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숨소리를 죽인 채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복도에선 발걸음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다는 소리다. 고요하게 불어온 바람만이 창문을 쓸고 지나가며 소리의 흔적을 남겼다.
창문을 닫고 다시 커튼을 쳤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바깥에서 누군가 제 모습을 볼까 봐 지레 겁이 났다.
벨라는 조심스럽게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복도를 숨죽여 걸었다.
그냥 답답하니 잠깐 바람만 쐬고 오는 것이다. 그를 거스르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긴장되는 마음을 다독였다.
바깥으로 나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간에 사용인과 마주쳤지만 뻣뻣하게 얼어붙은 그녀를 보고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성에는 총 세 개의 문이 있었다. 그중 그녀가 아는 문은 정문뿐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정문으로 나가는 건 너무 무모한 데다 늘 지키는 기사가 있었다.
벨라는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던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늘은 그저 성의 지리를 파악하는 데에 목표를 두었다.
최대한 외진 곳으로, 사람이 없을 만한 곳을 골라 가다 보니 점점 길이 좁아졌다.
정말,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저 멀리 바깥과 이어진 듯한 문을 발견했을 땐 희망을 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벨라는 홀린 듯이 문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로 통할지 알 수 없는 입구를 보자 서서히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문만 나가면 바로 밖일 텐데. 그러고 나서 앞만 보고 달리면…… 이 성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서히 문으로 다가가는 손끝이 눈에 띄게 떨렸다. 덩달아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가씨.”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는 에릭이 있었다. 전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는 평소처럼 단정한 어투로 물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질책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어쩐지 묘한 기류가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그냥 혼자 찔려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가 눈치챈 건지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나오는 말이 엉망이었다.
“아……. 그냥…… 바람을 좀, 쐴까 해서요.”
바람 쐬는 것 정도는 되지 않을까…….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 무거운 공기를 가르고 지나간 서늘한 바람이 고맙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에릭은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가씨.”
“……네?”
그가 말을 잇기 전,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입고 돌아다니시면 감기 걸립니다. 헤버튼과 달리 베른은 훨씬 날씨가 차니 조심하세요.”
경고일까, 순수한 걱정일까.
그녀는 여전히 문 앞에서 미련을 놓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에릭은 그녀의 앞을 터 주며 옆으로 비켜섰다.
“계속 산책하실 거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벨라는 가슴을 꽉 채우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더 이상 의심을 사기 전에 여기서 멈추는 게 옳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에릭의 뒤를 따라 결국 방으로 돌아왔다. 분명 사치스럽게 넓은 방인데 들어오자마자 숨이 막혔다. 방안에서 전해지는 따듯한 온기가 그녀를 위로해주지 못하고 무겁게 내려앉았다.
에릭은 서 있는 그녀를 지나쳐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말없이 커튼을 열어젖혔다. 쓸데없이 따스한 햇살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에릭은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네.”
“이곳에서 아가씨를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섣부르게 행동하지 마세요.”
에릭이 느린 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허리춤에 달린 검이 햇빛에 반짝였다. 항상 차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존재감이 튀었다.
“제가 아가씨를 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잠시 호의라고 착각했었다. 겉으로 보기에 정중했을 뿐, 그가 건네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경고였다.
* * *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때쯤 벨리아르 공작이 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날은 밤늦게까지도 벨라를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마음 놓고 잠에 빠져들었다. 물론 잠들기 전까지 이런저런 걱정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해가 떴을 때, 벨라는 어김없이 그의 부름에 따라 집무실로 향했다.
“앉아.”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왜 곧바로 부르지 않았을까.
혹시 어제 에릭에게 무언가 말을 들은 건 아닐까 초조하고 불안했다.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된다면…….
잠깐의 가정을 했을 뿐인데 막연한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선연한 바깥의 향을 풍기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불안에 젖은 마음을 숨기려 조용히 숨을 골랐다.
“어젠 뭐 했어?”
“……네?”
당황스러운 마음에 애꿎은 대답이 튀어나와 버렸다. 그저 평범한 질문이었을 뿐인데. 그 역시 벨라가 당황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내 질문이 어려웠나. 어제 뭐 했냐고.”
“아, 그게…….”
“에릭한테 물어볼까?”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아무 의미 없이 던지는 말에 지레 찔리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니요. 산책……했어요.”
방에 있었다고만 하면 아예 거짓말이니까. 적당히 사실을 섞어 얘기했다.
“산책이라, 산책 좋지. 혼자 다녀왔어?”
