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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23)화 (23/180)

23화

에릭은 찬찬히 따져 보며 제 대답을 합리화했다.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따져 들지 못하는 델리아의 모습을 보곤 더욱 제 논리를 확실시했다.

한편으로, 모든 것이 당연히 제 것인 양 착각하는 프리스틴의 모습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꼴에 같은 배에서 나왔다 이건가. 하는 짓이나 생각이 묘하게 비슷했다.

에릭은 낭패 어린 얼굴을 하고서 서 있는 델리아를 뒤로한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델리아는 한참을 황녀의 방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대체 그 말을 어찌 전해야 하는지. 분명 화를 내실 텐데.

손톱을 물어뜯던 델리아는 결국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서 프리스틴을 불렀다.

“전하…….”

“왜 그러니?”

치수를 재기 쉽도록 딱 붙는 드레스를 입은 황녀와 눈을 마주치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그게요, 전하…….”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 왜, 마담 폴린이 못 온대?”

프리스틴이 먼저 말을 꺼내자 델리아는 울상으로 겨우 답했다.

“공작님의 옷을 맞추러 온 거래요…….”

그 말을 들은 프리스틴의 표정에 살짝 그늘이 졌다. 델리아는 그것이 다 제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프리스틴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죄, 죄송해요, 전하. 제가 괜히 설레발을 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델리아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됐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말로는 됐다고 하지만 애써 실망감과 화를 억누르려는 표정은 그리 평온하지 못했다.

“……전하, 다시 옷을 갈아입으시겠어요?”

눈치를 보던 델리아가 조심스럽게 권유했으나 돌아오는 건 날카로운 시선뿐이었다. 델리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며 물러섰다.

프리스틴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화를 애써 삭이는 중이었다. 듣기론 벨리아르 공작 역시 직접 마담 폴린의 가게로 찾아가서 옷을 맞춘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이번엔 성으로 부른 걸까. 보통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땐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건데…….

아무래도 찝찝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렇다고 마땅한 답이 나오지도 않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꼴사납게 기대했던 자신의 모습도 자꾸 떠올라 짜증 나 죽겠는데.

프리스틴은 점점 올라오는 화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옆에 있던 화병을 집어 던졌다.

“꺅!”

델리아의 비명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화병의 파편과 뒤섞였다. 프리스틴은 깨진 화병을 노려보며 분을 삭였다. 커다란 소리에 조금이나마 답답한 속이 풀리긴 했지만, 완전히 화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프리스틴은 델리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 하니? 어서 치우지 않고.”

“네, 네!”

단순히 혼자 착각하고 기대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그런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싶어서. 그나마 공작의 옷을 맞추러 온 것이니.

……그나마?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프리스틴은 설핏 스쳐 가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무시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 * *

아까부터 팔을 벌리고 가만히 서 있으려니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덩달아 정신도 없었다.

“팔 내려 보시겠어요?”

마담 폴린이 팔을 내리라면 내리고,

“자, 다시 팔 들어 보세요.”

들라면 들었다.

어머, 정말 잘하시네요. 훌륭하세요.

그저 빙글 돌고 팔만 오르내렸을 뿐인데 쉴 새 없이 칭찬이 쏟아졌다.

마담 폴린이 줄자를 거두고 나서야 벨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 발목에만 힘을 주고 서 있으려니 평소보다 두 배는 힘들었다.

그녀가 옆에 있던 의자에 살짝 엉덩이를 걸쳤을 때였다. 마담 폴린은 옷이 잔뜩 걸린 행거를 끌고 왔다.

“이건 샘플로 가져온 옷들이에요. 어떤 스타일이 어울리는지 보게 한 번씩 입어 볼까요?”

“……이, 이걸 다요?”

언뜻 보기에도 족히 수십 벌은 되어 보였다. 꼼꼼하게 치수를 재느라 벌써 지쳤는데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갈아입는 건 저희가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발목은 괜찮으세요?”

마담 폴린은 친절하게 웃으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여기서 힘들다고 그만하자고 말할 수 있는 처지던가. 벨라는 힘없이 웃고 말았다.

“……네, 괜찮아요.”

마담 폴린은 그녀에게 여러 스타일의 옷을 입혀 보며 꼼꼼하게 체크했다.

“백색 계열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보라색으로 포인트를 주면 더 완벽하겠어요.”

보라색 이야기가 나오자 벨라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분명 다른 뜻이 담겨 있는 말이 아님에도 다른 속뜻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각하께서 보물을 숨겨 두고 계셨군요.”

그녀는 특히 자수정을 부담스러워했다. 혹여 사람들이 보라색 보석을 보곤 제 눈동자로 관심을 옮겨갈까 불안했던 탓이다.

