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멋쩍게 웃으며 답하자 에릭은 굳이 질문을 더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목으로 내려갔다.
“아프진 않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말을 할 때마다 칼칼한 통증이 살짝 느껴지긴 했지만 아프다고 얘기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멍은 들겠네요. 목이 가려지는 옷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은 그리 티가 나지 않았지만 내일쯤이면 붉게 멍울이 질 것 같았다.
목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아침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건 몰라도, 벨리아르 공작에 대한 공포만큼은 온몸에 똑똑히 새겨졌다.
아무리 꿈의 여운이 남아서라지만, 잠시나마 그를 애틋하게 생각했던 게 어이없었다.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다시 한번 기회가 오면 그땐 주저하지 않고 이 성을 빠져나가겠다고.
그러고 보니 어제 자신의 방으로 찾아온 낯선 남자를 잊고 있었다. 마치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서 이해하기 힘든 말들만 잔뜩 늘어놓고 사라져 버렸던.
그런 사람이 성에 있었던가. 얼핏 보았던 차림새로는 전혀 짐작 가는 부분이 없었다. 기사도 아니었고, 일반적인 사용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에릭은 무언가 아는 게 있을까.
우물쭈물하던 벨라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있잖아요.”
“예, 말씀하세요.”
“이 성에…….”
섣불리 물어도 되는 사람일까. 이 성에 관계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에릭이 먼저 언질을 주지 않았을까. 괜히 물었다가 공작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아니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자꾸 신경 쓰이게 해서.”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편히 물으십시오.”
“네, 그럴게요.”
아무래도 그 남자에 대한 존재는 잠시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
* * *
다음 날, 교황이 보낸 전령이 방문했다.
기사 한 명은 손목을 자르고, 교황이 특히 아끼던 기사단장은 어깨에 칼을 박아 넣고 보냈으니 전령이 온 이유는 충분히 가늠되고도 남았다.
벨리아르는 기꺼이 전령을 응접실로 받아들였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전령을 샅샅이 훑어내렸다.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전령의 목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서, 성하께서 많이 노하셨습니다.”
기사단장을 그리 대한 것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이번에 온 전령은 대신전에서 잡무를 보는 사제였다. 그의 손에 목이 날아가도 전혀 타격이 없을 인물로 보낸 것이다.
“……아무리 공작 각하시더라도 기사단장님에게 그런…… 그, 무례한 행동을 취하신 것은 성하에 대한 불경한…….”
벨리아르는 짧게 조소를 흘렸다. 전해야 할 말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횡설수설하는 놈을 앞에 두고 있자니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몰려왔다.
“그래서, 내가 직접 가서 사죄하라는 건가?”
“구, 굳이 그런 뜻은 아니오나……. 그래도 오랜만에 수도에 방문하시어 성하도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전하려는 말이 뭐야. 그 쓸모없는 혓바닥 잘라 내 버리기 전에 이번엔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서, 성하께선, 이번에 기사단장님을 그리 대우하신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니 각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사, 사죄하시는 것을 바라십니다.”
전령은 제 입으로 말하고도 불안해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예, 예……. 그렇습니다.”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
고민하는 벨리아르의 모습에 전령은 전전긍긍이었다. 부정적인 대답을 가져가면 교황이 또 한 번 화를 낼 테고, 그렇다고 벨리아르 공작에게 강경하게 나갔다간 언제 제 목이 바닥을 나뒹굴지 몰랐다.
둘 중 고르라고 한다면, 솔직히 교황에게 호통 한 번 듣는 게 나았다.
벨리아르 공작이 이 제국의 실세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 반증으로, 기사단장이 어떤 모습으로 귀환했는지 톡톡히 보았다.
작위가 있는 기사단장마저 그렇게 대하는데, 그저 사제일 뿐인 자신을 온전히 보내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가, 각하. 제가 수도에 가면…… 성하께 말씀 잘 전하겠습니다. 그러니…….”
“살려서 보내 달라?”
실제로 벨리아르는 안절부절못하고 앉아 있는 전령을 눈앞에 두고서 진지하게 고민했다.
저놈의 머리를 잘라 교황에게 보낼까.
하지만 저리 벌벌 떠는 꼴을 보니 그럴만한 가치도 없어 보였다. 괜히 수고스럽기만 하지. 어찌 됐건 이참에 교황의 기세를 한 번 눌러 줄 필요는 있겠다고 판단 내렸다.
언제부터 이리 제게 전령을 보내 대놓고 불쾌하다는 감정을 드러내게 된 건지. 심지어 와서 사죄하라고? 이건, 죽여 달라고 날뛰는 꼴이지 않은가.
벨리아르가 손가락을 일정하게 까딱였다. 그동안 전령은 숨소리마저 거슬릴까 숨을 죽였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벨리아르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놈의 마녀를 잡아야겠네.”
