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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22)화 (22/180)

22화

“네, 맹세코 마담 폴린이 확실해요. 아데인 경과 대화하는 것도 똑똑히 듣고 오는 길이라구요. 지금은 아마 벨리아르 공작님과 인사하러 가신 듯해요.”

황궁에서도 방문해 달라고 서신을 보낸 것이 여러 번이었다. 아예 전령과 마차를 보낸 적도 있었지만, 그조차 응하지 않았다.

그런 자가 벨리아르 공작의 부름에는 답한다는 건가?

제 아버지인 황제조차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자의 부인이 된다면, 제국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곧, 대륙의 모든 사람이 제 앞에 무릎 꿇게 되는 것이다.

벨리아르 공작, 그에 대한 욕심이 더욱 커지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원대한 꿈에 빠진 사이 델리아가 재촉했다.

“전하,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응?”

“곧 마담 폴린이 이리로 올 게 분명해요!”

아차, 먼 곳을 내다보느라 가까운 상황을 잠시 잊었다.

“……그냥 인사차 온 거겠지.”

“도우미들도 여럿 데리고 왔다니까요. 공작 각하께서 전하의 옷을 선물할 모양이에요. 전하를 위해서 연회도 여신다잖아요. 틀림없어요!”

기대하지 않는 척했지만, 프리스틴은 이미 마담 폴린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연회까지 연다고 했으니 그날 입을 드레스를 선물하는 건 당연한 순서가 아닌가.

프리스틴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너무 난리 피우지 마, 델리아.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래도 직접 가는 수고는 덜겠구나.”

프리스틴은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치수를 재기엔 불편한 옷이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델리아에게 지시했다.

“델리아, 몸 선이 잘 드러나는 옷으로 준비해 주겠니?”

* * *

“이리 직접 와 주어서 고맙군.”

“각하의 부름인데 당연히 와야죠. 그런데 오늘은 어찌 부르셨나요? 늘 가게로 오시다가.”

오늘처럼 공작의 부름이라면 마담 폴린은 언제든 달려오겠지만, 벨리아르는 매번 그녀의 가게로 직접 찾아갔다. 물론 그런 날은 모든 손님을 물리고 그를 최우선으로 응대했다.

“드레스가 필요해서.”

오늘은 각하의 옷이 아니군요.

마담 폴린은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말을 더했다.

“전 각하께서 세상 끝에서 부르셔도 갈 겁니다.”

남들에겐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베른을 고집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벨리아르 공작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옷을 만드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벨리아르였다. 그의 부름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가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럼 제가 오늘 봐 드려야 할 분은 누군가요?”

벨리아르는 대답 대신 뒤에 서 있는 사용인에게 지시했다.

“마담 폴린을 안내해.”

* * *

성의 지상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한 가지 새로운 점이라면, 지금쯤 마담 폴린이 분주히 누군가의 치수를 재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평화로운 지상과 달리 아직 피 냄새가 빠지지 않은 지하에선 또 한 번 처절한 비명이 낭자했다. 에릭이 성에서 보이지 않은 이유였다.

벨라가 도망치려다 잡혀 온 그날, 지하에는 그녀보다 먼저 에릭의 손에 잡혀 온 남자가 있었다. 물론 기절한 채 쓰러져 있어서 존재감은 없었겠지만.

에릭은 겉옷을 옆에 벗어 두고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최대한 생명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하지만 고통은 확실히 느낄 곳으로만 골라서 폭력을 가했다. 철저히 공포를 심어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검을 쓰면 출혈이 심하니 자제했다.

“커헉, 사, 살려 주십시오…….”

남자가 피 묻은 손으로 에릭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바지가 더러워지자 그는 인상을 구기며 남자의 어깨를 차 냈다.

“나한테 빌어 봤자 소용없어.”

살짝 얼룩이 진 바지를 본 에릭의 표정에 짜증이 묻어났다. 검을 들까 고민하다가 남자의 다리를 세게 짓밟았다. 원래도 불편했는지 걸음걸이가 온전치 않던 자였다.

“끄아악!”

까딱하면 부러트릴 요량으로 점점 힘을 주자 남자에게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에릭의 표정은 매우 평온했다.

한 방에 부러트리는 것보단 서서히 짓이기는 게 더 고통스럽겠지, 고작 이런 생각들뿐이었다. 그를 멈춘 건 나직하게 울리는 주인의 목소리였다.

“에릭, 그만.”

벨리아르가 나타나자마자 에릭은 곧바로 모든 행동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끄윽…….”

벨리아르는 부러질 뻔한 다리를 부여잡고 나뒹구는 남자를 발로 툭 찼다.

“다리를 부러트리면 일을 똑바로 못할 거 아냐.”

못 걷잖아. 벨리아르가 중얼거리며 뒷말을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그는 남자의 앞에 쪼그려 앉아 눈짓으로 손을 가리켰다.

“오른손잡이야, 왼손잡이야.”

