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벨리아르는 며칠 전 에릭에게 한 가지를 지시했다.
침실에서도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집무실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놓을 것.
벨라는 그의 침실을 보고선 그의 말뜻을 조금은 이해했다.
“내가 일할 때 옆에 있어. 한 발자국도 떨어질 생각 말고.”
그러니까, 이젠 정말 그때 말처럼 낮이든 밤이든 곁에 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체한 듯이 속이 답답했다. 아무래도 긴장하며 억지로 먹은 저녁 식사 때문인 듯했다.
공작과 단둘이 식사를 한 건 처음이었기에 음식의 맛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게다가 마주 앉아서. 테이블이 넓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겨우 저녁 식사를 마쳤다고 안심했더니 또 다른 관문이 나타났다. 벨라는 붉게 넘실대는 포도주를 눈앞에 두고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의 눈치만 살폈다.
이런 술은 처음이거니와, 크리스털로 된 잔 역시 처음이었다. 혹시 떨어트려서 깰까 싶어 섣불리 손을 대지도 못했다.
술을 아예 처음 접해 보는 건 아니었다. 벨라는 헤버튼에 있을 때 성인이 되었다. 마을에선 한바탕 즐거운 성인식이 열렸고, 그녀는 당연히 숲에 홀로 있어야 했다.
고요한 숲에서 그루터기에 앉아 오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애쓰던 날이었다. 그런 날에 이안이 술을 한 병 들고 찾아왔다.
“벨라!”
“뭐야, 네가 지금 왜 와?”
“왜 오긴. 너랑 성인식 같이 보내려고 왔지”
“하지만…….”
“자, 이거 내가 몰래 빼 왔어. 우리 같이 마시자.”
그날 처음 입에 대 본 술은 정말 써서 잔뜩 인상이 찌푸려지는 맛이었다. 마을 잔치에서 굴러다니는 값싼 술이라 쓸데없이 도수만 높은 술이었다. 아직도 그 쌉싸름한 향과 맛이 잊히지 않았다.
“난…… 난 이거 안 마실래.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이후로 술은 맛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뇌리에 콕 박혀 버렸다.
게다가…… 이건 벨리아르 공작이 주는 술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니 일반적인 술처럼 보이지 않았다. 살며시 잔을 기울여보니 마냥 짙게만 보이던 액체가 투명한 붉은색을 띠기도 했다.
벨라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보기만 하자 벨리아르는 픽 웃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투명하게 드러났다.
“왜, 사람 피라도 뽑아서 담아 놨을까 봐?”
“…….”
“부정하진 않네.”
콕 짚어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지만, 굳이 아니라고도 못 하겠다.
아마 그녀는 잘 몰랐을 것이다. 이 포도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웬만한 귀족들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술이었다.
“입에 대 봐.”
벨라는 두 손으로 잔을 들어 입술에만 살짝 적셔 보았다. 옛날에 먹어 보았던 쓰기만 한 술과 달리, 향긋하고 달큰한 맛이 느껴졌다. 조금 더 입안으로 흘려 넣으니 다채로운 맛이 혀를 훑고 넘어갔다.
벨라는 말없이 잔을 쥔 두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혹시나 값비싼 잔을 떨어트릴까 봐, 그래서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그런 것이다.
벨리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집무실 책상에서 가장 잘 보이는 소파에 앉혀 두었다.
“여기 앉아 있어.”
“……공작님은요?”
“일해야지.”
그러기엔 좀 늦은 시간이 아닌가. 흘긋 창밖을 보니 이미 완전히 해가 져서 어둑어둑했다. 저녁 식사도 했겠다, 슬슬 잘 준비를 해야 하는 것 같은데…….
“안…… 주무세요? 해도 다 졌는데…….”
벨리아르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앉아 있다가 졸리면 자도 돼. 오늘 네가 할 일은 그것뿐이야.”
그럼 오늘은 언제 방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이렇듯 그의 시야에 갇혀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은 꽤 고된 일이었다. 그가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는 탓에 목이며 어깨가 뻣뻣하게 굳었다.
“남기지 말고 다 마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벨리아르는 손가락 사이로 감기는 은빛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렸다.
“대답해야지.”
벨라는 살풋 눈을 내리깔며 자그맣게 대답했다.
“……네.”
그가 멀어진 뒤에야 그녀는 포도주를 입에 대기 시작했다. 남기지 말라는 그의 말이 주문처럼 맴돌았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어느덧 잔의 바닥이 보였다. 조금씩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목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가 뺨까지 후끈하게 덥혔다.
아까 느껴지던 체기도 어느 정도 내려가고, 눈두덩이에 따듯한 돌멩이를 얹은 것처럼 참을 수 없는 노곤함이 밀려왔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되는데.
