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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7)화 (7/180)

7화

기사단장의 목을 베는 건 조금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겨우 기사단장의 목숨 하나 따위. 경고를 새겨 줄까, 단죄할까.

고민하는 동안 칼날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그의 눈빛에서 진실한 살기를 느낀 루크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아픔을 잊어버렸다.

북부의 영지, 베른을 지배하는 벨리아르 공작은 무수한 소문에 둘러싸인 인물이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유령 성, 실수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잔혹한 성정. 그리고 무엇보다, 이백 년이 넘도록 젊음을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들이 한데 모여 공작은 수많은 소문을 달고 다니면서도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이 추측하는 것에는 세 가지 정도가 있었다.

첫째, 마녀의 힘을 빌려 마법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둘째,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성안에서 젊은 사람의 피를 취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현신한 악마이다.

첫 번째 가설이 맞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루크는 오늘 생각을 바꾸었다.

마지막, 벨리아르 공작은 인간의 가면을 쓴 악마가 틀림없다.

“……살, 살려 주십, 시오.”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을 때마다 살을 파고드는 칼날의 느낌이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기분 탓인지, 칼날이 점점 목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벌벌 떨리는 눈동자에 고급스러운 카펫 위를 구르는 한스의 손이 들어왔다.

아, 곧 있으면 내 모가지도 저 신세가 되는 것인가.

한스는 겁에 질려 뭐라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피가 철철 흐르는 손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마 고향에서 기다리는 아내와 아들이 있을 텐데.

처참한 광경의 중심엔 홀로 담담한 얼굴을 하고 선 공작이 있었다.

“오늘은 내게 자비를 구걸하는 자가 많네.”

“제발, 살려만 주신다면…….”

“내가 살려 주면, 넌 내게 무엇을 줄 텐가. 응? 무엇을 줄 수 있지?”

비웃듯 조소를 지었다가, 한순간에 저 설산의 봉우리처럼 얼어붙었다가. 그의 표정에 따라 한스의 심장도 같이 녹았다가 얼기를 반복했다.

목숨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못 할까. 그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정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까.

알량한 자존심이 까끌하게 목구멍을 긁었다.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공작이 속삭이듯 말했다.

“살려 줄 테니, 가서 교황의 목을 베어 와.”

“그것은……!”

예상한 대로 루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누가 신성모독이라도 한 것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퍽 애처로웠다.

뻔한 반응에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식상함에 흥미가 식어 버렸다. 제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페이트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의 배포는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다.

고작 목숨 하나 지키겠다고 여태 자존심을 세우던 자 앞에서 살려 달라 벌벌 떠는 꼴이나, 살려 주는 대가로 제 주인의 목을 베어 오라고 하니 또 망설이는 꼴이라니.

아마 여기서 더 몰아붙인다면 그리하겠다는 대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런 자를 곁에 두고 부리는 교황이 조금 안쓰러워질 정도였다.

“쯧, 한심하기는.”

벨리아르는 혀를 차며 검을 거두었다. 목에서 칼날이 멀어지자 그제야 헐레벌떡 안도의 숨을 내쉬는 루크를 내려다보며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그렇다고 고작 목에 생채기 하나 내놓고 보내주기엔 너무 가볍지 않나.

“교황의 충성스러운 개새끼답게 가서 낑낑거리기나 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이 루크의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그가 응접실을 나감과 동시에 고통에 찬 신음이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복도에는 여러 명의 사용인과 에릭이 대기하고 있었다. 분명 귀는 제대로 달려 있으니 응접실에서 간간이 삐져나오는 비명을 들었을 텐데도 누구 하나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벨리아르는 에릭이 건네주는 손수건을 받아 피를 닦아 내며 짧게 명령했다.

“대충 정리해서 보내.”

에릭의 눈짓에 사용인들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일인 듯 피로 엉망이 된 광경을 보고서도 그들은 태연하게 대처했다. 곳곳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 더러워진 카펫을 걷어내고, 두 사람의 상처를 간단하게 치료했다.

일사불란하게 응접실이 평소의 모습을 찾아가는 사이, 벨리아르와 에릭은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벨리아르는 손의 피를 닦아 낸 손수건을 보며 벨라를 떠올렸다. 여전히 그의 품속엔 그때 주운 손수건이 있었다.

에릭 역시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때마침 주제에 맞춰 질문했다.

“지하실에 두신 그 여자는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데려오실 때도 목숨이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계속 그곳에 두시면 아마 곧 죽을 겁니다.”

“상처가 많던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봤나?”

“저도 밖에서만 지켜보고 있던지라 안에서의 상황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여관에서 끌려 나올 때부터 상처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연행하는 과정에서 무력 제압이 있었나 봅니다.”

살결이 연한 건지 폭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던 가녀린 몸을 떠올렸다. 아마, 에릭의 말처럼 쉽게 죽진 않을 것이다.

