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잠에 빠져드는 순간 칼에 찔린 하녀가 나타나 피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 애원했다.
그녀는 그 모습을 오롯이 지켜보며 끊임없이 음식을 삼켜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확인해 보면, 피투성이가 된 하녀의 팔이 접시 위에 올라 있었다.
놀라서 깨고, 다시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겨우 잠이 들면 다시 악몽의 순환이었다. 새벽 내내 시달리다 맞이한 아침은 썩 상쾌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는 가벼운 것들로 올라왔다. 샐러드와 담백한 빵, 그리고 수프. 고기가 없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아직 어제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 음식이 잘 들어가진 않았다.
대충 먹는 시늉만 하며 짧게 식사를 끝낸 그녀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한적한 풍경을 바라보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높은 성벽을 보니 억지로 도망간다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정쩡하게 그를 자극했다간 상황만 더 악화될 것 같고…….
이리저리 고민해 봐도 결국 당장은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조금의 틈이라도 생긴다면 무조건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사뿐히 불어오는 바람에 기대어 깊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바라보는 풍경은 또 쓸데없이 예뻐서 더욱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러다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늘 그렇듯 자연스럽게 문이 열렸다.
혹시 그 남자일까 싶어 몸이 굳었다가, 다른 사람인 걸 확인하곤 다시 긴장이 풀렸다. 항상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였다.
이상하게 이곳 사람들에게선 인간미가 그리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눈앞의 남자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릭은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의례적인 물음을 건넸다.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요.”
전체적으로 보자면 전혀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할 수밖에.
그의 시선이 그녀가 보고 있던 바깥으로 향했다. 다소 삭막해 보이는 성내의 모습을 느릿하게 훑던 그는 의외의 제안을 했다.
“바람 좀 쐬시겠습니까?”
벨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밖으로 나가자는 건가?
순간 말의 의도가 잘 파악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벽에 이어진 사슬을 흘긋 보며 물었다.
“나가도 돼요?”
“성 밖만 아니라면요.”
그래도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벨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벽 쪽으로 다가가 열쇠를 꺼내더니 연결된 사슬을 빼냈다.
저렇게 빠지는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제법 길이가 긴 탓에 에릭은 사슬을 손에 여러 번 감아쥐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벨라는 가만히 선 채 그의 움직임에 따라 점점 팽팽해지는 사슬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곧장 따라나서지 않자 에릭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누군가 제 발목에 연결된 줄을 쥐고 있다는 것은 참 묘한 기분이었다.
기사들에게 잡혀 끌려갈 때와는 조금 다른……. 특히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 그러고 서 있냐는 듯한 상대방의 눈빛을 마주했을 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역시, 불만을 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발목에서 느껴지는 쇠의 묵직함만 아니라면 모든 것들이 기쁘게 다가왔다.
온몸을 시원하게 적시는 적당한 세기의 바람, 발밑에 밟히는 잔디의 푹신함, 시원한 공기가 품고 있는 산의 싱그러운 향 같은 것들.
빼앗긴 자유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 놓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저,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절 부르실 일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있지 않을까요?”
“……에릭, 그냥 에릭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벨라는 난처한 듯 옅게 웃었다.
“제가 성함을 막 부르기엔 좀…….”
“괜찮습니다.”
낯익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를 대체 어디서 들었었는지 겨우 기억해 냈다.
말을 타고서 자신을 납치하듯 구해 줬던 그 남자였다. 친절히 숲의 입구에 내려주었던…….
하필 왜 그곳에 내려주었는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그저 우연이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소박했다.
“감사해요.”
“저한테 하는 말씀입니까?”
“네. 저번에 저 구해 주셨잖아요.”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흘렸다. 무슨 의도가 있었건, 그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숲으로 들어가면 죽진 않을 거라고 했던 그의 말이 맞았다. 고마운 마음에 아주 옅은 원망이 섞여 들었다.
“알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
“저 그렇게 바보는 아니에요.”
“저한테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까요.”
벨라는 의미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대화가 끊겼지만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그는 마치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자연스레 그녀를 이끌었다.
그저 산책이라고 하더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의도되지 않은 우연인 건지 헷갈렸다.
버릇처럼 걸음을 옮기다 저 멀리 걸어가는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간혹 에릭과 마주치는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지나가긴 했지만 그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저 사람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벨라는 일순 걸음을 멈추며 멍한 소리를 내었다.
“저기…….”
“예?”
에릭이 반문하며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았다. 어제 운 없이 벨리아르의 손에 붙잡혀 상처를 입은 하녀였다.
그래 봤자 죽을 정도의 상처가 아닌 이상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벨라의 눈엔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제, 분명…….”
저렇게 바로 일해도 되는 건가? 바닥이 흥건할 정도로 피를 흘렸었는데.
밤새 꿈에 나와 잠을 설치게 하던 사람이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굴을 착각한 건가 싶어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하녀가 맞았다.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보려 한 걸음을 내딛자 에릭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화원에 가 보시겠습니까? 좋아하실 겁니다.”
단호한 표정 앞에서 반박할 수 없었다. 말을 높이며 정중하게 대해 준다고 잠시 제 처지를 잊고 있었다.
그는 은연중에 사슬의 길이를 짧게 쥐었다. 더 이상 경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의미가 암묵적으로 전해졌다.
그녀는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자신이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네, 화원에 가 보고 싶어요.”
태평하게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에릭은 그녀의 말에 따라 성 깊숙한 쪽에 있는 화원으로 안내했다.
멀리서부터 느껴지던 꽃향기가 화원에 다다르니 더욱 짙어졌다. 좋아할 거라는 그의 말대로 화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서늘한 날씨에 이파리가 다 나가떨어져 버린 바깥의 숲과 달리 유리 돔으로 커다랗게 둘러싸인 화원은 파릇파릇한 봄의 빛깔이 가득했다.
