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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0)화 (10/180)

10화

“프리스틴 황녀의 서신이네요.”

벽에 걸려 있는 총이 낯익었다. 그녀는 불과 며칠 전, 자신에게 겨눠졌던 기다란 총신을 절대 잊지 못한다.

그 외에도 공작의 집무실 내에는 여러 무기가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났던 쌉싸름한 향과 더불어 무거운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었다.

그녀는 신발로 값비싼 카펫을 더럽히지 않도록 발끝에 힘을 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유독 숨소리가 크게 느껴지는 듯했다.

정작 그녀를 긴장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매우 태연했다. 에릭의 말을 듣긴 한 건지, 황녀의 서신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짤막하게 지시했다.

“버려.”

그렇다고 에릭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무려 황녀의 친필 서신인데 읽어보지도 않고 버리라니. 하지만……. 문득 전에 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사실상 이 나라의 실제적인 황제는 벨리아르 공작 아니야?”

“황제가 벨리아르 공작의 허수아비라는 말은 지나가던 똥개도 알겠다.”

“두 분이 독대할 땐 황제 폐하가 공작님 발아래에 바짝 엎드린다더라.”

그녀의 귀까지 흘러들어 온 말이라면, 아마 이 땅에서 저 소문을 못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소문은 더 이상 한낱 소문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암묵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안 읽어 보셔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뻔하지. 궁금하면 네가 읽어 봐도 좋아. 대충 답신까지 써 주면 더 좋고.”

저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헷갈려 하는 건 이 방 안에서 그녀뿐인 듯했다.

황녀의 서신에 감히 공작을 대신해 보좌관이 답신을 쓰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할 위험한 농담이었다. 그러나 에릭은 딱히 개의치 않는 듯 질색하는 얼굴로 대꾸했다.

“어차피 뻔한데 그냥 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에릭이 버릇처럼 황녀의 서신을 뒤쪽으로 건넸다. 정확히는 뒤에 쥐 죽은 듯이 앉아 있던 벨라에게로.

잠시 기다려도 편지를 받아 가는 기척이 없자 벨리아르와 에릭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벨라는 그제야 편지를 자신에게 건네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 버린다고 했지.

둘의 암묵적인 시선이 제법 부담스러웠던 그녀는 얼떨결에 황녀의 서신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었다. 의도하는 바를 이룬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대화를 이어 갔다.

“포웬 마을에서 또 희생자가 나왔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일단 소문의 마녀 소행인지는 확실치 않아 조사하라고 지시해 놓은 상태지만, 저는 같은 사람의 소행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녀가 이 성의 사용인으로서 한 첫 번째 일이었다. 다음으로 할 일은 이 고급스러운 편지를 처리하는 것이겠지만, 차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의 편지인데 읽지도 않고 막 버려도 되는 걸까. 그렇다고 저 둘을 대신해 직접 읽어 보는 건 더욱 말도 안 되는 짓이고.

“희생자가 지금까지 몇 명이지?”

“세 명입니다.”

“그새 한 명이 더 늘었네. 다 같은 장소에서 발생한 것이지.”

서신을 양 손바닥 위에 올려 둔 채 깊게 고심하던 그녀는 결국 선택을 미루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 태워 버릴 수도 없으니 품속에 고이 넣어 두었다.

다시 할 일이 없어진 벨라는 뒤늦게 벨리아르와 에릭의 대화에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다.

“예, 모두 페이트 기사단이 다녀갔던 포웬 마을에서 발생했습니다.”

기사단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굳혔다.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잊으려 애썼건만, 고생했던 몸이 기억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괜스레 몸이 시린 듯해 팔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그는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덜떨어진 것들. 먹이를 코앞에 던져 줘도 엉뚱한 데서 헛짓거릴 하니.”

그러고 보니 바깥 상황은 어찌 되었을까. 기사들이 아직도 자신을 찾고 있으려나. 이곳에 갇혀 있는 듯싶다가도, 이럴 땐 마치 천혜의 요새에 꼭꼭 숨어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일단 알겠다. 나가 봐.”

“예, 쉬십시오.”

에릭이 나간 후 벨리아르는 다시 갖가지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펜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집무실 안은 무거운 침묵을 머금은 공기로 가득 들어찼다.

자신 있게 무슨 일이든 맡겨만 달라 했지만, 그는 자신을 아침부터 불러 앉혀 놨을 뿐 별다른 일을 지시하지 않았다.

여전히 숨소리에 신경을 쓰며 불편하게 앉아 있던 벨라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일어섰다. 일을 하겠다고 했으니 청소라도 할 생각이었다.

힐끗 공작을 살피니 이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안도한 그녀는 조심스레 발을 움직였다. 여기저기 꼼꼼히 살펴봤지만 먼지 한 톨 내려앉은 흔적이 없었다.

그녀는 장식처럼 놓여 있던 칼의 손잡이를 살며시 쓸어 보았다. 날카롭게 빛을 반사하는 칼날을 보며 저도 모르게 지난날 공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토끼를 쏴 죽였을 때처럼 사람을 베는 데에도 한 치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팔이 아니라 목을 베는 것이었더라도 그는 주저하지 않았을까. 주저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망설이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너 뭐 하는 거야?”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벨라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언제부터인지 공작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네? 아, 너무 가만히 있는 것 같아서요. 뭐, 뭐라도 좀 하려고…….”

“정신 사나우니까 앉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목소리에 그녀는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 대체 언제부터 이곳이 자신의 자리가 된 건지. 공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본인의 일에 몰두했다.

