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프리스틴은 속으로 마음껏 기뻐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물론 겉으로는 절로 휘어 올라가는 입꼬리를 찻잔으로 가린 채 눈만 동그랗게 떴다.
기쁨에 가슴이 뛰던 것도 잠시, 벨리아르 공작은 매정하게 선을 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살펴보던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계신 동안 편안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고작 형식적인 대화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벌써 일어난다고?
프리스틴은 다급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공작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딱히 불러세울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만 벙긋거렸다.
“에릭, 네가 안내해 드려.”
그사이 벨리아르는 뒤에 서 있던 에릭에게 짧게 지시하곤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프리스틴의 입술 새로 허망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엇 때문에 이 먼 곳까지 고생해서 온 건데. 아직 식지도 않은 차를 바라보며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도 영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니 실망하기엔 이르다. 며칠 간은 공작과 가까이 지낼 수 있으니 그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공작 성이 규모가 크긴 하지만 손님으로 머무는 이상 그도 계속 모른 척할 수는 없을 거란 희망을 품어 보았다.
* * *
벨라는 제 방으로 돌아와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푹신한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눈부실 정도로 해사한 햇살에 떠밀리듯 눈이 감겼다.
“……날씨가 너무 좋잖아.”
정말 부질없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날씨가 좋으면 뭐 해.
누군가 창문을 열어 놓고 갔던 걸까. 조심스럽게 닿은 바람이 제법 차가워서 놀랐다. 벨라는 옆에 있는 이불을 끌어와 배까지만 덮었다. 그러니 온도가 딱 적당했다.
“심심해 보이시네요.”
그리 태평하게 보이나요?
자연스럽게 대꾸가 떠오른 것도 잠시, 벨라는 번뜩 눈을 뜨며 튕기듯 상체를 일으켰다.
여기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리면 이상한 거잖아.
반사적으로 창가 쪽을 돌아보았다. 눈앞의 낯선 남자를 보자 말문이 턱 막혔다.
창가에 기대선 남자의 옅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꼈다. 웃을 때 접히는 눈매를 따라 휘어지는 녹음의 눈동자가 싱그러웠다.
“오랜만이에요.”
원래 아는 사이였던 것처럼 친근한 인사였다. 혹시나 정말 아는 사람인데 자신이 기억을 못 하나 싶었지만, 그럴 확률은 매우 적었다. 평생을 숨어 살던 그녀에게 닿은 인연은 그리 많지 않았다.
“누, 누구세요? 여긴 어떻게…….”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요. 당신을 해하려고 온 것이 아니니.”
인상이 선해서 그런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단지 3층 높이의 이 방에 어떻게 기척 없이 들어왔는지에 대한 의문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을 뿐.
“어떻게,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으니 남자는 태연하게 창문을 가리켰다.
“여기 창문이 열려 있길래.”
“……거기로 들어왔다고요?”
남자는 조용히 웃으며 창가에 기대어 있던 몸을 뗐다. 그가 한두 걸음 다가오자 낯선 바깥의 향이 느껴졌다. 이 성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안도감과 경계심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어느 쪽에 태도를 맞춰야 할지 모르는 그녀는 여전히 당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남자는 손을 뻗어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선, 흔들리는 보라색 눈동자를 확인하듯 마주했다.
“걱정했는데 잘 찾아오셨네요. 좀 늦긴 했지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대체 누구신데…….”
당장 나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를 거라는 소리는 머릿속 한편에만 둥둥 떠다닐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과연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심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그냥 얼굴만 보러 온 거니까.”
남자가 싱긋 웃었다. 다정한 손길로 톡톡, 그녀의 머리를 도닥였다.
“보고 싶었거든요.”
“……저를 아세요?”
“서운하네요. 제가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남자는 정말 서운하다는 기색으로 눈꼬리를 내렸다. 숲을 담아 놓은 것 같은 초록의 눈 때문인지, 자꾸만 경계가 누그러지려 했다. 그럴수록 벨라는 이불 아래 깔린 손을 꾹 말아쥐었다.
이곳에선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
“그래도 막상 눈으로 보니까…… 속상하네요. 질기디 진한 인연이 끊어지지도 않고 또다시 이어져 버렸으니. 결국 이번에도 고통은 오로지 당신의 몫일 텐데.”
남자가 하는 말은 단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 역시 낯선 제게 선을 긋는 듯했다.
마치, 자신의 너머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최 영문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보고선 남자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긴.”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거리낄 것 없이 당당하고 넓은 보폭의 걸음걸이. 그였다. 벨리아르 공작.
그녀의 어깨가 눈에 띄게 바짝 굳어졌다.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본능적으로 이 남자를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빗발쳤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숨이 어지러웠다.
