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7)화 (17/180)

17화

그래도 아직 가까이 가는 건 조금 두려웠기에 거리를 두고 그의 앞에 섰다.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바로 물음을 던졌다.

“밖에 나가고 싶은 건 여전해?”

“그냥…… 바깥 구경을 하고 싶어요.”

답하고서는 흘끗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 성에 차는 대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 더 예쁘게 말하면 내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싶은데.”

그 말이 그녀에겐 ‘예쁘게 말하지 않으면 내 심기가 아주 불편하겠다.’처럼 들렸다. 벨라는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말을 포장하기 위해 애썼다.

“이 성에 있는 것도 좋지만…… 밖에 다녀오면 더 공작님을 잘 보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기부여도 되고……. 그리고, 음…….”

하지만 그녀에겐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재주 따윈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마땅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

말없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그는 결국 낮게 웃고 말았다.

“요령 없긴.”

벨리아르가 그녀에게 회색 봉투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네가 처음에 갔던 곳은 포웬 마을이야. 거긴 베른의 초입에 있는 작은 마을이고, 중심지는 폴번이라는 곳이지.”

아직 그가 무슨 의도로 말을 하는 건지 깨닫지 못한 벨라는 얼떨결에 서신을 받아 들었다. 봉투 입구는 벨리아르 공작가의 인장으로 봉해져 있었다.

“폴번의 상업 지구에 가면 유명한 세공장인의 집이 있어. 외관이 특이해서 찾기 어렵진 않을 거야. 그곳에 가서 그 서신을 전해 주고 와.”

잠잠하게 말을 듣고 있던 벨라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은…….”

“혼자 나가는 건 안 되고, 에릭이 같이 갈 거야.”

전혀 생각지 못한 때에 기회가 왔다. 벨라는 혹여 잘못 들었을까 싶어 되물었다.

“……저, 나가는 거……예요?”

“나갔다가, 오는 거지.”

그는 중간에 한 번 끊어 말하며 뒷말을 강조했다. 그래도 지금 벨라의 머릿속엔 ‘나간다’라는 사실밖에 떠다니지 않았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에게서 도망친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쿵쿵 울리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전해질까 초조할 지경이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일단 심부름을 하려면 사람들 사이로도 섞여 들어가야 하는데…….

막상 기회가 오니 자신감이 떨어졌다. 벨리아르는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벨라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별로야?”

“아, 아니요. 별로는 아니고……. 그냥, 조금, 조금 긴장돼서요…….”

그리 원하던 것을 쥐여 줬는데도 저리 울상이니.

벨리아르는 순간, 저 손에 들린 의뢰서를 다시 빼앗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공작님, 감사합니다.”

이럴 땐 또 눈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닌 건지,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 태도는 썩 나쁘지 않았다.

* * *

평소 성에서 입던 옷도 상당히 고급스럽긴 했지만 단정한 원피스라 그리 부담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마치 귀한 귀족 영애라도 된 듯한 차림새였다.

벨라는 입고 있는 코트 끝자락을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제대로 차려입는 건 난생처음이라 낯설고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입어선 안 될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자꾸만 고개가 땅으로 향했다.

단순히 심부름을 하러 가는 것뿐인데, 성을 나간다고 생각하니 심장 박동이 거세졌다. 저 굳세게 닫혀 있던 성문이 드디어 열리는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넓어진 것에 대한 해방감 때문인지, 그에게서 도망칠 생각을 하자 급격히 도는 긴장감 때문인지.

벨라는 초조한 손끝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낡은 헝겊을 꺼냈다. 그녀가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 때면 늘 눈을 가리던 것이었다.

오늘은 에릭과 기사 한 명이 대동할 것이라고 했다. 보호라는 명목 아래 이뤄지는 감시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헝겊을 빼앗아 갔다. 뒤를 돌아보니 벨리아르 공작이 있었다.

“이딴 건 왜.”

“눈을 보면…… 사람들이 욕할 거예요.”

그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누굴?”

“저도 욕할 거고……. 그리고, 이런 저를 데리고 있는 공작님도…….”

벨리아르는 손에 들고 있던 케이프를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전체적으로 옅은 패턴이 새겨진 진갈색에, 목을 감싸는 부분과 아랫단엔 하얗고 푹신한 털이 달려 있었다.

“이 땅에서 감히 나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는 진주로 장식된 브로치로 케이프가 벌어지지 않도록 고정해 주었다. 브로치는 벨리아르 공작가의 문장으로 디자인된 것이었다.

“그건 내 소유인 너도 마찬가지야.”

벨리아르는 더불어 그녀의 손에 묵직한 비단 주머니를 얹어 주었다.

