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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5)화 (15/180)

15화

막 꿈에서 깨어 몽롱한 와중에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여기서 눈을 뜬 걸까. 분명 마지막 기억으로는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너른 침대 위에 벨리아르 공작과 나란히 누워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흠칫 몸이 굳었다. 그녀는 잠들어 있는 벨리아르 공작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꿈속에서의 그 무겁고 처절하던 공기, 가슴이 찢어질 듯한 감정……. 꿈을 꾼 게 아니라 그 현장을 다녀온 것처럼 너무나도 생생했다.

눈을 깜빡이자 또다시 뺨으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꿈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마음이 울렁거렸다. 울컥 울음이 새어 나올 것처럼 감정이 북받쳤다.

평소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참 무서웠는데, 편히 눈 감은 모습은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그의 얼굴을 보는데 한없이 슬퍼졌다.

다 그 꿈 때문이다. 괜한 꿈을 꿔서는.

벨라는 그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조심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창밖이 푸르스름한 걸 보니 곧 해가 뜰 모양이다. 방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없었으니 소파에라도 가서 앉아 있어야겠다.

그러다 괜한 오지랖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다. 벨라는 잠시 고민하다 살며시 이불을 끌어와 그의 목 아래까지 덮어 주었다.

그리고 문득 시선을 올렸을 때, 탁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를 마주쳤다.

……언제부터?

짧은 시간 그의 눈동자가 이채롭게 빛났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거센 손길이 목을 덮쳤다.

벨리아르는 순식간에 그녀의 목을 쥐어 내리눌렀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만 압박하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매우 차분했다.

벨라는 꼼짝없이 그의 아래에 깔려 발버둥 쳤다. 워낙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생각이 엉켰다.

“흐윽, 고, 공작…… 님……!”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 겨우 말을 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으니 정상적인 사고도 불가능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의 팔을 할퀴어 대며 조금이라도 숨을 쉬어 보려 발악하는 것뿐이었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힐 때쯤이 되어서야 목을 놔주었다.

“콜록! 하아, 하아…….”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의 잔재가 남아 손끝이 벌벌 떨렸다.

벨리아르는 숨을 몰아쉬며 기침을 토해내는 그녀를 두고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명백히, 이른 아침이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잠이 든 게 얼마 만이더라. 그 지겨운 악몽을 다시 꾼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불쾌한 기분이 파도처럼 휘몰아칠 무렵, 옆에서 비에 젖은 개처럼 떨어 대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소파에서 자게 둘 걸 그랬나.

이때쯤이면 에릭이 올 시간이었다. 타이밍 맞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벨라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려 목을 확인했다. 최대한 기도만 막히도록 힘을 주었는데도 발갛게 자국이 남았다. 그는 짧게 혀를 찼다. 그사이 한 번 더 노크 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는 벨라를 향해 짧게 지시했다.

“나가.”

평소보다 잠긴 목소리가 귓가로 까슬하게 감겼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벨라는 그의 말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고서 문으로 다가갔다. 방문을 열자 의아한 표정을 하고 선 에릭과 마주쳤다.

“……저, 방에 가 볼게요.”

그녀는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로 겨우 말하곤 도망치듯 벨리아르의 방을 빠져나갔다.

방으로 돌아온 벨라는 문을 닫자마자 등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 잠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이 성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역시, 어제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었어야 했다.

에릭은 방으로 들어와 보이는 광경에 다소 당황했다. 제 주인의 모습을 책상이 아니라 침대 쪽에서, 그것도 마치 잠이라도 잔 듯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풍기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괜한 타이밍에 왔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에릭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주무셨습니까?”

벨리아르는 별다른 대꾸 없이 흐트러진 옷매를 정리하며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릭은 이후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제 주인이 그녀의 곁에서 잠들었구나.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 * *

아침부터 해프닝이 있었지만 성의 일상은 그대로 흘러갔다.

벨라는 긴장 어린 얼굴을 하고서 화원 입구로 다가섰다. 저번에 그녀가 보았던 화원과는 멀리 떨어진, 조금 더 작은 규모의 화원이었다.

차를 내어가기 전, 에릭은 그녀를 붙잡고 주의할 사항을 일러 주었다.

“저분은 프리스틴 황녀 전하십니다.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괜히 눈에 띄지 않도록 최대한 고개는 숙이시고요.”

“네, 조심할게요.”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인지 그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조심스럽게 걷는데도 걸음걸이가 불안했다.