무서워서 차마 그의 표정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태연한 대답이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벨라가 먼저 잘못을 빌었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잘못을 빌라고 한 말이 아닌데. 산책 다녀온 게 뭐 그리 잘못한 일이라고. 그래도 아직은 익숙하지 않으니 다음부턴 에릭과 같이 가.”
“……네, 그럴게요.”
벨리아르가 말없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봤다. 숨을 옥죄는 침묵이었다.
벨라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겨우 짜낸 질문을 던졌다. 왠지 제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공작님은…… 뭐 하셨어요?”
“사냥.”
“아…….”
“토끼 좋아하는 것 같던데. 다음엔 토끼 한 마리 잡아다 줄까?”
그의 말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 떠올라 버렸다. 새빨간 피로 물든 하얀 토끼.
안 그래도 좋지 않던 표정이 더욱 울상이 됐다. 그는 가볍게 픽 웃었다.
“살려서 잡아 온다는 소리였는데.”
벨리아르가 내내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녀의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마치 제 것을 만지듯 전혀 거리낌 없는 손길이었다.
그는 감상하듯 벨라의 눈동자를 훑었다. 언제 봐도 참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였다. 그녀가 살짝 몸을 빼려고 할 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주인님, 에릭입니다.”
“들어와.”
에릭이 들어오며 그녀와 스치듯 눈을 마주쳤다. 어제의 일이 있었기에 지레 찔린 벨라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일이지?”
“프리스틴 황녀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갑자기 황녀가 왜?”
“근처 도시로 휴양을 오셨다가 들른 듯싶습니다.”
벨리아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걸 보니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는 에릭을 보며 벨라에게 명령했다.
“벨라, 방으로 가 있어.”
* * *
프리스틴은 응접실로 들어오는 벨리아르의 모습을 보자마자 발갛게 뺨을 붉혔다.
처음 성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맞을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아 불쾌했던 감정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혹시 제 서신을 읽지 않으셨나요? 거기에 오늘쯤 도착한다고 써 놨었는데…….”
“요즘 바쁜 일이 있어서 미처 읽지 못했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언사였다. 프리스틴은 개의치 않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애초에 저 냉정하고 금욕적인 모습에 반했던 거니까.
그녀는 늘 그랬듯이 머릿속으로 자신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한 공작을 상상했다. 그깟 서신 하나 내쳐진 건 금방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상상은 달콤했다.
“그럴 수 있죠. 아, 요즘 베른에서 해괴한 사건이 일어난다면서요? 괜한 것들 때문에 벨리아르 공만 고생이네요.”
“괜찮습니다. 곧 해결할 예정이니 전하께서는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끔 이리 툭툭 던지는 말 하나에도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게 되니,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전하께서는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당히 낮은 목소리의 울림이 사라질까 최대한 오래오래 곱씹었다.
“역시 벨리아르 공은 자상하세요.”
세상에서 그를 자상하다고 하는 건 오로지 프리스틴 황녀뿐일 것이다. 벨리아르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스며들었다.
“그렇게 느끼신다니 다행입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이 성에서 며칠 머물다 갈까 해요. 공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찻잔의 능선을 느릿하게 훑던 손가락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더니 일정하게 까딱였다. 깊이 생각에 빠진 듯한 모습에 대답을 기다리던 프리스틴의 얼굴로 서운한 기색이 번졌다.
“저, 벨리아르 공……?”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벨리아르의 손짓이 멈추었다. 단칼에 상념을 끊어낸 벨리아르는 곧 찻잔을 들며 태연하게 답했다.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뭐라고 하셨죠?”
마주 앉은 프리스틴의 감정이 어떻든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벨리아르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지그시 그녀를 향하며 대답을 채근했다. 프리스틴은 순간 차올랐던 비참한 감정을 애써 외면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분간 이 성에 머물러도 되겠냐고 했어요. 음, 오래간만에 멀리 나왔는데 아무래도 수도까지는 거리가 상당하니까요. ……그렇게 해도 될까요?”
제법 용기를 담은 말이었다. 달랑 편지 한 통 쓰고 무작정 찾아온 것도, 황녀라는 지위를 앞세워 이 성에 머물겠다 선언하듯 말한 것도.
비록 연심을 숨기지 못하고 끝에 공작의 눈치를 살피긴 했지만 말이다.
입 안에 머금은 차의 향이 혀끝에서 사라질 무렵, 벨리아르는 기꺼이 답해 주었다.
“그렇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