연 갈 일이 있을까. 기도할 신도 없는데.
“음……. 불경한 말이지만, 전 신을 믿지 않아서요.”
“이유를 여쭤봐도 됩니까?”
아주 오래전, 어렸을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 깊은 새벽에 몰래 예배당에 간 적이 있다.
어머니는 신이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간절히 기도하면 자애로운 여신께서 제 소원도 들어줄 거라 믿었다. 사람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 늘 예배당을 찾곤 했으니. 그 안복이 제게도 주어질 거라고 막연히 믿었던 것 같다.
작은 고사리손을 모아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기도했다. 부디 어머니와 손잡고 시장 구경을 가게 해 달라고. 어린 마음에 그런 사소한 것들이 가장 부러웠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그날 밤 어머니가 기사들에게 잡혀갔다. 이변은 없었다. 다음 날 어머니는 화형을 당했다.
그날 깨달았다. 이 세상에 신 따위는 없다고. 비록 있을지언정, 제겐 신이 아니었다. 악마였지.
벨라는 씁쓸하게 웃으며 옛 생각을 털어 냈다.
“저를 버린 신을 믿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의외로 강단이 있으시네요. 그런 이유라면 저도 동의합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거든요.”
“에릭 경께서요?”
의외라는 듯이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신을 믿습니다.”
블루벨은 오직 대지의 여신인 타라를 섬기는 나라였다. 즉, 지금 에릭이 한 말은 당장 신전에 잡혀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발언이었다. 벨라는 괜스레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곤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정말요?”
“예, 이단이죠.”
에릭이 아무렇지 않게 이단이라고 말하니 어쩐지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거, 비밀인가요?”
“예.”
“그럼 저 에릭 경 약점 하나 잡은 거네요.”
“나중에 제가 미워지시면 신전에 고발하세요.”
벨라는 에릭의 제법 진지한 대답에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 역시 덩달아 조용히 웃고 말았다.
그 후로도 이따금 미소를 곁들이며 대화를 나누는 둘에게로 두 개의 시선이 쏟아졌다.
저 멀리서 걸어오던 프리스틴이 둘의 모습을 보곤 우뚝 멈춰 섰다. 사용인인 줄 헷갈렸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누가 봐도 귀족 영애의 모습이었다.
고작 원피스일 뿐인데,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가 살짝 초라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전하, 왜 그러셔요?”
점점 얼굴이 굳어지는 프리스틴을 보며 델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곧이어 프리스틴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방향은 에릭과 벨라가 있는 쪽이었다.
“전하!”
황급히 뒤를 따르며 소리치는 델리아 덕에 에릭과 벨라는 일찍 프리스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프리스틴이 가까이 다가오자 에릭은 허리를 숙이며 정식으로 예를 갖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평소에 이렇게까지 예를 차려 인사하진 않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정중한 모습이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만남에 당혹스러워하는 벨라를 흘긋 보고는 프리스틴에게 인사를 덧붙였다.
“산책하던 중이셨습니까?”
프리스틴은 에릭의 말을 무시한 채 벨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눈을 마주쳐도 시선만 내리깔 뿐 황족에 대한 마땅한 인사가 없었다.
프리스틴의 표정이 불쾌한 듯 찌푸려졌다. 기본 법도도 모르는 걸 보니 태생을 알 만했다.
“예의가 없구나.”
그제야 벨라가 황급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사실 황족을 이리 마주한 건 난생처음이라 어떻게 인사를 올려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도 다행히 앞선 에릭의 모습을 봤기에 최대한 기억을 되짚어 따라 했다.
“제가 잠시 당황하여 인사가 늦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황녀 전하.”
“……다음부턴 조심하거라.”
프리스틴은 탐탁지 않게 대꾸하며 그녀의 옷차림새를 꼼꼼하게 훑어내렸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마담 폴린의 옷이 확실했다.
마담 폴린의 옷은 절묘하게 옆 나라인 소만 왕국의 복식이 섞여 있었다. 그것이 특색 있는 분위기를 띠면서도 과하지 않고 잘 스며들었기에 마담 폴린의 옷이 특별하고 인기 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에릭이 있었다. 벨리아르 공작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 차마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고 험한 꼴을 보일 수도 없었다.