그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세차게 흔들었다.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제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목에서 둔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는 듯했다. 트레이로 받쳐 든 찻주전자와 찻잔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트레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제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다급히 공작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 천천히, 다시 내와.”

벨리아르는 제법 다정한 어투로 그녀를 달랬다. 이른 아침에 보았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하녀로 데려온 아이가 아니라 서툽니다. 전하께서 양해해 주십시오.”

황녀에게 친절히 양해를 구하기까지.

“그럼요. 누구나 실수할 수 있잖아요.”

웃으며 답했지만 프리스틴은 무언가 꺼림직한 기분을 느꼈다.

벨리아르 공작이 다른 사람에게 저리 대하는 것이 생소했고, 성안의 여느 사용인들과 묘하게 다른 저 아이가 거슬렸다.

다른 사용인들에게선 느껴지지 않는 생기와 감정이, 저 아이에게서는 유독 넘치게 느껴졌다.

하녀로 데려온 아이가 아니라면 신분이 무엇일까.

차림새를 보니 확실히 사용인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귀족 영애로 보기엔 행동에 기품이 없었다.

다시 차를 준비하러 물러가는 벨라의 뒤로 벨리아르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그 모습을 보던 프리스틴의 표정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잠시 후, 다시 차를 내오는 벨라와 눈을 마주친 프리스틴은 대놓고 표정을 구겼다.

저런 불길한 눈동자라니.

벨리아르 공작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프리스틴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저 아이, ……눈 색이 특이하네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래서 데리고 있는 건가요?”

벨리아르는 딱히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라 여겨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의례적인 질문으로 주제를 바꾸었다.

“성에서 지내시는 데에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네, 덕분에 아주 편히 쉬고 있어요.”

프리스틴은 테이블 아래로 치맛자락을 꾸욱 말아쥐었다. 정말 기분 나쁜 성이었다. 공작만 아니라면 이런 음습한 곳엔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공작과 혼인하게 되면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소린데…….

아무래도 그때가 되면 다른 곳에 저택을 마련해 달라고 해야겠다. 사용인들도 싹 새로 고용하고. 마주칠 때마다 소름 돋는 그 사용인들이 가장 문제였다.

프리스틴은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미소는 온전히 벨리아르 공작을 향한 것이었다.

“화원도 너무 예뻐요. 바깥은 날씨가 차서 대부분 화원에서 시간을 보낸답니다. 아름다운 꽃들이 많아서 보고만 있어도 즐겁네요.”

벨라는 긴장 어린 손짓으로 두 사람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몸은 자유로운 것이 분명한데, 그의 시선에 묶인 듯 몸짓 하나하나가 불편했다.

그녀는 제 일을 끝마친 뒤 얼른 에릭이 있는 쪽으로 물러갔다. 그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리는 듯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공께서 영지 안내를 해 주시겠어요? 같이 가 주시면 정말 기쁠 거예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럴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필요하시면 안내할 사람을 붙여 드리지요.”

“아…….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드렸네요.”

프리스틴이 베른에서 머문 지 벌써 며칠이 지나고 있지만 이렇게 공작과 담소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티타임조차 너무 소중한 시간인데, 그 시간마저 저런 불길한 여자에게 빼앗기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저 아이를 쳐다보고 있는 시간이 더 기니 말이다.

프리스틴은 싱긋 웃으며 정원 입구에 서 있는 벨라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럼, 저 아이는 어때요? 친절하게 안내를 잘해 줄 것 같아서요. 같은 여인이니 편할 거고요.”

벨라는 저 멀리 두 사람의 시선이 제게로 몰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황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았는데, 역시 낯설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하지만 그럴 리가. 평민들의 눈도 피해서 숨어 지냈는데 언제 황족을 마주쳤겠나.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문득 오늘 꾸었던 꿈이 스쳐 지나갔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보라색 꽃으로 만든 부케를 든……. 보라색 눈동자를 고이 접어 웃던 그 여자의 모습이 번뜩 떠올랐다. 꿈속에서 벨리아르 공작의 연인이었던 그 여자 말이다. 눈 색은 다르지만 분명 황녀와 닮았다.

그럼 황녀가 공작의 애인이었던 걸까……? 지금 둘의 분위기에서 그런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곧 터무니없는 생각이란 걸 깨달았다. 고작 자신의 꿈일 뿐인데 너무 억측이었다.

그러면서도 벨라는 벨리아르와 프리스틴의 모습을 힐끗힐끗 살폈다. 그 모습을 본 에릭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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