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부디 그가 말의 속뜻을 알아봐 주길 원했다. 하도 관심을 주지 않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을 내포한 말이었다.
“휴양은 충분하셨습니까?”
그러나 그의 입에서 더 있다 가라는 말은 죽어도 나오지 않을 듯싶다. 프리스틴의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네, 벨리아르 공 덕분에요. 나중에 수도로 한번 오세요. 그땐 제가 대접할게요.”
대화의 처음보다 확연히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전하께서 수도로 귀환하시기 전에 성에서 작은 연회를 열까 합니다. 북부 지역의 귀족들을 모두 초대해서요.”
워낙 평소처럼 담담한 어투라 살짝 뒤늦게 말뜻을 이해했다.
지금, 자신을 위한 연회를 열겠다고 말하는 건가?
“어머, 정말요?”
“전하께서 계시는데 제가 너무 무관심했습니다.”
그런 말은 조금 더 웃으면서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프리스틴의 마음을 돌리기엔 아주 충분했다.
그녀는 여태껏 이 성에서 연회나 무도회가 열린 적이 있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정말, 오로지 자신을 위해 연회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프리스틴은 기쁨에 물든 얼굴로 얼른 대답했다.
“무관심하긴요. 해야 할 일이 많으시잖아요. 저도 공의 시간을 뺏으면서 있는 건 원치 않았어요.”
없던 이해심이 마구 샘솟는 순간이었다.
“오늘부터 연회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에릭을 통해 말씀하세요.”
그동안 쌓였던 서운함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녹아내렸다. 역시, 겉으론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프리스틴은 멀어져 가는 벨리아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델리아,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수군대니 말이야. 그렇지 않니?”
“전하께 유독 다정하신 것 같아요.”
“네가 보기에도 그래?”
“그럼요.”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칙칙하게만 보였던 성의 전경이 오늘따라 참 고풍스럽고 좋았다. 침실로 돌아가는 프리스틴의 걸음이 매우 가벼웠다.
* * *
침대에 얌전히 앉은 벨라의 시선이 그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는 식사는 잘 하지 않았지만 차는 즐기는 것 같았다. 지금도 차를 내리고 있었다.
따끈한 물이 찻잎에 닿자 침실 내로 옅게 향이 퍼져나갔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향을 만끽하던 그녀는 아차 싶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앗, 제가…….”
순간 반사적으로 제가 하겠다고는 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느껴지는 발목 통증에 곧바로 현실을 깨달았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무슨.
하지만 그녀와 생각과는 달리 벨리아르는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턱짓했다.
“그럴래?”
“네?”
순간 당황해서 되묻고 말았다. 그는 제 앞을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이리 와.”
벨라는 이불을 걷어 내고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온전히 걷기에는 다친 발목이 너무 시큰거려 어쩔 수 없이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다.
벨리아르는 그녀가 제 앞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 세게 밟은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 그는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책상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일주일 안에 나으려면 조치가 좀 필요하겠네.”
차를 따르려고 온 건데 그는 이미 찻잔을 들고 있었다. 열심히 절뚝거리며 오는 사이에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지금 다시 돌아가는 것도 이상하고.
벨라는 얌전히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을 선택했고, 그는 나른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내렸다.
찻잔을 내려놓은 벨리아르는 곧이어 벨라를 안아 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앗……! 고, 공작님!”
“가만히 있어.”
그녀가 힘들게 걸어온 길을 벨리아르는 성큼성큼 걸어 순식간에 침대 앞으로 도착했다.
이럴 거면 왜 굳이 오라고 한 걸까.
속으로 아주 작은 불만이 싹텄다.
벨리아르는 그녀를 다시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당분간은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마. 필요한 게 있을 땐 여기 종을 치면 돼.”
그가 가리키는 대로 벨라의 시선이 침대 옆에 달린 종을 향했다.
“내가 있을 땐 나한테 말하면 되고.”
그의 말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저 편안히 침대에 앉아 있든 누워 있든 하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사용인들을 부리라는 소리였으니까. 그걸 실행해야 한다는 게 문제지.
벨라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자 벨리아르는 되물었다.
“왜?”
“일을, 해야 하는데…….”
아아. 그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이건 그의 버릇인 듯했다.
“이번엔 무슨 일을 시키면 도망가기 편할까. 또 밖에 내보내 줘?”
“……이제 안 도망가요.”
“또 도망가도 돼. 또 잡아 오면 되니까. 근데 그땐 겨우 발목에 멍드는 거로는 끝나지 않겠지.”
그의 성정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 정도로 끝난 것은 정말 많이 봐준 거였다. 그걸 알기에 그녀도 감히 다시 도망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만으로 가려고 했어?”
“……네.”
“왜? 거기에 뭐가 있나?”