그는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 여자에게선 익숙한 죽음의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부터 영지 내에 마녀가 숨어 산다는 말이 돌았는데, 이번에 그 여자에게로 화살이 쏠린 듯합니다. 사람들이 분노해서 돌을 던지더군요.”

문득 서류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편지 한 통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는 황가의 문장이 찍힌 봉인을 주저 없이 뜯어 냈다. 귀하신 막내 황녀의 친필 서신이었다.

“참 어리석지.”

그는 편지 안에 같이 들어있던 마른 꽃 한 송이를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황녀가 가장 모양이 예쁜 것으로 직접 고르고 골랐을 꽃은 그의 손안에서 가차 없이 바스러졌다.

벨리아르는 빠르게 편지의 내용을 훑어 내려갔다. 여느 때처럼 숙녀의 설렘과 쑥스러움이 듬뿍 담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일 뿐이었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대충 던져놓았다.

“기껏 잡아 온 건데 죽으면 곤란하지.”

* * *

어렴풋이 빗소리가 들렸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축축한 공기가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무거운 공기는 손끝을 까딱하는 사소한 움직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정신이 몽롱한 탓에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온통 새까만 어둠뿐인 걸 보니 여전히 눈이 감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느릿하게 한 번, 돌덩이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힘겹게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났다. 손끝에 전해지는 축축하고 진득한 촉감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여지지 않던 몸이 간헐적으로 말을 들었다. 어찌 보면 제 의지로 움직이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저 물이 고인 곳에 누워 있겠거니 했는데, 손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손을 따라 흘러내린 새빨간 피가 하얀색 원피스를 흠뻑 물들였다.

기괴한 광경에 당장 일어나 여길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그러나 또다시 몸이 묶인 듯 말을 듣지 않았다.

비릿한 피의 늪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매우 섬뜩하고 불쾌했다. 가슴을 옥죄는 공포가 점점 짙어졌다.

눈을 질끈 감아 보았지만 여전히 바뀌는 건 없었다. 점점 커지는 두려움의 크기에 따라 심장 박동도 같이 거세졌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으로 차갑게 젖은 손이 닿았다. 천천히 목을 죄어 오는 손길에 불안함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점점 숨쉬기가 빠듯해져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분명 아까는 없었는데, 눈앞의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살짝 푸른 빛을 띠는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

물기에 젖은 눈동자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여자는 애틋하게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목을 조르는 손길에 점점 힘을 더했다.

이 여자는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 그럼에도 섬뜩한 살기보다 이유 모를 슬픔이 더욱 크게 전해졌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도망쳐…….”

순간 목에 가해지는 압박이 너무 거세져 전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도 결국 죽을 거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어 가던 그때, 막혀 있던 목구멍이 뚫리며 눈이 번쩍 떠졌다.

“허억!”

꿈이었다.

크게 숨을 몰아쉬며 허겁지겁 목을 더듬었다. 꿈에서 느껴지던 감각과 통증은 안개처럼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거세게 뛰던 심장 소리만 잔상처럼 남아 있을 뿐. 정말, 단순히 꿈이었다.

그럼 그 생생했던 지하실도 다 꿈이었나?

아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자신이 그곳에 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묵직하게 주위를 맴돌던 기분 나쁜 공기가 아직도 살갗에 선연히 남아 있었다. 얼핏 처절한 비명이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벨라는 꾸었던 꿈을 되짚어 보다 문득 한쪽 발목이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단단한 무엇인가에 묶여 있는 듯한…….

“……이게 뭐야?”

푹신한 이불을 걷어 내고 나니 정말 이질적인 것이 발목에 감겨 있었다.

쇠사슬로 연결된 족쇄는 고급스러운 이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살짝 발을 움직이자 절그럭거리는 투박한 소리가 났다.

길게 이어진 쇠사슬을 눈길로 따라가니 아예 벽에 박혀 있었다. 어떤 짓을 해도 이걸 끊을 순 없어 보였다.

그제야 방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꽤 값비싸 보이는 것들투성이였다.

“여긴 대체…….”

발목에 묶인 족쇄만 아니었다면 그래도 제법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을 텐데. 나름 사슬의 길이가 긴 것을 위안 삼아야 하나. 방안은 충분히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저 문까지도 갈 수 있으려나.

생각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안정적으로 잦아들었던 호흡도 잠시, 벨라는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숨을 멈추었다.

그 남자였다. 역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남자는 품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손수건이었다.

그가 점점 가까워지자 벨라는 본능적으로 뒤로 슬금슬금 엉덩이를 뺐다. 그러나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발목에 감긴 족쇄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벨라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상처가 온전히 나은 건 아닌지 살짝 전해지는 통증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벨리아르는 느릿하지만 단호한 손길로 족쇄에 손수건을 덧대어 묶었다. 투박한 족쇄는 가려졌지만 그녀를 묶고 있는 사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슬은 그의 손에 있다. 남자는 퍽 다정한 미소를 내비쳤다.

“잘 어울리네.”

그녀는 살았음에 안도했고, 죽지 않았음에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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