남자는 본능적으로 그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느꼈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덜덜 떨리는 턱에 힘을 주고 말했다.

“오, 오른, 손…….”

벨리아르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그럼 이쪽 손은 필요 없겠네.”

그의 시선이 남자의 왼손으로 향했다.

“끄아악――!”

우둑,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귀를 찢는 비명이 울렸다. 벨리아르는 간단한 손길로 남자의 왼손을 꺾었다. 그러고는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제 손을 털었다.

“그러게 왜 더러운 손으로 옷을 잡아선.”

손을 꺾은 건 그가 에릭의 바지를 더럽혔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그 이유뿐이었다. 그것이 남자를 더욱 깊은 공포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한 벨리아르는 남자에게 본격적인 물음을 던졌다.

“살고 싶어?”

그 한마디에 남자는 꺾인 손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예, 예……! 사, 살려만 주시면, 뭐, 뭐든 하겠…… 습니다. 컥, 그러니 제발…….”

그 와중에도 최대한 무릎을 꿇으려는 움직임이 퍽 애처로웠다. 그러나 벨리아르든 에릭이든 상대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너무나도 익숙했다. 이런 고리타분한 애처로움은 그들의 마음을 조금도 흔들 수 없었다.

“살려 주는 건 어렵지 않지. 네가 내 말만 잘 듣는다면, 자비를 베풀 마음이 생길 것도 같아.”

“마, 말씀만 하십시오. 무슨 지, 짓이든…… 하, 하겠습니다!”

“마녀를 내 눈앞에 데려와.”

“마, 마녀요……?”

벨리아르는 베른 곳곳에 소문의 마녀를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녀를 데려오라는 말을 남자가 어찌 받아들이는지는 상관없었다. 이렇게 받아들이든 저렇게 받아들이든, 어차피 그의 손에 쥐어지는 결과는 같을 테니.

그는 고민하는 남자를 위해 조금 힌트를 주기로 했다.

“그래. 네놈이 따르는 그 마녀 말이야. 눈이…… 보라색이라던가?”

마지막 말에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무언가 결심하는 듯한 표정이 드러나자 벨리아르는 몸을 일으켰다.

“한 달 주지. 그 안에 어떻게든 마녀를 잡아 와. 네가 사는 방법은 그뿐이야.”

이로써 덫을 놓는 일은 끝이었다. 이제 가만히 앉아 사냥개가 토끼를 잘 물어 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벨리아르는 지상으로 올라와 제 손을 살폈다. 다행히 옷은 거의 더럽혀지지 않았지만 손은 조금 엉망이었다. 에릭이 손수건을 건넸다.

“이걸로 닦으십시오.”

벨리아르는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에릭의 옷을 훑어내렸다. 그의 시선을 느낀 에릭 역시 제 옷을 살폈다.

지하에 있을 땐 잘 티가 나지 않았는데 해가 쨍한 지상으로 올라오니 여기저기 묻은 핏자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

“아…….”

에릭의 입에서 곤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벨리아르는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그 상태로 가면 벨라가 널 어떤 눈으로 볼지 궁금하네.”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벨리아르는 자신의 침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이쯤 되면 충분히 올 시간이 지났는데.

프리스틴은 기다리는 티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느긋한 얼굴로 방문을 힐끗거렸다. 차가 무려 두 차례나 식었다. 찻잔을 꾹 쥐며 인내심을 끌어모은 프리스틴의 눈썹이 설핏 찡그려졌다.

“마담 폴린이 좀 늦는구나.”

덩달아 그녀의 눈치를 보던 델리아가 얼른 대꾸했다.

“제가 나가서 살짝 알아보고 올까요?”

“……그러겠니?”

“네, 제가 티 안 나게 살짝 살펴보고 올게요.”

프리스틴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델리아는 프리스틴의 방에서 나가자마자 곧장 뛰었다. 너른 정원을 뛰어다니다 보니 마담 폴린에 대한 불만이 샘솟았다.

대체 공작님과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길래 이리 늦는 건지. 고작 재단사 한 명 때문에 자신이 이리 고생하는 것 같아 불쾌했다.

그러다 저 멀리 홀로 걸어가는 에릭의 뒷모습을 발견하곤 얼른 소리쳤다.

“아데인 경!”

에릭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 뛰어오는 델리아를 보며 소매 끝의 단추를 마저 채웠다.

“무슨 일입니까?”

“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예, 말씀하십시오.”

“그…… 마담 폴린이 성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마담 폴린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에릭의 표정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예, 그런데요?”

에릭은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표정 때문인지 델리아는 살짝 주춤하며 말했다.

“혹시 황녀 전하의 의상을 맞추시려는 거면……!”

“……아.”

에릭이 곤란한 듯 미간을 좁혔다.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뭔가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네?”

잠시 고민하던 에릭은 사실을 말해 주었다.

“마담 폴린은 주인님의 옷을 맞추러 오신 겁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어차피 제 주인의 소유이고, 그런 그녀의 옷을 맞추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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