“아니요, 그냥……. 중립국이잖아요.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그만큼 차별도 적다고 들어서…….”
차별이라. 그는 짧게 중얼거리며 조소를 내비쳤다. 뭐, 확실히 소만을 가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곳이 참 평화로워 보이긴 할 것 같다.
“나중에 데려가 줄 수도 있어. 너한테 보여 주고 싶은 곳도 있고.”
“……정말요?”
“말 잘 들으면.”
비록 이곳에서 도망치겠다는 생각은 잠시 접어 두었지만, 소만에 한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그의 허락에 들어온 하녀가 트레이에 무언가를 받쳐 든 채로 다가왔다.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이었다.
벨리아르는 그 수건을 집어 들어 그녀의 다친 발목에 올려 두었다. 따끈한 정도가 딱 적당했다. 통증이 완화되는 것 같은 느낌에 덩달아 마음도 조금 편안해졌다.
벨라는 힐끗힐끗 그의 모습을 살폈다. 대놓고 보기엔 아직도 조금 무서웠던 탓이다.
지금은 이렇듯 다정한 손길로 발목을 어루만져 주고 있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애초에 발목을 이렇게 만든 것은 그였다.
“당신은 결국 그 손에 죽을 거란 말이에요.”
낯선 남자가 속삭였던 말이 이따금 뇌리를 스쳤다.
“……공작님, 저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뭔데.”
“저, 죽이실 거예요?”
“뭐?”
그는 황당한 듯이 되물었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목을 비틀어 버렸겠지. 뭐 하러 이런 수고를 하겠나.
그녀는 마치 그가 당장이라도 죽이겠다고 한 것처럼 슬픈 얼굴로 웅얼거렸다.
“……공작님이 절 죽이실까 봐 무서워요. 전…… 살고 싶어요.”
그 모습이 마치 작고 하얀 토끼 같았다. 숲에서 자신과 마주치면 겁에 질려 도망가지도 못하고 얼어붙는 토끼.
쏴 죽이지 않고 데려온 건 오로지 저 눈 때문이었다. 보통처럼 흔해 빠진 눈동자가 아니었기에. 남들과 달라서. 그것이 하필 보랏빛이라.
벨리아르는 온도가 내려간 수건을 다시 접어 따뜻한 쪽으로 돌려주었다.
“계속 그딴 질문 하면 죽여 버릴 수도 있지.”
당연히 언제든 흥미가 떨어지면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흥미로웠다.
벨라는 버릇처럼 숙어졌던 고개를 서서히 들어 올렸다. 차마 그의 눈을 보진 못하겠고 그보다 조금 아래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곧 깨달았다.
그의 입술을 보자 불현듯 지하에서 그와 나눈 키스가 떠올랐다.
그 누구도 닿은 적 없던 입술이었다. 키스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전유물이라는 건 그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날 지하에서의 키스는……. 사랑은 없던, 오로지 순간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였음을 잘 안다.
그럼에도 그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살며시, 숨이 가빠지는 듯했다. 서서히 몸을 타고 오르는 열기 때문이었다. 손에서 땀이 났다.
벨리아르는 갑작스레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를 보곤 실소를 흘렸다. 다시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그의 손이 큰 건지 그녀의 머리가 작은 건지. 벨리아르는 한 손에 적당히 감기는 그녀의 머리를 살살 건드렸다.
“대체 이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래도, 덕분에 심심하진 않으니 주워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전하, 전하!”
조용한 방 안으로 델리아가 소란스럽게 뛰어 들어왔다. 티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던 프리스틴은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니?”
“마담 폴린 아시죠?”
숨도 고르지 못하고 말하느라 발음이 조금 뭉개졌지만 ‘마담 폴린’이라는 단어만큼은 확실히 들렸다.
“당연히 알지. 제국의 귀부인들이 기를 쓰고 베른에 오는 이유 중 하나잖아.”
베른에는 유명한 세공사와 재단사가 있는 도시로도 유명했다. 폴번의 상업 지구가 유독 발달한 이유였다. 그중 재단사의 이름이 바네사 폴린이었다.
황궁에서도 몇 년째 전담 재단사 제의를 보냈지만 번번이 거절하고 베른에 머물기를 고집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서신상으로 예약도 받지 않는 바람에 아무리 높은 신분을 가졌어도 직접 찾아와야만 옷을 맞출 수 있었다.
그건 황족인 프리스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내일쯤 들를 참이었다. 프리스틴이 관심을 보이자 델리아는 한껏 신나서 소식을 전했다.
“글쎄 그 마담 폴린이 지금 이 성에 와 있다니까요!”
“뭐? 잘못 본 거 아니고?”
직접 찾아왔다니. 콧대 높기로 유명한 그 폴린이?
출장은커녕 집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프리스틴은 솔직히 델리아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마담 폴린이 확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