* * *
벨리아르는 지나가다가 황녀를 마주치고선 인위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신을 발견하고선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황녀를 보고 나온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생각해 보셨나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번에 그 아이가 영지 안내해 주는 것 말이에요.”
“아아.”
황녀가 왜 벨라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냉큼 내어주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건 어려울 듯싶습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하를 보필할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프리스틴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핑곗거리를 찾아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우스워 그는 조용히 웃고 말았다.
프리스틴의 시녀인 델리아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며 올라가는 광대를 감추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황녀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짓는 공작의 모습이 제법 다정해 보였던 탓이다.
“그럼…… 작은 심부름이라도 맡기고 싶은데, 그건 가능할까요? 저도 저 아이가 마음에 들어서요.”
프리스틴은 힐끗 그의 표정을 살폈다. 조금 기다려도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얼른 마음에도 없는 뒷말을 덧붙였다.
“보면 볼수록 눈이 참 예쁜 것 같아요. 반짝거리고.”
벨리아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생각한 대로 움직여 주는 황녀가 오늘은 조금 기특했다. 매번 이리 멍청하게 굴어 주면 좋으련만.
“무엇을 원하십니까?”
약간의 여지를 내어주자 황녀의 얼굴이 미세하게 펴졌다.
“베른에 유명한 세공사가 있다고 들었어요. 여기 온 김에 의뢰서를 하나 넣었으면 해요.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살짝 옆으로 빗겨 나간 벨리아르의 시선에 벨라의 모습이 걸렸다. 벨라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벨리아르는 픽 웃으며 대답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하시죠. 의뢰서는 저희 쪽에서 준비하겠습니다.”
성의 가장 안쪽, 은밀한 화원에 핀 보라색 꽃 한 줄기가 무심히 꺾였다.
작은 종처럼 여러 송이가 한 줄기에 피어 있는 꽃의 이름은 ‘블루벨’이었다. 피로 세운 나라답지 않게 이름이 앙증맞은 꽃과 같았다.
벨리아르의 뒤에 서 있던 에릭이 사뭇 걱정스럽다는 어투로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꽃줄기를 휘휘 돌려 보던 벨리아르는 이내 흥미가 식었는지 꽃을 땅에 떨궜다. 작은 미련조차 없는 듯 발로 짓이기는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바깥에 나가는 순간 달아날 궁리부터 할 텐데요.”
“애초에 달아날 궁리뿐이겠지. 심부름 갔다 오라고 하면…… 좋아하겠네.”
그는 정말 벨라를 황녀의 심부름에 쓸 생각이었다. 에릭은 자연스레 걱정이 뒤따랐다.
저번에 숲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얼쩡거리던 것도 그렇고, 바깥으로 내보내면 도망가려 할 것이 불 보듯 뻔한데.
그런데 왜 굳이 밖으로 돌리려는지 에릭으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그녀가 도망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제 주인의 심기를 어지럽힌다는 게 문제였다.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기사 한 명 더 데리고 가.”
벨리아르가 그렇게 말한다는 건 분명 에릭에게 다른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럼 그 이후에 틈이 생길 텐데.
이상하게 그녀가 도망가도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에릭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날, 외출하실 겁니까?”
벨리아르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늘어진 블루벨의 꽃망울을 톡톡 건드렸다.
“우리 아가씨가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아서.”
* * *
더 이상 성안에서 그녀를 이방인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벨라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성의 일원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벨리아르는 벨라를 곁에 두고 착실하게 써먹었다. 다른 사용인들은 식사할 때 빼곤 거의 부리지 않았다. 그 말인즉, 자잘한 일들은 모두 벨라의 몫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곁에 있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긴장을 놓지 못하는 건 여전하지만, 그렇다고 처음처럼 벌벌 떨며 눈치만 보고 있진 않았다.
공작의 곁에서 보내는 일과는 대체로 여유롭고 한가했다. 그래도 틈틈이 나갈 기회를 엿보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일할 때 옆에 있어. 한 발자국도 떨어질 생각 말고.”
그냥 은유적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지.
그는 정말로 벨라를 제 시야에서 벗어나는 곳에 두지 않았다. 심지어 잘 때조차. 그제야 왜 침실에서 집무를 보는 건지 완벽히 이해했다.
“밤에도 일하려면 침대가 필요하니까.”
침대는 제게 필요한 것이었다. 밤에도 일한다는 말 또한 거짓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그가 잠든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매번 꾸역꾸역 졸음을 참다가 자신이 먼저 잠들어 버리곤 했다.
대체 언제 주무시는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최대한 그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기만 하면 다시는 엮이지 않을 인연이었다.
전에 방으로 찾아왔던 초록색 눈의 남자는 이후로 보지 못했다. 공작가와 관련된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벨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화병을 닦고 있는데 그의 부름이 들렸다. 그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벨리아르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에 기대섰다. 그러고는 제 앞쪽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