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사람의 마음만큼 쉽게 무너지는 것이 또 있을까. 사실일 리가 없는 데도, 그런데도 그 한마디에 여태 쌓인 믿음이 크게 휘청거렸다.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어도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쳐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 한 방울이 손등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겨우 그런 말에 이리 눈물을 보이는 게 매우 자존심이 상했지만, 두 손이 다 잡혀 있어 눈가를 벅벅 문지르지도 못했다. 더욱 속이 쓰렸다.
자신의 표정을 관찰하듯 훑는 그의 시선에서 해방시켜 준 건 갑작스럽게 들린 노크 소리였다.
“주인님, 에릭입니다.”
에릭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공작과 단둘이 있는 상황은 매번 긴장의 연속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용인들은 있으나 마나 하니, 에릭의 존재가 그녀에겐 동아줄과 같았다. 비록 그마저 썩었을지라도.
에릭의 등장과 동시에 벨라는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녀는 뒤늦게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들어와.”
“잠시 연무장에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벨리아르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벨라 쪽으로 돌아섰다.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떨궈진 작은 머리통을 빤히 내려다보며 손에 들린 편지를 찢었다.
벨라는 나름 공들여 썼던 편지가 찢기는 소리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여러 갈래로 찢긴 편지를 그녀의 치맛자락으로 던져 놓곤 명령했다.
“방으로 가. 그리고 내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섰다. 문을 잡고 있던 에릭이 그녀에게 살짝 눈짓하곤 공작의 뒤를 따라나섰다. 알아서 방으로 잘 돌아가 있으라는 소리 같았다.
혼자 남은 벨라는 치마를 꾹 그러쥐었다. 휘말려 들어간 종잇조각이 선명하게 존재감을 나타냈다.
벨라는 바닥에 흩어진 종이 쪼가리까지 모두 주워 담아 방으로 돌아갔다. 이젠 족쇄도 없고 사용인의 방이라기엔 지나치게 호화스럽지만, 그녀에겐 창살 없는 감옥과 같았다.
벨라는 협탁 위에 편지 조각들을 우수수 쌓아 놓고 허망하게 웃었다. 그냥 버리자니 온전히 공작의 뜻대로 따르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쓰레기가 되었을 뿐인 종이 쪼가리에 미련을 담아 내는 자신이 우스워 자괴감이 일기도 했다.
힘없이 주저앉으니 아까 넣어 두었던 황녀의 편지가 걸리적거렸다.
찢긴 제 편지마저 버리지 못하는데 무슨 배짱으로 황녀의 친필 서신을 버릴까.
결국 그녀는 황녀의 서신 역시 협탁 서랍에 넣어 두었다. 버리라는 공작의 명에 반발하고 싶은 마음 반, 귀한 서신을 불에 태우기 부담스러운 마음 반이었다.
* * *
“방으로 가. 그리고 내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
그 싸늘한 표정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다시 또 그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날, 그는 어김없이 벨라를 곁으로 불렀다. 오늘은 산책을 한다고 밖으로 나가더니 화원으로 향했다. 저번에 족쇄에 묶여 그의 앞에 섰던 그 화원이었다.
화려한 꽃들이 가득했지만 그런 것들을 눈에 담고 감탄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그에 대한 두려움뿐이었다.
이곳엔 또 왜 데리고 온 걸까.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벨리아르는 아무 일 없었단 듯이 태연하게 말을 걸어왔다.
“계속 숲에서 살았어?”
“……네.”
그는 화원의 구석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꺼내 왔다. 흔히 식물의 곁가지 같은 것을 다듬을 때 쓰는 전지가위였다.
그가 앞으로 다가와 가위를 건넸을 때, 벨라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정원사가 며칠 전에 죽어 버려서.”
왜, 무엇 때문에. 정원사도 그의 손에 죽은 걸까.
그가 무슨 의도로 가위를 건네는 건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꺼내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고 두려웠다.
어제 이안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던 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걸까? 그래서…… 자신도 꼬투리를 잡아 죽이려는 걸까.
“전…… 식물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는 잘…….”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렸다.
“숲에서 살았다며.”
거의 평생을 숲에서 살아온 건 맞지만, 보통 식물을 가꾸기보단 꺾는 쪽이었다. 살려면 풀떼기라도 뜯어서 먹어야 했고 거처 주변의 잡초도 매일 정리해야 했으니까.
벨라가 고개를 숙인 채 가위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그가 턱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일을 하겠다고 했으니 일을 시키는 건데. 왜, 하기 싫어?”
하기 싫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자신이 없을 뿐이지.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다급히 대답했다.
“아, 아니요. 하고 싶어요.”
시야에 걸쳐진 그의 입꼬리가 살짝 휘어 올라갔다.
“그래, 성심성의껏 해 봐.”
그는 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벨라는 꽃이 피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여러 꽃이 있었지만 이름을 아는 꽃은 하나도 없었다. 식물을 돌보는 것엔 아예 지식이 없어서 당최 무얼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냥 겉보기엔 이대로도 충분히 잘 다듬어져 있는 것 같은데.
