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난 분명 정중하게 대해 준 것 같은데.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건 너야, 벨라.”
“이제 마, 말 잘 들을게요. 저, 정말이에요! 공작님이 시키시는 건 뭐든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다며, 근데 못했잖아.”
“이젠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어두운 지하임에도 눈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얼굴이 선명했다. 온통 물기로 질척거리는 애원의 목소리가 썩 나쁘지 않았다.
“확실해?”
조금의 여지를 주자 보랏빛 눈동자가 빛을 띠었다.
“네, 네. 정말이에요. 확실해요.”
그녀의 발목을 밟고 있던 발을 뗐다. 그러자 조금은 울음이 잦아들었다. 얼핏,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 때가 참 예쁜데.
그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숨을 헐떡이느라 입술이 바싹 메말라 있었다. 중간중간 깨문 탓에 피가 배어 나와 딱지가 앉을락 말락 하는 입술을 엄지로 꾹 눌렀다.
따가운 고통에 그녀는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내뱉었다.
“읏…….”
한번 눈을 깜빡이자 눈물 때문에 앞이 흐려졌다. 덩달아 어룽진 그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차갑던 손가락이 사라지고, 뜨거운 입술이 맞닿았다.
벨라는 순간 당황스러움에 숨을 들이켰다. 벨리아르가 메말라 갈라지던 그녀의 입술을 혀로 쓸어내렸다.
그녀가 뒤로 물러나려 하자 그는 더욱 강하게 턱을 쥐고 잡아당겼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그 피마저 달았다.
“흐읏…….”
긴장에 꾹 다물린 입술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는 살짝 입술을 떼곤 나직이 읊조렸다.
“입 벌려.”
다시 입술을 머금고 턱을 쥔 손에 살짝 힘을 더했다. 찰나에 생긴 틈새로 욕망의 열기를 가득 품은 살덩이가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녀의 말캉한 혀를 찾아 집요하게 움직였다. 강하게 얽었다가 놓아주고, 다시 잡아 와서 달래듯 얼렀다.
그녀의 손이 반사적으로 올라와 그의 손을 더듬었다. 매달리는 건 나쁘지 않지만 온전히 입술을 탐하는 데에 거슬렸다. 벨리아르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두 손을 잡아 뒤로 결박시켰다.
그의 성정처럼 키스조차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조금만 저항하려 하면 거칠어지는 움직임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벨라는 중간중간 숨 쉬는 요령을 몰라 숨을 헐떡여야 했다.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벨리아르의 손이 아래로 내려와 목을 움켜쥐었다.
정말 숨이 막히는 듯해 그에게 더욱 매달렸다. 살려달라고 빌 입이 막혔으니 최대한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움직였다.
턱 바로 아래의 기도를 틀어막고 있던 손이 부드럽게 뒤로 넘어가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벨라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두 입술 사이로 비집고 스며들었다. 공포로 차게 식었던 피부 위로 화끈한 열기가 덧새겨졌다.
그는 제 욕심이 채워질 때까지 마음껏 탐하고서야 그녀를 놔주었다. 입술과 혀가 얼얼했다.
그의 눈동자가 붉은 달무리를 휘감은 핏빛 달 같았다. 악마를 만난다면 저런 모습일까.
그가 제 영혼을 다 빼내어 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몽롱하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다시는, 내게서 벗어날 생각 하지 마.”
그는 다시 그녀의 발목으로 발을 올렸다. 그러고는 서서히 힘을 주어 짓이겼다. 부러지진 않았지만, 심하게 멍이 들 정도였다. 울음 섞인 신음이 지하를 울렸다.
* * *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느릿한 걸음 소리가 울렸다가, 따끈한 공기를 품은 차의 향내가 코끝을 스쳤다.
나 혹시 그 성을 벗어났나?
국경을 넘어 소만 왕국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그곳에서 자신을 배척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그런 단꿈을 꾸었다.
눈을 뜨는 건 어렵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을 누워 있었던 것처럼 눈가가 개운했다.
조금은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몇 번 보았던, 공작의 침실이었다. 그것이 단순히 꿈이었음을 방금 깨달았다.
“일어났어?”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그녀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누운 채로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공작님.”
힘없이 갈라지는 목소리가 겨우 그를 불렀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넘기고는 찻잔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왜. 어디 아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고 다정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는 항상 가면을 쓰고 있음을. 겉으로 보이는 그 정중함과 다정함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수군대던 말이 사실이었다. 소문처럼, 잔혹하고 자비 없는 모습만이 진짜였다.
몸살이 난 것처럼 온몸이 무겁고 머리가 아팠지만, 특히 발목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쿵쿵, 심장이 뛸 때마다 발목의 통증 역시 존재감을 내뿜었다.
“발목……. 발목이 아파요…….”