“이건…….”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먹고.”

살짝 열어 보니 반짝이는 금화가 모습을 비쳤다. 벨라는 숨을 들이켜며 얼른 주머니를 여몄다. 절로 두 손으로 받쳐 들게 하는 액수였다.

이런 걸 어떻게 들고 다닌담.

살면서 금화를 이리 많은 금화를 본 건 처음이라 부담스러움을 넘어 무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벨라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당연히 이 금화를 쓸 일은 없을 것이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시 그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잘 다녀와.”

머리를 두어 번 토닥이는 그의 손길이 오늘따라 유독 묵직했다.

“……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켕겼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국경을 넘은 지 오래였다.

* * *

성에서 폴번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녀는 복잡하게 굴러가는 생각이 어지러워 자꾸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릭과 같이 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기사 한 명은 어찌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에릭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바깥에 나왔으니 약간의 틈 정도는 생기겠지. 괜찮을 거야, 떨지 마.

마음을 다잡다가 다시 또 긴장에 사로잡히길 수없이 반복했다. 마차 안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에릭이 그녀의 표정을 보곤 물었다.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네요. 엄청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그냥 좀, 걱정이 많아서요.”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제가 뒤따르는 동안은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에릭의 확언에 우습게도 모순적인 감정이 충돌했다. 뭔가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말이 답답하게 가슴을 짓눌렀다.

“에릭…… 경은 오늘 계속 동행하시나요?”

아무리 편하게 이름을 부르라고 했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그를 ‘아데인 경’이라고 부르니, 나름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예, 오늘은 아가씨를 지키는 게 제 일이니까요.”

그는 언제나 제게 부드럽고 정중했다. 아무리 주인의 명 때문에 움직이더라도, 저보다 신분이 낮은 자에게 그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에릭 경은 참 좋은 사람 같아요.”

“……제가요?”

“네.”

참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시네요.

에릭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다행입니다.”

에릭의 짧은 헛기침을 끝으로 대화는 끊겼다. 다행히 마차는 적당한 타이밍에 폴번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보도로는 마차가 갈 수 없어 이제부턴 내려서 걸어야 한다. 벨라는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눈에 띄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포웬 마을과는 달리 도심의 활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만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많고 복잡해 보였다. 저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버겁게 했다.

“가시죠.”

“……네.”

에릭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발을 떼긴 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과 가까이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벨라는 무언가 불안한 듯 자꾸만 뒤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럴 때마다 두어 걸음 뒤에서 걷는 에릭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에릭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로 대놓고 걸어가 본 적이 없었기에 자꾸만 도망칠 곳을 찾았다.

“앗.”

하도 땅을 보고 걸어서 앞에 기둥이 있는지도 몰랐다. 뒤에서 에릭이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꼴사납게 기둥에 부딪혔을 것이다.

“앞을 보고 걸으세요. 다칩니다.”

“……고마워요.”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겨우 이런 거에 겁먹으면서 어떻게 도망가겠다는 거야. 다시 성을 떠나면…… 이게 일상일 텐데.

걸어가다가 무리 지어 얘기하던 사람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경멸의 시선이 날아올 것을 미리 짐작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조금 다른 반응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분명 당황했지만, 그녀의 차림새를 보곤 곧바로 눈빛이 바뀌었다. 벨라가 지나가자 저들끼리 다급히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야. 봤어?”

“저거…… 벨리아르 공작가 문장 맞지? 세상에.”

“뭐지, 공작님 친인척인가?”

“와……. 역시 귀족은 다르구나.”

처음 듣는 반응에 순간 멈춰 설 뻔했다. 저 사람들을 붙잡고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이 맞냐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제 눈을 보지 않았다. 물론 보았겠지만, 공작가의 문장으로 만들어진 브로치에 가려졌다. 방금 대화하던 그들뿐만이 아니라 스쳐 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귀한 옷을 입고 있고 귀한 문장을 지니고 있으니 귀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제 눈에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불길하고 경멸스러운 눈동자에서, 특이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지니게 되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허망했다.

서서히 걷는 속도가 잦아들던 그녀는 결국 길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당장 케이프를 벗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여유 있게 걸쳐 있는데도 목을 죄는 듯 답답했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달아나질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 제 것이 아닌데 손에 쥔 것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저기서 왼쪽으로 가면 상업 지구가 나옵니다.”

뒤에서 언질을 주는 에릭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벨라는 어지러운 시야로 걸음을 뗐다.

앞을 보고 걷는 그녀의 표정이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이런 쉬운 심부름 하나도 쩔쩔매는 자신이 참 별로였다.

그렇게 멍하니 걷다가 마주쳐 오는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