복도의 발소리는 빠르게 가까워져 왔다. 허리를 숙인 남자가 그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결국 그 손에 죽을 거란 말이에요.”
숨결 같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어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목 뒤며 팔이며 발끝까지, 온몸의 살갗이 오그라들었다.
노크 없이 벌컥 방문이 열렸다. 얼어붙은 그녀의 눈동자에 벨리아르 공작이 담겼다.
그녀를 향하던 벨리아르의 시선이 서서히 빗겨 나갔다. 정체 모를 남자가 서 있던 그녀의 곁으로, 끝내 창가로.
눈치챘을까?
몰래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것처럼 손바닥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공작님.”
조심스럽게 부르자 느릿하게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올수록 그녀의 숨소리가 억눌리듯 옅어졌다.
“생각보다 일찍 와서 실망했어? 반응이 영 별론데.”
“아, 아니에요. 갑자기 오셔서……. 조금 더 오래 걸릴 줄 알았어요.”
그는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그녀의 앞에 섰다. 커다란 손이 뺨을 감싸 쥐었다. 그때 깨달았다.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제법 차가웠음을.
뺨으로 닿은 그의 손에서 오늘은 따뜻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의 손이 따뜻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제 뺨이 차가웠던 것이다.
엄지로 뺨을 쓸어내리던 그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그 미세한 표정 변화에도 벨라는 어깨를 굳히며 긴장했다. 뺨을 쥔 손에 살짝 힘이 실렸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늘 그러했듯 그는 제 것처럼 그녀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순응하자 그 역시 조금은 부드러워진 손길로 답했다.
“창문은 닫고 있는 게 좋겠는데. 뺨이 차잖아.”
“아…… 네. 오늘 좀 답답해서…….”
“여기서 나가고 싶어?”
오늘 했던 생각과 행동 때문인지, 태연한 물음에도 절로 가슴이 조였다. 그러나 굳이 아니라고 하진 않았다.
“……네.”
“왜?”
“그건…….”
차마 국경을 넘어 도망갈 거라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이 지긋지긋한 땅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고 싶다고. 그가 비웃을 것 같았다.
굳이 그리 답하지 않아도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조소를 흘렸다.
“어차피 나가 봤자 죽을 텐데.”
그렇다고 여기 있어 봤자 언제 죽느냐의 차이 아닌가. 왜 내 삶의 선택지엔 온통 죽음뿐인 건지. 억울하고 서럽다.
벨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그 한숨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한 건지, 그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헤버튼에 놓고 온 그 애가 그렇게 마음에 걸려?”
그는 또 이안을 말하고 있었다. 벨리아르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 애가 그리 보고 싶나?”
그녀가 대답이 없자 붉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이안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 단단히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아니면, 어제 있었던 일이 결국 그의 귀에 들어갔거나.
“대답해.”
“……아니요.”
자신이 헤버튼을 떠나게 된 것은 이안에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자신이 홀랑 받기엔 과분한 마음이었다. 만약 더 오래 있었다면 욕심이 났을 것이다.
어차피 평범한 사람들처럼 평생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닌데. 그러니 이안이 보고 싶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만나게 해 줄 수도 있어.”
“……진심이세요?”
“그럼. 아주 쉬운 일이잖아. 사람 하나 찾아서 잡아 오는 건 일도 아니니까.”
보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안을 끌고 오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곱게 들릴 리 없었다.
“왜, 친구 보게 해 주겠다는데 반응이 왜 그래.”
순간, 그에게 이안의 존재를 들킨 것이 후회됐다. 이안이 헤버튼에 있다는 것도 알 테니……. 갑작스레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벨리아르는 조용히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숙이자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그의 눈길이 닿는 대로 밤하늘에 촘촘히 박힌 수많은 별이 차례대로 반짝였다.
역시, 박제해 놓는 것보다 이편이 훨씬 만족스러웠다. 생기를 머금은 것이 이리 탐나는 것은…… 두 번째였다.
입술이 닿진 않았지만 숨결이 스칠 정도의 거리였다. 그가 붙잡고 있는 가녀린 턱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그녀가 눈꺼풀을 내리자 그가 바짝 미간을 좁혔다.
“눈 떠.”
나지막한 명령에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숨어들었던 보석이 다시 나타났다.
벨리아르는 보랏빛 눈동자를 옭아매듯 응시했다. 그 안에 오롯이 담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놓아주었다.
그가 멀어지고 손길이 거둬졌을 때, 벨라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가자. 일어서.”
“……어, 어딜요?”
“내 침실.”
“집무실이 아니라요……? 침실은 왜…….”
벨리아르는 멍하니 묻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밤에도 일하려면 침대가 필요하니까.”
벨라는 그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순간 무언가 휩쓸고 지나간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