“그런 장식은 필요 없어요. 그냥 간단하게…….”

아무 장식 없는 옷 자체로도 부담스러운데 값비싼 보석까지 더해진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혔다.

마담 폴린은 조용히 웃으며 그녀의 옷맵시를 다듬어주었다.

“아가씨께 필요하고 말고는 중요치 않답니다. 중요한 건 공작 각하의 뜻이죠.”

뭐라 반박할 수 없어 손에 힘을 뺐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착장이 이어졌다. 단순히 옷을 갈아입는 것뿐인데 이게 예삿일이 아니었다.

체력이 거의 다해서 더는 못하겠다고 말하려던 참에 방문이 열렸다. 이 성, 모든 것의 주인인 그가 나타났다.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는 건가. 대답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아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벨라의 모습에 벨리아르는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폴린.”

“네, 각하.”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했습니다. 앞으로 조금만 더…….”

벨리아르는 폴린의 말을 끊고 지시했다.

“그냥 종류별로 다 준비해.”

마담 폴린이 세세하고 꼼꼼한 성격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어차피 여러 가지 옷이 필요할 테니 이렇게 고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평상복은 최대한 빨리 완성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니, 아예 완성하는 것마다 재깍재깍 성으로 보내. 당장 입어야 하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당분간 마담 폴린의 드레스 숍 문이 닫혔다. 그 기간에 베른을 찾은 귀부인들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가야 했다. 한번 닫힌 숍의 문은 프리스틴 황녀에게도 열리지 않았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가까이 다가가 발목을 살폈다. 다행히 어제보단 부기가 가라앉은 상태였다.

“발목은?”

“조금 나아졌어요.”

그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걸어 봐.”

그의 보폭으론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지만, 그녀는 두 배를 걸어가야 했다. 그의 앞에 가까워지자 몸이 휘청거렸다. 벨리아르는 곧바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벨라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살을 좀 찌워야겠는데.”

처음에 데려왔을 때도 삐쩍 곯아 있었지만, 그 이후로도 살이 잘 붙지 않았다. 원체 잘 먹질 않으니 살이 붙을 리가.

식사 시간 때마다 지켜 보았지만 먹는 양이 쥐꼬리였다. 다그쳐도 한두 입 더 먹는 게 고작이고, 죽이겠다 협박하면 억지로 쑤셔 넣다 체하기 일쑤였다.

그럼 오히려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다음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역효과였다. 이래저래 성가셨다.

벨리아르는 가느다란 허리를 뭉근히 쓸어내리며 벨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잘게 떨면서도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저 눈동자엔 정말 별이라도 떠다니는 건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밤하늘에 콕콕 박힌 별들이 유영하듯 반짝였다. 두려움에 떠는 모습일 땐 특히. 그의 한쪽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죽는 게 그렇게 두려워?”

그 누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벨라는 떨리는 입술을 한 번 깨물어 진정시켰다.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공작님은 무수한 소문에 둘러싸인 인물이라는 것을. 그중엔 무려 이백 년을 넘게 살아오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어차피 다신 안 볼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조금은 궁금해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공작님은 정말, 건국 때부터 살아오신 건가요?”

그래서 저런 물음을 태연하게 던질 수 있는 걸까.

그는 끝내 실소를 터트렸다.

“오늘은 그게 궁금해?”

궁금한 건 끝이 없지요. 아마 벨리아르 공작에 대해 궁금한 것을 다 물어보라고 한다면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몰랐다.

“내게 시간은 무의미해.”

그럼, 사람이 맞나? 수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진 않았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그러니 내 말을 잘 들으면, 네가 원하는 것을 주지.”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데요?”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 삶이라든가.”

삶이라. 그게 가장 원하는 것이던가? 아마, 그러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니 삶은 이미 제 것이었다. 비록, 그 삶을 가진 자신은 그의 손안에 있을지라도.

“더 큰 게 가지고 싶어지면요?”

“난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어.”

무엇을 달라고 해야 할까.

당장의 삶을 손에 쥔 그녀는 앞으로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 * *

조금 늦은 시간에 아침 식사를 마쳤다. 며칠 전부터 그녀가 식사할 땐 늘 벨리아르든 에릭이든 둘 중 한 명이 곁에 있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다른 점이라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잔소리가 뒤따른다는 것이었다. 조금 먹어도 질책하고 빨리 먹어도 질책했다. 덕분에 식사 시간이 아주 길어졌다.

벨라는 부른 배를 소화하려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짹짹거리며 새 지저귀는 소리에 창문을 여니 청아한 숲 내음이 확 밀려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웬일로 벨리아르 공작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식사도 마쳤겠다, 뒤에 있던 에릭에게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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