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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6)화 (6/180)

6화

죽인다고 했던가. 당연히 죽이겠지.

이 남자는 그저 재미 삼아 자신을 놔준 것뿐이다. 살려 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걸 다시 붙잡히고 나서야 깨달았다.

하필 지금 제 앞에 나타난 것도 과연 우연일까.

“꽤 고단한 하루였나 봐. 꼴이 말이 아니네.”

다 죽어 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참 평온한 말투였다. 차가운 손끝이 그녀의 뺨을 지나 가녀린 턱선을 톡톡 건드렸다.

눈을 감으면 저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싶다가도, 남자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짧게 정신이 들었다.

이 남자 앞에선 마음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죽는 것조차도.

“저번처럼 살려 달라고 빌어 봐.”

“……죽일 거잖아요.”

“그래서, 죽여 달라고?”

어제만 해도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눈동자에 생기가 없었다. 벨리아르는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는 미치도록 죽이고 싶었건만, 막상 죽어 가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상당히 언짢다. 본능과 이성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느낌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는 적당한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그것이 결코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고, 쉽게 죽여 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감히 제 영역 안으로 발을 들였으니.

잡고 있던 머리채를 놓아주니 맥없이 쓰러지며 평온하게 눈이 감긴다. 마치 당장이라도 땅으로 스며들 듯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자꾸만 입안에서 맴도는 이름을 토해 내듯 내뱉었다.

“……벨라.”

나지막이 새어 나온 이름이 쓰러진 그녀 위로 덧새겨졌다. 급격히 기분이 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작게 욕지거리를 뱉은 그는 그녀를 안아 들고서 숲을 떠났다.

에릭은 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기사들이 마녀를 잡진 못했겠지만, 감히 공작령에 기사를 끌고 왔다가 인사도 없이 가 버리는 무례한 행동을 하진 않을 테니 곧 이곳으로 올 게 분명했다.

“응접실을 정돈해 놓도록. 그리고 방도 하나 준비해 둬.”

그의 명령에 사용인들이 분주히 흩어졌다.

조금 있으면 제 주인이 사냥을 마치고 돌아올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기사단보다 벨리아르가 먼저 성에 도착했다. 품에는 낯설지 않은 여인을 안고서.

역시 방이 필요할 듯싶다.

“오셨습니까.”

벨리아르가 가까이 다가오자 미세하게 여자의 숨소리가 들렸다.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정도의 옅은 숨,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생명은 위태롭게 꺼져 가고 있었다.

죽어도 상관없는 건지 죽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는 건지, 제 주인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기사단장 루크 아이솔루스가 뵙기를 청했습니다. 곧 해가 질 테니 그 전에 올 겁니다.”

“배짱도 좋군. 제 발로 여길 들어오겠다니.”

세간에 도는 소문대로 공작은 신전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막무가내로 영지 내의 신전을 허물어 버린 것 역시 사실이었다.

오직 교황과 신전을 위해 움직이는 페이트 기사단은 그 충성심이 대단했다. 그만큼 신에 대한 믿음 따위 개나 줘 버린 공작에게 절대 우호적일 리가 없었다.

사사건건 부딪치는데 그 꼴사나운 기사들을 데리고 또 성으로 오겠다니, 벨리아르는 대놓고 귀찮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냥 돌아가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보내주기엔 성에 차지 않았다. 벨리아르는 제 품에 안긴 채 죽은 듯이 잠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스스로 덫을 놓았다고는 하지만, 그 덫의 주인은 명백히 자신이어야 했다.

멋대로 제 땅에 쳐들어와 더러운 발자국을 남겼는데 그냥 보내주면 섭섭하지 않겠나.

“아니. 마땅히 직무를 수행하러 온 건데, 치하해야지. 손님 맞을 준비를 해. 포도주도 한 병 꺼내 오고.”

그는 벨라를 안은 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를 받아 들 준비를 하고 있던 에릭은 순간 당황했다.

당연히 제게 넘기고 방에 두라 명령할 줄 알았는데. 에릭은 한 박자 늦게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귀하게 모셔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최대한 공손히 대하려 애썼는데, 뒤이어 나온 제 주인의 한마디에 에릭은 또 한 번 혼란스러움을 겪어야 했다.

“지하로 갈 거야.”