그런 넷의 모습을 한눈에 담은 사람이 있었다. 벨리아르는 창가에 기대선 채 짙붉은 포도주를 입 안에 머금었다.
참 묘한 광경이었다. 에릭과 대화를 나누며 편안하게 미소 짓는 벨라의 모습이라든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황녀라든지.
기분이 불쾌한 것은 분명한데, 둘 중 무엇이 그리 만드는 건지는 헷갈렸다.
그는 짧은 고민을 끝내며 포도주가 담긴 잔을 내려놓았다. 짙붉은 와인이 창가의 햇빛을 머금고 옅은 색으로 동요했다.
* * *
프리스틴은 벨라를 본 후로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덩달아 델리아도 숨을 죽이고 그녀의 눈치를 봐야 했다.
“전하……. 따뜻한 차라도 드시겠어요?”
프리스틴에게선 이렇다 할 대꾸가 없었다. 델리아는 알아서 말을 줄이며 작은 움직임에도 조심했다. 그러던 중, 한참을 말이 없던 프리스틴이 불쑥 입을 뗐다.
“……마담 폴린의 옷이었어.”
“네?”
“그 아이가 입고 있던 옷 말이야.”
“……세상에, 그럴 리가요.”
“틀림없어.”
그럼 설마 전에 마담 폴린이 온 것이…….
델리아는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다 문득, 황녀의 흥미를 끌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전하, 혹시 그 소문 들어 보셨어요?”
“무슨 소문?”
“벨리아르 공작님께서 오랜 시간 젊음을 유지하시는 비결이요. ……마녀의 힘을 빌렸기에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 소문은 워낙 널리 퍼져 있는 것이라 프리스틴도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그 아가씨가 마녀가 아닐까요? 눈동자 색도 그렇고. 사실 전 볼 때마다 조금 무섭기까지 해요.”
아예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비정상적으로 오랜 시간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으니.
정말 마녀가 존재하고, 그 마녀가 마법을 부린다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마녀의 눈 색이 보라색이라는 건 제국 내에 만연하게 퍼진, 이제는 정설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각하께서도 그 마녀에게 홀리신 거 아닐까요? 그래서 저리…….”
마녀에게 홀렸다, 라…….
허공을 노려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프리스틴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델리아, 그 아이의 침실이 어딘지 아니?”
한번 확인해 볼 가치는 있는 사안이었다.
“……아! 저 알 것 같아요. 저번에 우연히 사용인들이 다른 방에서 나오는 걸 봤거든요. 아마 그곳이 아닐까요?”
델리아는 물론 그곳이 벨리아르 공작의 집무실과 가까운 곳이라는 건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음, 그래?”
“네, 네.”
델리아의 대답을 끝으로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프리스틴은 멀뚱멀뚱 서 있는 델리아를 빤히 쳐다봤다.
“……뭐 하고 섰어?”
“네……?”
“그 아이의 침실을 안다며.”
설마, 그곳에 다녀오라는 소린가 싶어 델리아의 표정이 곤란해졌다. 그저 황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꺼냈던 이야기인데, 이런 식으로 제게 불똥이 튈 줄은 몰랐던 탓이다.
혹여나 그곳에 갔다가 벨리아르 공작에게 들키면 큰 낭패겠지만, 지금은 사냥을 나갔다고 들었다.
“죄송해요, 전하! 제가 어, 얼른 다녀올게요!”
당장은 황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델리아는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가야 했다.
프리스틴은 한 박자 느리게 움직이는 델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가끔 저리 말귀를 못 알아먹을 때가 있다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조금씩 걱정이 들던 무렵, 델리아가 소란스럽게 뛰어 들어왔다.
“전하, 이것 좀 보세요!”
언뜻 상기된 얼굴을 보아하니 확실히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듯했다.
“그리 경박스럽게 뛰어다니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니?”
프리스틴은 델리아를 한 번 흘겨보며 그녀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었다. 델리아가 가지고 온 것은 정말 의외의 물건이었다.
“그 아가씨의 침실 서랍에 있었어요.”
“……하!”
프리스틴은 자신의 편지를 보곤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훔친 걸까요?”
델리아가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프리스틴은 당장 봉투를 잡아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곧이어 그녀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