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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8)화 (8/180)

8화

정말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발목에 감긴 족쇄만 아니라면 그녀는 지금 살면서 가장 편안한 삶을 맛보고 있었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날씨에도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고 때맞춰 나오는 식사는 호화롭기 그지없었으며, 매일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을 때마다 하녀가 들어와 시중을 들었다.

그 남자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모든 것이 다 의아하고 불안했다. 지금의 평온한 생활을 마냥 즐길 수 없는 이유였다. 그리고 수없이 마주치는 그 사용인들도 문제였다.

“저, 옷 갈아입는 건 혼자 할 수 있어요.”

부담스러워 거절해도 묵묵히 손길이 이어졌다. 그들은 절대 필요한 말 이외에 입을 열지 않았다.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고 하나 같이 다 무표정했다.

마치, 인형처럼. 자아 없이 오로지 주인의 의지대로만 움직이는 인형들 같았다.

분명 여러 사람을 마주쳤건만, 숲에서 지낼 때처럼 홀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방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주제에 외로움을 느낀다는 게 우스웠다.

그 남자는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제 뜻대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체 이곳은 어디인지 그 사람은 누구인지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다. 아예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 짐작이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맞지 않아야 한다.

“벨리아르 공작…….”

머릿속에 자꾸만 맴도는 것을 살포시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떨리는 음성에서 그 이름만이 주는 긴장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안이 종종 전해 주는 소문의 반 정도는 베른의 공작 이야기였다. 가만히 앉아서 소문들만 들어서는 마치 머리에 뿔이라도 난 악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잔혹한 성정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다.

개중엔 그런 소문도 있었다. 공작의 유령 성에 한 번 끌려 들어가면 절대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고, 간혹 살아 나오더라도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마녀의 피를 취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지난 밤 꾸었던 꿈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도망쳐…….”

“너도 결국 죽을 거야.”

꿈에서 보았던 여자의 보랏빛 눈동자가 현실처럼 생생했다. 그리고 바닥에 흥건했던 피가 떠오르며 시야를 온통 붉게 메웠다.

정말 그 남자가 소문의 공작이라면 대체 왜 자신을 데려와 이곳에 가두어 놓은 걸까. 가진 것도 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대체, 왜. 왜…….

불현듯 발목의 족쇄가 묵직하게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사람을 잡아 와 가두어둘 리 없으니.

벨라는 이후로 때마다 들어오는 식사를 거부했다. 부른다고 올 사람이 아니니 이렇게 존재감을 표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유가 궁금해서라도 한 번쯤은 찾아오지 않을까.

그리고 정확히 사흘째 되던 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턱을 쥐고서 거칠게 들어 올리는 손길에 저항할 수 없었다. 며칠간 식사도 하지 않고 물도 거의 마시지 않았더니 온몸에 힘이 없고 어지러웠다.

“죽여 달라고 시위하는 건가?”

단단히 옭아매는 그의 시선에서 도망칠 수가 없어 힘없이 눈길을 마주했다. 화가 난 것 같진 않고, 살짝 일그러진 표정에서 미세한 짜증이 읽혔다.

“……제가 살고 싶다고 말한 건, 이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가 낮게 조소했다.

“그럼?”

“저를 보내주세요.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이럴 거면 차라리…….”

죽이세요.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어 뒷말을 흐렸다. 그 말을 했다간 저 남자는 정말 자신을 죽여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벨리아르는 쥐고 있던 턱을 놓아준 채 잠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맹랑한 말을 내뱉고도 초연한 얼굴에 언뜻 화가 올라왔다. 그러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며, 불안한 듯 짓이기는 입술을 보니 마냥 태평한 건 아닌 것 같아 조금 가라앉았다.

그래도 너무 버릇이 없지.

식사도 거부하며 몸을 혹사하고, 감히 제 앞에서 죽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니. 게다가 이런 맹랑한 짓거리를 벌이는 이유도 뻔히 보여 더욱 괘씸했다.

무엇이 됐든 제 손안에 들어온 이상 그건 제 것이었다. 죽거나 이곳에서 나가는 것 모두, 제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안 그래도 말라 있던 몸이 며칠간 굶었다고 더 볼품없어졌다.

귀찮게 구는 건 딱 질색인데.

벨리아르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지시했다.

“식사를 준비해.”

그의 말 한마디에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테이블 위로 여러 음식이 오르는 동안, 벨리아르는 소파에 기대선 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들어온 에릭에게 조용히 무언가를 보고받는 와중에도 그녀는 자유롭지 못했다.

벨라는 테이블 위의 음식을 흘긋 쳐다봤다. 그저 식사를 준비하라 일렀을 뿐인데 묘한 불안감이 덮쳐왔다.

밥을 먹이려는 걸까?