벨라는 조심스럽게 꽃을 건드려 보았다. 꽃잎이 생각보다 부드럽고 폭신했다.
“……정원사는 왜 죽은 거예요?”
“글쎄.”
성의 없이 돌아오는 대답에 벨라는 굳이 질문을 이어 가지 않았다. 그를 힐끗 살피니 차를 마시며 어떤 서류를 보고 있었다.
바쁜 듯 보이니 더 말은 걸지 말아야겠다. 그녀로선 각자 할 일을 하는 것이 훨씬 편하니까 오히려 다행이었다.
벨라는 제게 주어진 일에 집중하려 애썼다. 일단 다듬으라고 가위를 줬으니 대충 삐져나온 것 같은 줄기들을 톡톡 잘라 냈다.
하다 보니 의외로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잡생각을 떨쳐 내고 멍하니 집중하기에 적당한 일 같았다.
다 좋았는데, 문제는 너무 생각 없이 하다 보니 꽃 몇 개를 그대로 잘라 버렸다는 것이다. 다듬기만 하려 했는데 어쩌다 본 줄기를 잘라 버린 모양이다.
혹시 그가 봤을까 싶어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왔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보면 더 의심을 살 것 같아서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했다.
꽃을 그리 신경 쓸 것 같진 않은데. 아닌가. 그래도 이렇게 온실 화원을 꾸며 놓을 정도면 꽃을 좋아하는 건가…….
고민하는 그녀의 뒤로 벨리아르가 인기척 없이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하얀 꽃 두어 개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갑자기 뻣뻣해졌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살며시 어깨를 감싸 쥐는 손길에 벨라는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일에 집중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체 언제 뒤로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이안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의 입에서 이안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이안의 생각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괜스레 억울했다.
벨라가 답하지 않자 그는 어깨를 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적당히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로만. 그녀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어제 내가 편지를 못 쓰게 해서, 그래서 이렇게 꽃의 모가지를 다 따 놓은 건가? 애꿎은 꽃이 무슨 죄야.”
“……아니요. 아니에요.”
“그럼?”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걸까.
그가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은 이전의 경험으로 충분히 깨달았다. 고민하느라 대답을 지체하면 저 손이 목을 조를 것 같아 당장 떠오르는 대로 입을 움직였다.
“……공작님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헛웃음이 섞여 든,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벨라, 착하네. 똑똑하고.”
* * *
“나갔다 올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네.”
그는 가끔 이렇게 성을 비웠다. 유일하게 그의 곁에서 해방되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엄청난 자유를 누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숨은 쉴 수 있었다.
벨라는 착실히 그의 말에 따라 얌전히 방안에만 머물렀다. 딱히 나가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게 옳았다. 공작이 형체 없이 옭아맨 족쇄는 실로 단단했다.
타닥, 탁.
아까부터 자꾸 창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가까이 다가가 커튼을 걷으니 창 너머로 앙증맞은 새 한 마리가 보였다.
어둡던 그녀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퍼졌다. 창문을 살짝 여니 작은 새가 삑삑거리며 다가왔다.
“……안녕?”
양쪽 볼에 주황색으로 동그란 무늬가 있는, 전체적으로 하얗고 노란 새였다. 동글동글하니 귀여워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새였다. 살며시 손을 내미니 다가와서 제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다정하구나.”
벨라의 손길이 마음에 들었는지 새는 그녀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졸졸 쫓아왔다. 쓰다듬지 않으면 빤히 눈을 마주 보다가 제 머리를 들이밀곤 했다. 마치 작은 털 짐승 같았다.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을 새와 보냈다. 춥다는 생각이 들 때쯤, 손길이 충분했는지 새는 인사하듯 그녀의 손을 부리로 아프지 않게 콕콕 찌르곤 날아가 버렸다. 자유롭게 푸른 하늘로 사라지는 새를 보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날 수 있어서 좋겠다.”
저도 모르게 나온 속마음이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가 너무나도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은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성의 주인인 벨리아르 공작? 아니면, 언젠가 다가올 죽음?
공작은 당장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언제든 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녀 하나쯤 죽인다고 제국 내에서 공작을 비난할 사람이 있을까. 오히려 불안의 싹을 잘라 냈다며 추앙하겠지.
짐승을 쏴 죽이고 사람을 해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그였다.
공작은 언젠가 분명, 자신을 죽일 것이다. 죽이려는 이유는 몇 가지가 떠올랐지만, 굳이 살려 둘 필요는 없었다.
홀로 침묵 속에 갇혀 있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욕구가 강해졌다.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것 없는 삶이지만, 죽기는 싫었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면 너무 억울하잖아.
적어도 평범한 삶은 한 번쯤 누려 보고 죽고 싶었다. 그렇기에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그러려면 일단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데…….
성의 사용인들처럼 탁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굳게 닫힌 방문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