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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9)화 (19/180)

19화

정신없이 뛰다가 부딪친 것에 대한 사과를 건넸으나 상대는 대꾸하지 않았다.

벨라는 몇 방울의 눈물이 땅으로 스며드는 것을 바라보며 우선 숨을 골랐다. 여러 차례 눈을 깜빡이자 뭉그러지던 시야가 겨우 초점을 되찾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남자의 신발이었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구둣발이 느릿하게 그녀의 손등을 짓밟았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상황 판단이 잘 되지 않았다. 실수로 손을 보지 못하고 밟았겠거니.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당황으로 얼룩진 목소리가 자그맣게 삐져나왔다.

“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키가 제법 큰 탓에 고개를 조금 드는 것으로는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벨라는 남자의 배 언저리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그저 손을 좀 치워달라고 말한 뒤 다시 사과를 건네고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 순간, 남자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바짝 굳어졌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손길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과 동시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벨라.”

짧은 시간 그녀를 괴롭히던 불안한 기시감이 현실이 되었다. 묵직하게 감기는 목소리가 거세게 심장을 조였다.

조금 더 고개를 젖히자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붉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닥쳤다.

“공……작님…….”

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겨우 말라 가던 눈두덩이로 다시 또 금세 물기가 차올랐다. 벨라는 다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아, 아니에요, 공작님.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공작님…….”

“똑바로 말해야지, 벨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그는 제 발아래 깔린 그녀의 손으로 지그시 압박을 가했다.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가차 없이 손등을 짓밟는 행동에서 그의 기분이 여실히 느껴졌다.

“흐윽……. 도, 도망치려던 것이 아니에요. 저는 정말…….”

숨을 옥죄는 공포에 혀가 얼어붙기도 했고, 손등에 가해지는 고통 때문에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지시한 일에 이런 건 없었을 텐데.”

“그,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전 정말……. 그냥, 그냥…….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공작님. 제발 살려 주세요…….”

밟혔던 손이 해방되자마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언제 벗겨졌는지 신발은 한 짝뿐이었고 곱게 차려 입혀 보냈던 옷은 흙먼지에 엉망이 되었다.

부딪친 충격 때문인지, 성에서 그가 손수 달아 주었던 브로치가 땅에 굴러다녔다. 고정장치가 사라진 케이프 역시 그녀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천천히 그녀의 모습을 훑던 벨리아르가 눈가를 찌푸렸다.

“기껏 다듬어 놨더니, 꼴이 이게 뭐야.”

“……죄, 죄송해요.”

벨리아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떨어져 있던 케이프를 주워 먼지를 탁탁 털어냈다.

낮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그녀의 어깨에 케이프를 둘러 주었다. 공작가의 문장으로 만들어진 브로치 역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아무리 벗어던지려고 해도 그의 굴레는 어김없이 다시 감겨 목을 죄었다.

“집에 가자.”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벨라는 아주 잠깐 희망을 품었다.

그리 화가 나진 않았나 싶어서. 처음이니까 실수로 치부하고 그냥 눈감아 주는 걸까 싶어서.

벨리아르는 부드럽게 감기는 머리카락을 순간 움켜쥐며 우악스런 손길로 벨라를 일으켰다. 그녀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고, 공작님, 흐윽! 사, 살려 주세요……!”

정신이 없어서 표정을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그는 제법 짜증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꿰뚫었다.

“입 다물어.”

그에게 질질 끌려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녀가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이었다. 중간에 그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에게 잡히지 않았다면 그녀가 갔을 길.

큰길엔 검은색 마차 한 대와 함께 에릭이 있었다. 에릭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모든 것이 엉망인 와중에도 저 멀리 무엇인가가 흐릿하게 시야를 스쳤다. 그토록 닿고 싶었던, 국경이었다.

벨리아르는 그녀를 마차 안에 짐짝처럼 처박아 넣었다. 그는 마차 안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웅크려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을 감정 없이 눈에 담았다.

그러게 왜 그리 뻔한 선택을 해서는. 멍청한 데다, 귀찮고 시끄럽기까지. 그냥 죽여 버릴까.

의미 없는 충동이 차분하게 흩어졌다.

그는 성에 도착하자 곧바로 벨라의 머리채를 잡고서 어디론가 끌고 갔다. 배려라곤 전혀 없이 넓은 보폭으로 걷는 바람에 벨라는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두피가 뜯겨 나갈 듯이 아팠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살려 달라 비는 것뿐이었다. 누군가의 시선 따위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 지하 감옥에 처박히는 순간까지도 벨라는 정신없이 빌었다.

