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8)화 (18/180)

18화

“앗…….”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훑었다. 1, 2초 정도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자는 분명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불편한 시선이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 무렵, 에릭이 사이로 끼어들어 시선을 차단했다. 그러자 남자는 곧바로 고개를 깊이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얼굴을 가리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분주히 사라져 버렸다. 절뚝거리며 걷는 것이, 걸음걸이가 특이한 남자였다.

에릭은 그 남자가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다가 벨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녀의 등허리를 가볍게 툭툭 쳤다.

“허리 펴세요. 그리고.”

단호한 음성이었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던 몸을 폈다. 그는 그녀와 눈을 맞춘 채 또박또박 말했다.

“아가씨께서 잘못한 일이 아니면 그리 주눅 들어 사과하지 마세요. 저 사람이 먼저 와서 부딪친 겁니다. 그럴 땐 화를 내셔야죠.”

“……노력해 볼게요.”

“이 가문의 문장과 저를 믿으세요. 무슨 행동을 하시든 아가씨께 뭐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벨라는 목 아래에 달린 브로치를 만지작거렸다. 지금 지닌 벨리아르 공작가의 문장은 자신을 지켜주는 보호막이기도 했고, 옭아매는 족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 문장을 보고 태도를 바꿨다. 그 사실이 마냥 기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특별한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길 바랐는데. 이래저래 힘든 일이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려면 역시 제국을 떠나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럼 막……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때려도 되나요?”

“……예?”

그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되묻자 벨라는 입술을 말며 멋쩍게 답했다.

“……농담이에요.”

에릭은 얕게 헛웃음을 내비쳤다. 벨라는 그런 에릭을 보며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겼다.

에릭은 부디 그 미소가 밤까지 이어지길 바랐다.

“가시죠. 늦겠습니다.”

벨라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에릭은 그녀의 뒤를 따르기 전, 남자가 사라진 곳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벨리아르가 말했던 대로 세공사의 집을 찾는 건 상당히 쉬웠다. 멀리서부터 알록달록하고 특이한 외관이 시선을 잡아 끌었다. 건물 외벽에 색을 몇 가지나 쓴 건지. 찾지 못하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였다.

조심스럽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수많은 장신구가 그녀를 맞이했다. 값비싸 보이는 것들 사이로 들어가려니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녀를 발견한 세공사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어이구, 귀한 분께서 직접 오셨네요. 이리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귀한 분……. 처음 듣는 지칭에 벨라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 신발에 숨은 발끝만 쉴 새 없이 꼼지락거렸다.

의뢰서를 전달하는 일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간단하게 끝났다.

건물에서 빠져나오니 커다란 산을 하나 넘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술 새로 후련한 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에릭이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네?”

“죄송하지만 지금부터는 저 없이 다니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 있으세요?”

“예, 가 봐야 할 곳이 생겨서요. 그래도 다른 기사 한 명이 대동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릭은 뒤의 기사를 가리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물론, 그녀에겐 저 기사의 존재가 아니라 에릭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안심되는 일이었지만.

벨라는 고개를 꿋꿋이 들고 끄덕였다.

“네, 얼른 가 보세요.”

에릭은 나지막하게 “예.”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곧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둘 사이로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벨라는 살짝 눈을 굴리며 넌지시 물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에릭은 고개를 내저으며 싱겁게 답했다.

“……아니요. 그럼 성에서 뵙겠습니다.”

“네.”

“제대로 모시도록 해.”

마지막으로 그녀의 뒤에 있는 기사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릭이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벨라는 몸을 돌렸다. 낮은 언덕을 넘었으니 큰 산을 넘을 차례였다.

우선, 어디로 가야 할까.

잠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우선 이 중심가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뒤에 서 있던 기사에게 자연스레 밑밥을 던졌다.

“저, 조금 둘러보고 들어가도 될까요? 이렇게 나온 게 오랜만이라…….”

“예, 그렇게 하십시오. 뒤따라갈 테니 자유롭게 가시면 됩니다.”

벨라는 최대한 가게들을 구경하는 척하며 목적지 없이 걸었다. 이따금 특이한 향신료 냄새가 주의를 끌었지만 그녀는 힐끗 쳐다볼 뿐 앞으로만 향했다. 한가롭게 무언가를 구경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다 좁은 골목길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힐끗 보니 뒤로 샛길이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도 기대를 걸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모퉁이에 있는 상점으로 발을 들였다. 평민들이 주로 찾는, 가격대나 디자인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장신구들을 파는 가게였다.