오랜만에 본 남자의 태도에선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는 지금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럼 일단은 먹지 않겠다고 버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직 원하는 걸 얻어 내지 못했으니 여기서 순순히 굽힐 순 없었다. 그럼 지난 사흘간 고생한 것이 물거품이 되지 않는가.

그녀가 여러 생각에 눈을 굴리는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아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고 이리 와.”

벨라는 하는 수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발을 디뎠다. 걸을 때마다 묵직한 쇳소리가 신경을 긁어 댔다. 발목에 전해지는 족쇄의 기분 나쁜 질감 때문에 그의 앞으로 가는 내내 표정이 좋지 못했다.

테이블 위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저 정도 음식이면 며칠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텐데. 절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먹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는 테이블의 의자를 살짝 빼 주며 턱짓했다.

“앉아.”

의외의 배려에 놀랐지만 다행히 티는 내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먹고 싶지 않아요.”

“평생 앉아 있게 만들어 줄까?”

그는 한 치의 농담도 섞여 있지 않은 어투로 태연히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벨라는 이내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 선 그가 짧게 명령했다.

“먹어.”

사흘간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갈증만 심할 뿐 음식은 전혀 당기지 않았다. 굳이 시위하는 게 아니라도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침묵이 계속될수록 옆에서 전해지는 위압감이 점점 거세졌다. 그는 곧이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진짜 말 안 듣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지만 벨라는 필사적으로 쳐다보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거세져 발끝까지 긴장이 전해졌다.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지금 순간엔 저 남자가 얼른 방을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윽……!”

여러 소리 사이로 신음이 들려오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그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는 하녀 한 명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늘 그녀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던 하녀였다.

그 와중에도 하녀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를 공황에 빠트리기엔 충분한 장면이었다.

“먹어.”

남자는 다시 명령했다. 아까와 같은 지시였지만 이번에도 먹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움에 숨을 고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고작 자신을 협박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저리 다루다니. 그것도 제 성의 사용인을.

그리고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는 그녀가 충격에 빠진 스스로를 달래는 시간까지 기다려 주는 너그러운 성정을 가지지 못했다.

얼핏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거침없이 칼을 휘둘렀다.

벨라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입을 틀어막았다.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다행히 목을 긋진 않았지만, 깊게 베인 하녀의 팔에서 피가 울컥 새어 나왔다.

벨리아르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쉬운 일이잖아. 굳이 고집 피울 필요가 있을까?”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그저 먹기만 하면 되는데. 먹기만 하면 상관없는 사람이 다칠 일은 없을 텐데.

일순 베인 팔을 부여잡고 있는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원망도 무엇도 담기지 않은 탁한 눈동자였지만 그녀는 마음은 크게 동요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제 고집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치는 건 생각보다 감당하기 버거운 충격이었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남자는 다시 한번 칼을 들었다. 벨라는 다급히 말을 쏟아 내며 포크를 쥐었다.

“……먹을게요! 먹을 테니까 제발…….”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그의 칼이 다시 하녀를 찌르는 일은 없었지만 벨라는 황급히 아무거나 포크로 찍어 입에 쑤셔 넣었다.

무엇을 먹는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음식을 집어넣는 사이 그가 다가왔다.

그래도 그 여자를 더 이상 해치진 않을 테니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손을 멈추었다. 포크를 쥔 손이 눈에 띄게 덜덜 떨렸다.

남자가 가까이 오자 음식 냄새 사이로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들었다. 그제야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이 무엇인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고기였는데, 생소한 맛이었다. 고기를 많이 먹어 보진 않았지만 확실히 돼지나 닭과는 다른…….

불현듯 지하실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얼핏 사람을 보았던 것 같다. 지독한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갑자기 올라오는 구역감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괴롭게 인상을 찡그리자 그는 등을 다독여 주며 냅킨을 건네주었다.

“뱉어도 돼.”

벨라는 떨리는 손으로 받은 냅킨에 음식을 뱉어 냈다. 속이 울렁거려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 남자는 혀를 차며 좀 더 넘기기 쉬운 수프를 가까이 놔주었다.

“속이 아프겠구나. 부드러운 것부터 먹어.”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그의 표정을 살폈다. 좀 전의 상황은 마치 꿈이었던 듯 다정하게 휘어지는 입매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살짝 눈길을 틀자 저 뒤에 쓰러져 있는 하녀가 보였다. 피를 흘리고 있는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저 하녀가 치료를 받으려면, 자신이 식사를 끝내야 한다. 벨라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스푼을 쥐었다. 남자는 칭찬이라도 하듯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겨우 한 스푼을 떠 입에 넣자, 그가 “옳지.” 하며 다독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눈가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주며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가 그녀를 옭아맸다. 그는 머리 위로 얹은 손에 힘을 주며 서늘하게 읊조렸다.

“이런 맹랑한 짓을 봐주는 건 이번만이야. 명심해.”

그는 처음부터 그녀가 원하는 것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정말, 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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