“정말 도망치려던 것이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공작님.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세요. 제발…….”

울며 애원하는 목소리가 지하실 안을 울렸다. 그 모습이 상당히 애처로웠으나 그에겐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벨리아르는 창살 문을 닫아 잠그며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또 허튼짓할 생각 말고.”

정신없고 어지러운 와중에도 벨라는 그의 말에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언제든 저 손으로 칼을 빼 들어 목을 베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저번에 하녀의 팔을 벨 때도 지금과 같은 지루한 얼굴이었던 걸 똑똑히 기억한다.

“네, 네. 기다릴게요. 정말 아무 짓도 안 하고 얌전히 기다릴게요.”

그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곤 지하실을 떠났다. 벨라는 그의 모습이 온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닥으로 쓰러졌다.

당장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가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두려움이 밀려왔다. 차갑고 거친 바닥이며, 비릿한 피 냄새가 극한의 공포로 다가왔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곳이었지만 그것마저 익숙해지니 또 다른 불안으로 변했다.

빽빽이 들어선 창살 너머로 어렴풋이 사람의 형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것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나도 곧 저렇게 될까?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게 될 것 같아 다급히 눈을 감아 버렸다.

점점 숨이 가빠졌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답답한 목을 감싸 쥐며 괴로움에 몸을 웅크렸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이어지다, 벨라는 결국 정신을 잃었다.

* * *

해가 숨어들고 푸른 달빛이 세상을 비췄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가라앉았던 감각이 하나씩 수면 위로 떠올랐다.

끼이익.

무거운 철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서히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그때까지도 온전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몽롱한 상태였다. 하지만, 퍽――!

누군가 옆으로 넘어지는 둔탁한 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심장이 쿵쿵대며 빠르게 현실로 눈이 떠졌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겨우 팔로 지탱해 일으켰다. 비릿한 피 냄새가 적나라하게 코를 찔렀다. 뻣뻣한 목을 옆으로 돌리니 처참한 상태로 널브러진 사람이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벙긋거리는 입에서 새된 소리만 간간이 새어 나왔다.

벨리아르 공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왔을 때, 그녀는 힘겹게 뒤로 엉금엉금 물러났다.

“……이, 이 사람은…….”

“지키라고 붙여 놨더니 하등 쓸모가 없었잖아. 그러니 벌을 받아야지.”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그의 말을 듣고서야 폴번에서 자신을 수행하던 그 기사임을 알아챘다. 자신이 도망친 것 때문에 그 기사에게까지 피해가 갈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기사가 이 꼴이 된 것에 그녀의 영향은 아주 미미했지만, 벨리아르는 모든 죄책감을 그녀에게 떠안겼다. 벨라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죽은…… 거예요……?”

벨리아르는 그녀의 물음에 기꺼이 확인시켜 주기로 했다. 상처가 제일 심한 배 쪽을 발로 밟자 기사는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며 신음했다.

“끄윽, 컥……. 어으…….”

혀가 잘린 상태라 발음도 온전치 못했다. 신음을 뱉을 때마다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아직 숨은 붙어 있네.”

그의 표정에선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을 짓밟고 있으면서.

차마 두 눈에 담기 괴로운 광경이라 벨라는 덜덜 떨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금방이라도 숨통이 끊어질 듯 위태로운 신음이 엉망으로 귓가를 울렸다.

정신을 잃은 건지 아니면 정말 죽어 버린 건지, 곧이어 가느다란 신음조차 끊겼다. 벨라는 곧장 그의 발치에 엎드렸다.

“사, 살려 주세요, 공작님…….”

벨리아르가 조소를 비치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누굴? 난 오늘 둘 중 한 명은 죽일 생각인데. 아, 저놈을 죽이는 대신 널 살려 줄까?”

아니라고,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벨라는 아플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망설이는 제 모습이 너무도 비겁해서 토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벨라의 발목을 밟았다. 힘을 주진 않았고, 그저 올려놓기만 했다. 간단한 행위였을 뿐인데 그녀에게 가해지는 공포는 그 무엇보다 무거웠다.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잘못했어요, 네? 살려 주세요, 흑…….”

그는 제 발아래 놓인 가녀린 발목을 쳐다봤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툭 하고 부러질 것 같았다.

부러트릴까. 그럼 한동안은 걷지도 못할 테니 감히 도망갈 생각은 다시 하지 못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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