이것저것 둘러보던 벨라는 일부러 기사 쪽을 흘긋거렸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잠시 볼일 좀…….”

민망한 듯 우물쭈물 말하자 기사는 아차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예. 얼른 다녀오십시오.”

아무리 그녀를 감시해야 한다지만, 숙녀의 화장실까지 따라갈 정도로 융통성이 없진 않았다. 기사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렇게 겨우 일 분이 흘렀다. 기사는 가만히 선 채 그녀가 열고 나간 문을 바라봤다. 묘하게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설마.

생각이 스치자마자 기사는 곧바로 주인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화장실 문이 바깥으로 연결돼 있는가?”

“예, 예. 뒤에 샛길이 있는데 그쪽으로도 나갈 수 있게 되어 있…….”

“이런, 젠장!”

기사는 낮게 욕지거리를 읊조리며 황급히 뒷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애석하게도 화장실 쪽에선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각, 벨라는 장신구 가게 뒤편으로 난 샛길을 따라 무작정 뛰는 중이었다. 지금 달려가는 방향이 어딘지도 모르지만 일단 목표는 자신을 감시하는 기사에게서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었다.

정말, 공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곧장이라도 터질 듯이 거세게 뛰어 댔다.

샛길의 끝이 보였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살짝 보이는 큰 길가에서 거대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

하지만 고작 이만큼 뛰어왔다고 안심할 순 없기에 벨라는 더욱 이를 악물었다. 오로지 앞만 보며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차마 멈출 수 없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서 정신없이 뛰어가는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뒤따랐다.

벨라는 중간중간 하늘을 보며 해의 위치를 확인했다. 쫓기는 데에 익숙한 그녀가 달리면서 방향을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지금은 해가 가장 높이 떠 있을 때였다.

옆 나라인 소만 왕국과 연결된 국경선은 베른의 동쪽에 있을 테니까…….

벨라는 최대한 태양의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뛰었다. 뛰다 보니 점점 폴번의 중심지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거리의 사람이 줄어들었다.

성에서 지내는 동안 몸이 너무 풀어졌는지 금세 지치고 다리가 둔해졌다. 그렇다고 멈출 순 없기에 이를 악물고 뛰었다. 뒤에서 자꾸만 누군가가 따라오는 듯했다.

이리 쉽게 놓아줄 리가 없는데.

당장이라도 공작가의 기사들이 쫓아올 것만 같았다. 한편으론 에릭에 대한 걱정도 들었다. 다른 일이 생겼다고 했으니 아직 폴번에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뛰다가 마주칠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에릭과 차림새가 닮았거나, 검을 지닌 사람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간절함이 목 끝까지 복받쳐 올랐다. 제발, 제발 이 땅을 벗어나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숨고 싶다. 그 누구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달리는 동안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이미 체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린 탓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데다 몸속은 찢어질 듯한 고통으로 아우성쳤다.

벨라는 해를 따라 뛰다가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이 나오자 곧장 방향을 틀었다.

적당한 넓이의 골목길이었다. 큰길에서 좁은 골목길을 보니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복잡한 길로 숨어들면 기사들이 자신을 찾기 더 힘들 테니까.

그녀는 골목길로 들어가기 직전,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의 안도감 덕분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기사들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유가 코앞까지 가까워진 듯했다. 이대로 소만 왕국으로 넘어가기만 할 수 있다면…….

골목길에 접어들자 뛰는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숨이 차는 바람에 절로 고개가 땅을 향했다. 정확히는, 앞을 보고 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숨을 헐떡이며 반사적으로 뛰었다. 제 의지로 뛴다기보단 다리가 절로 움직였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자꾸만 눈앞을 흐렸다.

“앗…….”

결국 무언가와 부딪치고 나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부딪친 충격과 더불어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부딪친 건 사람이었다. 뒤에서 쫓아오던 사람도 아니고 골목길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것일 뿐이니 공작가의 사람은 아닐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벨라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안도감에 휩싸여 무너져내렸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일렁일렁 차올랐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엉망으로 얼룩진 시야에서는 모든 것이 흐릿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