이리 멍청하게 앉아 있지만 말고 뭐든 해야 하는데. 살려면 쓸모가 있어야 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조바심이 일었다. 그는 일을 하는 대가로 자신을 살려 두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쓸모가 없어지면 저 냉혹한 손이 언제 제 목을 비틀지 알 수 없었다.

“저, 그럼 제가 할 일은…….”

다시 한번 짜증스러운 음성이 날아올 줄 알았더니, 그는 의외로 평온하게 되물었다.

“할 일이 없어?”

“……네.”

할 일을 알려 주지도 않았으면서.

벨라는 속으로만 불만을 웅얼거렸다. 그는 짧게 숨을 내쉬더니 책상 위의 작은 종을 쳤다.

곧이어 하녀 한 명이 들어왔고 그가 무언가를 지시했다. 얼핏 듣자니 간식거리와 무언가를 내어 오라는 것이었다.

잠시 후 하녀 몇 명이 무언가를 들고 들어오더니 그녀의 앞에 간단한 티 테이블이 차려졌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그녀 앞으로 벨리아르가 다가왔다. 긴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심심하면 그림이라도 그리고 있어. 배가 고프면 먹고. 그게 네 할 일이야.”

종이 몇 장과 펜, 그리고 하얀 꽃이 담긴 화병, 먹음직스러운 쿠키와 향긋한 차. 그의 말을 들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게…….”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겨우 목소리를 꺼냈을 무렵, 그는 이미 제자리로 돌아간 후였다.

이런 일을 달라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애초에 이건 일이 아니지 않나?

여기저기 굳은살이 배긴 손으로 값비싼 펜을 쥐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그림을 그리라고 준 종이마저도 쓰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질감이 부드러웠다. 애초에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법조차 몰랐다.

요구를 정정하자니 다시 말을 걸면 이번엔 정말 화를 낼 것 같고……. 그렇다고 멍하니 앉아 있기에도 지친 그녀는 종이로 무언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그가 지시한 일이니까.

이안에게 아무런 인사 없이 갑작스레 떠나게 되어 항상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참에 편지를 쓰는 게 좋겠다.

전해 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편지를 쓰는 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그만큼 집중하느라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도 했다.

벨라는 열심히 집중하느라 벨리아르가 제법 많은 시간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처리할 일을 모두 끝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향했다.

대체 무엇을 하고 있길래 그리 열심인 건지.

벨리아르가 가까이 다가와 편지 위로 그림자가 졌을 때가 돼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종이 위에 빼곡히 적힌 글씨를 훑고 있었다.

뒤늦게 시선을 알아차린 그녀는 아차 싶어 종이를 뒤집어놓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편지를 집어 드는 손길이 더 빨랐다.

“애인이야?”

“……아니요, 그냥 친구예요.”

남에게 보여 주기엔 부끄러운 말들도 많이 써 놨는데.

그가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간간이 흘리는 조소가 그녀의 얼굴을 한껏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마녀가 친구도 있어?”

그는 벨라의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적어도 블루벨 제국에선 특이한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나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그녀처럼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철저하게 고립되어 살아가든가, 죽든가.

편지를 가져가려 손을 뻗었지만 벨리아르는 가볍게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

“돌려주세요.”

“왜, 이렇게 친구한테 편지를 보내고선 나중에 도움이라도 요청하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곧바로 접어 두었다. 자신의 존재 때문에 그 착한 아이가 더 이상 곤란해지는 건 원치 않았으니까.

그저 그동안 고마웠던 마음을 제대로 전하고, 분명 자신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테니 그 마음을 달래 주려 했던 것뿐이다.

벨리아르의 손이 고개를 떨구고 있던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소중한 사람에게 이렇게 상처를 줘선 안 되지, 벨라. 그러니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넌 벌 받아 마땅해.”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엄밀히 따지면,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욕심을 부리려다 이렇게 되었으니까.

일렁일렁 물기가 차오르는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벨리아르는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웠다.

옅게 후회가 번지는 저 얼굴을 무너트리고 싶었다.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고 깊은 절망에 빠졌으면 좋겠다. 다시는 같잖은 희망 따위 품지 않게끔.

“내용이 제법 애틋한 걸 보니 그냥 친구는 아니었나 본데. 말해 봐, 어디까지 내줬지?”

그녀가 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아무리 멍청해도 저 말의 숨은 뜻 정도는 알아채는 게 당연했다. 순간 치미는 모멸감에 올라오던 숨이 목구멍에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공작님!”

결국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었다. 불순한 태도였지만 후회가 되진 않았다. 그도 개의치 않는 듯 무시하며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쥐고 있던 그녀의 턱을 바짝 끌어당겨 더욱 거리를 좁혔다. 허벅지 위에 올려진 그녀의 두 손목을 한 손에 그러쥐며, 언제 그랬냐는 듯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벨라, 과연 이 친구도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똑같이 널 소중하게 생각할까?”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안은 가장 소중한 내 친구야.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전적으로 믿어 주는…… 단 하나뿐인 친구야.

벨라는 마치 주문처럼 끊임없이 그 말을 되뇌었다. 멈추는 순간, 작은 의심이 그 틈으로 삐져나올 것을 알기에 필사적이었다.

“너라는 존재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일걸. 어쩌면, 마을에서 같이 나고 자란 진정한 친구들에게 돌아가 속 시원하게 푸념을 늘어놓고 있을지도 모르지.”

당장이라도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려 할수록 족쇄처럼 손목을 죄어오는 그의 손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간악한 악마의 속삭임에 그대로 스며들어야 했다.

벨리아르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내내 귀찮게 굴던 게 이제야 떨어져 나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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