살짝, 아주 살짝 움직여 보니 몸이 움찔거릴 만큼 거센 아픔이 몰려왔다. 그녀가 울먹이듯 말했다.
“……부러졌나 봐요.”
그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안 부러졌어.”
그럴 리가. 이렇게 아픈데.
느껴지는 아픔만큼 그에게 끌려오던 날의 기억이 생생해졌다. 지하에서 있었던 일이 방금 일어난 일처럼 뚜렷했다.
자신은 결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은 그의 울타리 안이었다. 그를 속이고 도망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는지.
뜻에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그는 기꺼이 가면을 벗지 않을 것이다. 그 방증으로, 벨리아르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걸 환영해, 벨라.”
벨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두덩이 아래 숨은 눈동자가 잔잔히 물기에 잠겼다.
집…….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었다.
* * *
벨라를 지하에 가둬 놓고 지상으로 나온 벨리아르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그녀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집무실엔 먼저 에릭이 와 기다리고 있었다. 벨리아르가 들어오자마자 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천천히 걸어와 책상을 짚은 벨리아르는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수행했던 기사는?”
“연무장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지하로 옮길까요?”
그 기사는 아마 자신이 왜 그녀의 수행을 맡았는지 모를 것이다. 지금은 그저, 운 나쁘게 그녀가 도망치는 바람에 자신이 죽을 처지에 놓였다고, 그리 생각할 것이다.
애초에 에릭은 죽어도 상관없을 사람으로 벨라의 수행 역을 골랐다. 그녀가 도망가려 할 것은 뻔했기에.
며칠 전, 공작가의 기사 한 명이 교황 쪽 사람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마 군사적인 기밀을 사고팔기 위한 현장이었을 것이다.
“제가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일단 내버려 둬.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냥 죽이기엔 아깝잖아.”
그때 에릭은 벨리아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왜 굳이 첩자를 살려 두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에릭이 아는 벨리아르는 그런 자비를 베풀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수행할 기사를 물색해야 했을 때 비로소 그의 뜻을 깨달았다.
짧게 생각을 마친 벨리아르는 간단한 명령을 내렸다.
“연무장에 갈 테니 기사들 모두 집합시켜. 한 명도 빠짐없이.”
“예, 준비하겠습니다.”
감히 배신할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각인시켜 줄 참이었다.
에릭이 나가고, 그는 문득 팔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에 시선을 내렸다. 손톱에 긁힌 듯한 작은 생채기를 확인하고서 인상을 구겼다. 아까 벨라를 끌고 오며 생긴 모양이었다.
이 정도 생채기라면 진즉 사라졌어야 했는데.
아무리 노려봐도 사라지지 않는 선명한 손톱자국이 더욱 심기를 긁었다.
* * *
베른은 대체로 날씨가 깔끔한 편이었다. 다른 곳보다 날씨가 찬 대신 비가 오거나 우중충한 날이 적었기에 대체로 화창한 날이 이어졌다.
오늘처럼 바람이 세지 않은 날은 더욱 그러했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적당히 따스했다.
프리스틴은 저 멀리 벨리아르 공작을 발견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거의 뛰다시피 한 걸음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공작과 대화할 기회조차 별로 없었다. 살짝 자존심이 상하지만,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수고쯤이야 대수롭지 않았다.
“벨리아르 공, 어디 다녀오시나 봐요.”
“예.”
심히 단답이었다. 보통 이러면 어딜 다녀왔다고 답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프리스틴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려 빙긋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황급히 다른 주제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언가 거슬리는 것이 없어서 이상하다 했더니, 그 아이가 없었다.
“벨라……였나요? 오늘은 그 아이가 보이지 않네요.”
“몸이 안 좋아서 쉬게 두었습니다.”
“그렇군요. 몸이 많이 안 좋은가요?”
프리스틴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물론 그 아이가 정말 걱정됐던 건 아니었다. 그만큼 자신이 누군가의 아픔에 마음 아파하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에게 어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아니요, 전하께서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발목을 좀 접질려서요.”
프리스틴은 속으로 실망했다. 아프다기에 어느 정도 기대했건만, 고작 발목을 접질린 것뿐이라니. 더불어 혀를 찰 이유도 충분했다.
다 큰 숙녀가 칠칠치 못하게 발목을 접질리다니. 얼마나 경박하게 행동했으면.
하여튼, 하나하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이리 공작과 한 마디라도 더 대화해 보려 아등바등하는데, 그 아이는 항상 그의 가까이 있다는 것도.
생각하다 보니 서운한 마음이 몰려왔다. 매번 자신이 먼저 청해야만 그는 겨우 곁을 내주었다.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닌데. 가까이서 지내 봤자 별로 관계에 진전이 없었다. 프리스틴은 원망스러운 마음을 담아 말을 꺼냈다.
“……한 일주일 뒤에 황궁으로 돌아갈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