숲에 들어가면 살 거라고는 했지만, 장담은 하지 못했다. 만약 제 주인이 살려 데려온다면 특별한 선택을 받은 만큼 사는 것이 당연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역시 장담하지 못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어쩌면 이 성의 사용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저 경로가 조금 특이했을 뿐.

여태까지 지하실로 가서 온전히 살아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정신을 똑바로 유지한 채, 온전히.

깊이 깔린 어둠 사이로 일정한 발소리가 울렸다. 창살로 빼곡한 지하는 음습한 분위기에 에릭조차 꺼리는 곳이었다. 짙게 피 냄새가 배어 있고 온갖 비명이 난무하는 곳.

벨리아르는 그녀를 안은 채 더욱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심해처럼 조금의 빛도 들지 않았다. 그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고 오로지 어둠만 존재하는 곳에 벨리아르는 그녀를 눕혀 놓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창백한 피부에 시선을 내렸다. 하얀 살결 위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천천히 쓸어내려 가는 그의 손길을 따라 몸 곳곳의 얼룩덜룩한 멍이 드러났다.

공들여 잡은 사냥감에 흉이 너무 많이 져 버렸다. 이리 피를 흘릴 거면 그건 제 손에 의한 거였어야 했는데. 다른 사람의 손에 제 물건이 망가져 버린 것 같아 매우 기분이 더러웠다.

벨리아르는 그녀를 홀로 둔 채 거대한 철문을 닫았다. 그는 절대 제 물건에 마음대로 손댄 사람을 그냥 보낼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그 분노를 담은 발걸음이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점차 빨라졌다.

* * *

벨리아르 공작과 기사단장이 마주 앉은 응접실 안은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 분위기의 주도권은 절대적으로 공작에게 있었다.

“각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기사단장의 물음에 공작은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만약 공작이 해를 당한다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페이트 기사단을 의심할 것이다.

“진정 내가 잘 지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나?”

“영지에 와서 각하께 인사를 드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워낙 급한 일이라 미처 보고드리지 못한 채 기사들을 대동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국의 안위를 위한 것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페이트 기사단을 통솔하는 루크 아이솔루스는 제법 상황 파악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아이솔루스 가문은 대대로 기사의 길을 걷는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공작의 비꼬는 말 한마디에 쉽게 흔들릴 심성이 아니었다.

“너그러운 마음이라……. 그래, 마땅히 그래야지. 그깟 마녀 하나 잡겠다고 내 영지를 마음껏 들쑤시고 다녔다는데, 너그럽게 용서해 줘야지. 그래서, 마녀는 잡았나?”

“……송구스럽게도 잡지 못했습니다.”

“성하께서 참 근심이 크시겠군. 마녀라고 불릴 뿐, 고작 계집애 하나 아닌가? 이리 단장까지 직접 거동했는데도 잡지 못하다니, 이런 불충이 있나. 페이트 기사단의 명성도 예전 같지 않나 보군.”

그는 사람의 마음을 잡고 뒤흔드는 것에 능했다. 루크의 얼굴이 노기로 살짝 붉어졌다.

차를 한 모금 넘기곤 짧게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며 벨리아르는 조용히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렇게 열렬히 충성심과 자긍심을 드러내니, 그건 참 좋은 약점이자 먹잇감이었다.

“하필 마녀가 성역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딱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혹시 각하께서 마녀와 마주치진 않았습니까?”

기사단장은 그에게 마녀와 손을 잡고 은신하는 것을 돕지 않았냐고 묻고 있었다. 그 뻔한 뜻을 모를 리 없는 공작이 차갑게 비웃었다.

다른 성역들과 달리 베른의 성역은 그 주위에 출입을 막는 기사들이 없었다. 자신의 영지 내에 교황의 손길이 뻗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공작의 강경한 자세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밀고 나오면 제국의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다만, 그 때문에 한 가지 소문이 피어났다.

벨리아르 공작의 깊은 숲에는 마녀가 잠들어 있다. 그 마녀가 깨어나면 예언대로 제국은 멸망할 것이다.

마치 공작이 반역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위험한 소문이었다. 그러나 벨리아르는 그 소문을 듣고 그저 웃을 뿐이었고, 황제의 귀에도 소문이 들어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깟 말로 빚어진 소문 하나는 그의 권세를 무너트릴 힘이 없었다. 물론, 벨리아르 공작가의 위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순간 그 소문은 칼이 되어 그를 찌르겠지만.