한껏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려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앞으로 쏟아지는 몸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온도도 딱 좋고, 기분도 적당히 좋았다. 일정하게 들려오는 펜의 사각거리는 촉감까지.
그녀는 결국 소파에 살짝 기대앉은 채 고개만 푹 숙였다. 온종일 긴장에 시달린 것이 꽤 고됐는지 불편한 자세인데도 금방 무의식으로 빨려 들어갔다.
벨리아르 공작에 대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꿈에서까지 그가 보였다.
분명 그인데 어딘가 낯설었다. 그의 곁에서 수줍게 미소 짓는 여인의 존재 때문일까.
벨리아르 공작은 오로지 다정한 얼굴로 곁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보라색 꽃으로 만든 부케를 들고 있었다. 둘은 결혼식을 앞둔 연인처럼 보였다.
온통 흑백인 세상에서 수줍게 웃는 그녀의 눈동자만이 보라색으로 빛을 발했다.
벨라는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멀리서 볼 땐 마냥 행복해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가니 여인의 표정에 점점 그늘이 졌다.
그녀의 손에 쥔 부케가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상태가 이상해 보였는지 곁에 있던 벨리아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벨라, 괜찮아? 표정이 안 좋은데.”
이상하게 그는 곁의 연인을 제 이름으로 불렀다.
내 꿈이라서 그렇구나.
여느 꿈에서 그랬듯 별생각 없이 수긍했다.
“……응,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벨라.”
점점 여인의 안색이 안 좋아지자 그는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불렀다. 조심스럽게 어깨에 손을 얹자 그녀는 날카롭게 손을 쳐내며 한 발자국 멀어졌다.
“괜찮다니까! ……손, 대지 마.”
그녀는 무언가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부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녀를 위해 그가 손수 꺾어 온 블루벨 꽃이 처참하게 땅에 흩어지고 짓밟혔다.
행동은 그리 매몰차면서, 그를 향하는 보랏빛 눈동자는 지독히도 애처로웠다.
이쯤에선 여인의 눈동자 역시 빛을 잃었다.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고 칙칙한 흑백에 물들었다.
“……나, 나 따라오지, 마.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그녀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어디론가 뛰쳐나갔다. 혼자 두기엔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 상태였다. 벨리아르는 곧장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벨라는 그들이 뛰어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눈앞의 광경이 바뀌었다.
여인의 손엔 어설프게 단검이 들려 있었다. 벨리아르는 그녀가 다칠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벨라, 진정해. 진정하고 가만히 있어. 내가 갈 테니까…….”
그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다가가자 그녀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오지 마. 가. 제발 좀, 가란 말이야!”
“내가 도울 수 있어, 벨라. 그러니까 제발…….”
그녀에겐 그에게 틈을 내어 줄 조금의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제발, 제발 가라고 하잖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제발 좀 가란 말이야!”
“벨라…….”
그가 기어코 한 걸음 더 다가갔을 때,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나, 당신이 싫어!”
그 한마디가 뭐라고. 그는 칼에 깊이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멈춰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벨리아르, 나 당신이랑 결혼하는 거…… 싫어. ……아니, 끔찍해.”
세게 틀어쥔 손톱이 손바닥의 연한 살을 파고들었다. 그깟 상처보다 그녀를 아프게 하는 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애써 목에 걸린 말들을 끄집어냈다.
“나…… 나 이제 당신 사랑하지 않아. 아니, 애초에 사랑한 적 없어.”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꾸역꾸역 뱉어 내는 말이 참으로 잔인했다.
“벨라, 지금 무슨 말을…….”
그녀는 남은 의지를 끌어모아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에게 향하려는 칼끝을 간신히 틀어 제 배에 꽂아 넣었다.
“흐윽…….”
“벨라!”
그는 처절하게 소리치며 곧장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무서울 정도로 선연한 붉은색이었다. 색이 없던 세상에 그녀의 생명이 사그라드는 장면만 잔인하도록 붉었다.
“……벨라. 벨라, 제발…….”
벨리아르는 다급히 칼을 빼내어 상처 부위를 지혈했다. 그러나 손으로 울컥 새어 나오는 피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빠르게 생명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힘없이 칼을 쥐었다. 마지막 남은 무의식이 칼을 들어 그의 팔을 그었다.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깊은 상처는 낼 수 없었지만, 지워지지 않을 자국은 새길 수 있었다.
“……나,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해.”
그의 팔을 긁던 단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창백한 손이 맥없이 늘어졌다. 그들을 지켜보던 벨라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뺨을 적시는 물기에 서서히 눈이 떠졌다. 어스름한 새벽 공기가 코끝을 적셨다.
아른거리는 시야로 벨리아르 공작의 모습이 들어찼다. 마치 그의 기억 한편을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몹쓸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