아늑하고 따뜻한 풍경에 멍하니 입이 벌어진 것도 잠시, 뒤에 있던 에릭이 조용히 속삭였다.
“들어가세요.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말에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 남자가 있었다. 아름답던 색색의 화원이 순식간에 빛을 잃고 말았다.
에릭은 그녀의 손에 사슬을 넘겨주곤 살짝 등을 밀었다. 반강제적으로 화원에 한 발자국을 내딛게 된 벨라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이어갔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유독 보라색 꽃이 많았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도일까.
손바닥을 가만히 응시하던 벨라는 문득 제 손에 들린 사슬이 제법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였나.
긴가민가하며 조심스레 사슬을 건네주었다. 그가 사슬을 감아쥐느라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적당한 길이를 찾아 줄을 감던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잠시 응시했다.
이미 뒤로는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을 정도로 빠듯해진 사슬의 길이가 그녀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그나마 그와의 거리가 엄청 가깝지는 않다는 것에 위안을 삼던 순간, 그가 사슬을 제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겼다.
“앗……!”
갑작스레 발목이 그에게로 훅 당겨져 중심을 잃을 뻔했지만, 그가 곧바로 팔을 잡은 탓에 넘어지진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발목과 팔이 동시에 얼얼했다. 바짝 거리가 좁혀지자 그는 태연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뭐지?”
“……벨라요.”
“성은?”
“……모르겠어요.”
“성을 몰라?”
“네.”
요즘도 성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그녀는 성이 없었다.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성을 알려준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는 딱히 관심 없다는 얼굴로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어디서 왔어?”
“헤버튼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헤버튼에서 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에 점점 감정이 스며들었다.
“근데 표정이 왜 그 모양이지?”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말투에 급격히 짜증이 묻어났다.
“방에서 나갈 수 있게 해 줬잖아.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산책도 됐을 거고. 뭐가 문제야?”
이때 깨달았다.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만든 건, 그의 어설픈 호의였다.
“정말 죽여 주길 원했어?”
“정말 원하는 거…… 말해도 돼요?”
“뭔데.”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소심한 손끝으로 그의 손에 들린 사슬을 가리켰다.
“……이거, 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거?”
순간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조금 유해진 표정으로 사슬을 만지작거렸다.
“자유롭게 풀어 주면 도망갈 생각부터 할 것 같은데?”
“도망…… 안 갈게요.”
“어차피 넌 내 허락 없이 이 성에서 못 나가.”
그녀는 아까 보았던 높은 성벽을 떠올리며 그 말에 동의했다. 게다가 곳곳에는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도망갈 방법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커다란 성에 살고, 수많은 사용인을 부리며 제대로 훈련된 기사들 위에 군림하는 그는 대체 누구일까.
이쯤 되면 고민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공작님.”
워낙 가까운 거리라 분명 들었을 텐데. 그는 빤히 그녀를 응시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예상이 틀렸나? 공작이 아니면 대체 누구길래…….
다시 머리를 굴리느라 동그란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이는 모습에 벨리아르는 설핏 웃으며 기꺼이 대답을 내주었다.
“왜?”
“아, 아니요. 그…… 제가 말하려던 건…….”
“유추하던 답이 맞았으면 기뻐해야지, 왜 그렇게 당황해. 원하던 답이 아니야?”
벨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원하던 답이 아니긴 했다. 제발 그 소문의 공작은 아니었으면 했으니까.
그 대단한 공작님이 왜, 저를 가둬 놓는 걸까.
“……저는 공작님이 왜 절 붙잡아 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전 데리고 있어 봤자 공작님께 득 될 것이 없어요. 오히려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공작님께서 곤란해지실 거예요.”
“그건 내가 판단해. 그리고, 널 붙잡아 두는 이유? 당연하잖아. 넌 내 거니까.”
“……아니요. 전 공작님 것이 아니에요.”
“네가 내 영역에 들어왔고, 그런 널 내가 주워 왔지. 그럼 내 거잖아. 틀려?”
일반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논리 앞에서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불현듯 스쳐 간 생각을 내뱉었다.
“……그럼, 제가 여기서 일할게요.”
“일을 하겠다고?”
그냥 막 뱉은 말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사용인으로 일하면 적어도 방안에만 갇혀 있진 않을 테고,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올 수도 있으니까. 갑자기 약간의 의지가 샘솟았다.
“네. 먹여 주고 재워 주시니까…… 그 대가로 일을 할게요.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어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하는 말에 그는 낮게 조소를 흘렸다.
“뭘 할 수 있는데?”
“청소랑 빨래랑, 그리고 또……. 요리하는 건 자신 없지만 그 옆에서 자잘한 일들은 할 수 있어요. 재료 다듬고 설거지하고 그런 거요.”
그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모습에 그녀는 더욱 희망을 품었다. 잠시 후 그는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네가 할 일은 따로 있어.”
“저 잘할 수 있어요. 뭐든 시켜만 주세요.”
뭔진 모르지만 성에서 하는 일 중에 그리 특별한 것이 있을까. 아무래도 오랜 시간을 숲에서 지내다 보니 웬만한 허드렛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시한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일할 때 옆에 있어. 한 발자국도 떨어질 생각 말고.”
그 말인즉, 밤엔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때 무엇이든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낮에만 일하면 되는 거예요?”
희망이 들면 드는 대로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녀를 보며 벨리아르는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참, 여느 짐승보다 다루기 쉬운 사냥감이었다.
그는 하나도 안타깝지 않다는 얼굴로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어쩌지, 난 밤에도 일하는데.”
가여워라. 애써 발악하던 사냥감이 완벽히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