“오직 신만 닿을 수 있다는 성역인데, 경은 마치 내가 그곳에 드나든다고 말하는 것 같군. 칭찬으로 들어야 하는가?”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렇다면 저희 기사단이 당분간 영지에서 주둔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조금만 시간을 주신다면 꼭 마녀를 잡아…….”

탁――.

그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듯 찻잔이 거센소리를 내며 놓였다. 덕분에 기사단장의 말이 끊겼고, 벨리아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질문을 던졌다.

“끝까지 마녀를 쫓았던 자가 누구지?”

분명 평온한 말투였으나 어쩐지 다시 한번 기사단의 주둔 요청을 했다간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힐끗 공작의 표정을 살피니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미친 공작으로 소문이 자자한 사람 앞에서 고집을 내세울 필요는 없으니, 루크는 마녀를 쫓는 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한스를 떠올렸다. 게다가 한스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부관이기도 했다.

“한스 경입니다, 각하.”

“불안의 싹을 자르기 위해 고군분투했는데 내가 포상을 해야겠군. 들어오라고 해.”

곧이어 긴장으로 바짝 언 기사 한 명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벨리아르는 아까부터 쭉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포도주를 들었다. 고급스럽게 세공된 유리병을 본 기사는 절로 고개를 조아렸다.

“잔을 들게.”

“영, 영광입니다.”

잔을 든 손끝이 긴장과 두려움으로 범벅되어 참 애처롭게도 떨렸다.

정말 마녀를 쫓다가 곧바로 성에 온 것인지, 그의 손끝엔 미처 씻어 내지 못한 핏자국이 있었다. 그것을 본 벨리아르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피는 마녀의 것인가?”

기사는 한쪽 무릎을 꿇고서 잔을 든 손을 높이 받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살피지 못한 그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각하.”

충실히 마녀를 쫓은 흔적이니 자랑스러울 수밖에.

벨리아르는 천천히 포도주로 잔을 채워갔다. 이미 반이 채워졌음에도 병은 계속해서 기울어졌고, 그것은 잔이 가득 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잔의 상황을 보지 못한 한스는 조용했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루크는 점점 밀려오는 불안함에 몸을 달싹였다.

기어코 귀중한 포도주가 잔을 넘치고야 말았다. 새빨간 술이 피처럼 바닥에 흩뿌려졌다. 벨리아르가 차갑게 조소를 흘리며 포도주가 담긴 병을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이런. 자네의 부관은 마녀를 잡기 위해 열심히 훈련에 치중하느라 윗사람에 대한 예의는 배우지 못했나 보군. 감히 내가 따라주는 술을 이리 다 흘려 버리니.”

한스는 단박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드니 마주한 건 더욱 짙어진 핏빛 눈동자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찰나의 순간에 또 한 번 새빨간 액체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누구도 대처할 수 없이 빠르게 지나간 순간이었다.

벨리아르가 한스의 허리춤에 있던 칼을 빼 들어 그의 손목을 단칼에 잘라 냈다.

한스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른 채 멍청한 얼굴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방금까지만 해도 제대로 붙어 있었던 제 손을 찾아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굴러다니는 손을 보며 한스는 기겁하듯 숨을 몰아쉬었다. 미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놀란 건 기사단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찌나 간결하고 빠른 동작이었는지 말릴 겨를도 없었다. 아마 그가 한스의 자리에 있었더라도 막지 못했을 움직임이었다.

뒤늦게 소리쳤지만 그 속에는 저 나뒹구는 손목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알량한 마음이 요동쳤다.

벨리아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든 채 기사단장에게로 몸을 돌렸다.

“루크 경.”

방금 한스의 손목을 날려 버린 칼이 루크의 목으로 겨눠졌다. 그 동작이 참 부드럽고 깔끔해서 우아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벨리아르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영지에 이렇게 마음대로 기사들을 끌고 쳐들어와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그것은 각하께서……!”

루크는 이번에도 할 말을 다 하지 못했다. 목에 들어온 칼이 바짝 붙어 서늘하게 살결을 찢는데 어찌 혀가 움직일까.

일부러 고통을 주려는 듯 칼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덕분에 얕게 베인 상처가 너저분하게 벌어졌다. 덩달아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벨리아르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휘었다.

“그 책임을 물어 이번엔 네 목을 칠까? 난 그래도 될 것 같은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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