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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5)화 (5/180)

5화

어제까지, 아니 오늘 아침까지도 이 도시의 풍경이 참 궁금했었다.

여름에도 선선한 바람이 분다는 이 땅은 어떤 색을 품고 있을까.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 보는 일상은 어떠할까, 하얗게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처럼 따스하려나.

그렇다고 이렇게 훤히 보게 될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다. 찰나의 기회에 기뻐해야 하나, 곧 다가올 죽음에 슬퍼해야 하나.

기사들은 그녀의 눈을 가리지 않은 채 연행했다. 덕분에 몰려나온 사람들은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마녀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경멸의 시선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미 마녀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끌려가는 그녀를 가엾이 여기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낼 순 없었다. 예언의 탈을 쓰고 이 땅에 진득하게 스며든 소문이란 개인의 감정보다 훨씬 무겁고 거대했으니.

밧줄에 묶인 채 끌려가는 벨라의 눈동자엔 생기가 없었다. 자그맣게 싹트던 희망마저 짓밟힌 마음속에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다.

이대로 신전에 끌려가면 그 이후는 불 보듯 뻔했다. 마녀에겐 변론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테고, 즉결처분 대상이었다.

아마, 더러운 육신을 정화한답시고 산 채로 묶어 불에 태우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본능적인 두려움에 손끝이 떨렸다. 무거운 돌덩이가 앉은 듯 발이 움직이질 않아 제자리에 멈춰 섰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마녀는 다 잡아 죽여야 해.”

“가만두면 분명 예언대로 나라에 피바람을 몰고 올 거야.”

“얼른 불태워 버려!”

눈을 감아도 끝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서 괴로운 기억들이 꾸역꾸역 치솟았다.

흥분하며 소리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늘, 화형대에 묶인 어머니가 있었다. 기어코 그날의 어머니와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머릿속은 희미해졌다.

“뭐 하는 거야? 어서 움직여!”

뒤에서 떠미는 기사의 채근에도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주위가 술렁거렸다.

“뭐야, 마법 쓰려고 주문이라도 외우는 거 아니야?”

누군가 불안한 듯 내던진 한마디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욱 소란해졌다. 눈을 감은 와중에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자잘한 발소리가 선명했다. 그때, 갑자기 머리로 가해지는 충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는 그녀의 연한 피부를 찢어놓고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원인을 알고 나서야 뒤늦게 머리에서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사람들은 대부분 놀란 얼굴이었다. 개중 한 명이 분노에 찬 모습으로 소리쳤다.

“이 못된 마녀! 우리 시엔을 죽인 것도 네 짓이지!”

그 외침을 필두로 잠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홧홧하게 타올랐다. 기사들은 그녀를 보호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방관할 뿐이었다.

“맞아. 벌써 저 마녀 손에 죽은 사람이 둘이라고!”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 때문인지, 사람들의 말소리가 웅웅거리며 흩어졌다. 조금 어지러운 데다 입에선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움직여!”

거칠게 잡아끄는 기사의 손길에 몸이 맥없이 끌려갔다. 정신이 혼미하긴 한 건지 어디선가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정신을 놓아 버릴까 싶은 무렵, 다그닥거리는 말굽 소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사람들의 비명이 따갑게 귀를 찢고 뿌옇게 흩날리는 흙먼지가 그녀의 몸을 덮쳤다. 단단한 팔이 순식간에 그녀를 잡아채 말 위로 올렸다.

기사들도 미처 대응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지나간 순간이었다. 흙먼지가 조금 가라앉고 나서야 기사들은 마녀가 사라졌음을 눈치챘다.

“다, 당장 쫓아! 마녀에게 조력자가 있다! 둘 다 생포해!”

다급하게 소리치는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상황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와중에 웃음이 났다. 고작 기사들에게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지금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죽음보다 처절한 건 없지 않겠나, 그리 생각했다.

뒤에서 기사들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잡힐 것 같진 않았다. 조금씩 밀려오는 안도감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후드를 쓴 데다 복면까지 두르고 있어 겨우 눈만 보였다. 왠지, 나쁜 의도로 자신을 납치한 건 아닌 듯싶었다.

“저…….”

입술을 떼어 작게 소리 내 봤으나 반응이 없었다. 빠르게 말을 타고 달리는 중이라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혹여나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았다. 급변한 상황에 잠시 잊고 있었던 몸 곳곳의 통증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짧게 숨을 몰아쉬며 통증을 견디는 사이, 서서히 말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니 제법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바로 어제 도망쳐 나왔던, 그 숲 부근이었다. 남자가 자신을 구해 준 것이든 아니든 여기서 멈춰야 할 이유는 없었다.

길 한복판인 데다 눈앞의 숲은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 성역이었다. 물론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성역 치곤 경계가 너무도 허술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남자는 그녀를 말에서 내려주었다. 의아하게 쳐다보니 숲 쪽을 눈짓으로 가리킨다. 설마.

“……설마, 여기로 들어가라고요?”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도망쳐 나왔던 곳을 제 발로 다시 들어가라니.

차마 내키지 않아 멍하니 숲만 쳐다보았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 사이를 계속 보고 있으니 빨려 들어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남자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땅에서 미세한 울림이 느껴졌다. 남자 역시 뒤를 힐끗 쳐다보는 걸 보니 착각은 아닌 듯싶다. 그가 말의 고삐를 고쳐 잡으며 방향을 돌렸다.

이대로 가는 건가? 갑자기 나타나 기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채 가더니 이렇게 허무하게? 대체 무엇 때문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저것 물어보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남자는 등을 돌린 채 영영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을 떼며 말했다.

“기사들에게 잡히면 화형대에 올라 괴롭게 타 죽겠지만, 이곳으로 도망치면 살 수는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중얼거리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죽을 수도 있지만.”

혼잣말이면 머릿속으로만 생각해주면 좋으련만. 앞의 말들보다 작게 읊조린 뒷말이 제일 뇌리에 박혔다.

아마도, 어제 숲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 때문이겠지.

남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넬 새도 없이 단호히 자리를 떴다. 머리가 어지럽고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려 하는 와중에도 숲으로 들어가는 건 꺼려졌다.

저 멀리 자신을 쫓던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멀어 보일지라도 말을 탄 채 달려오고 있으니 고민할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그녀 역시 자신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 최선의 선택이란 없었다.

최악과 차악만 있을 뿐.

짧게 숨을 내쉰 벨라는 결국 숲으로 발을 디뎠다.

숲에서 풍겨 오는 청량한 내음이 마음속 불안감을 간질였다. 그만큼 어제의 기억이 나쁜 쪽으로 인상적이었다는 거다. 숲에서 안정감을 느끼던 그녀가 지금은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걸을수록 상태가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피인지 식은땀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숨은 자꾸만 가빠지고, 몸은 점점 무거워져 걷기조차 힘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기사들의 존재는 털끝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성역이라더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제 자신은 감히 성역에 발을 들인 마녀가 되었다는 소리도 된다.

신전이 또 한바탕 뒤집히겠네.

결국, 힘겹게 두어 걸음을 내딛던 그녀가 땅으로 풀썩 쓰러졌다. 코끝으로 짙게 스며드는 땅 내음이 자신을 다독이는 듯했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쉬라고.

이대로 눈꺼풀을 내린 채 잠들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지금 끈질기게 자신을 붙잡는 건 무엇일까.

낙엽을 짓이기며 다가오는 발소리에 감기려던 눈이 살짝 떠졌다. 힘겹게 고개를 드니 눈앞에 멈춰선 누군가의 발끝이 보였다.

그 남자일까?

불씨가 꺼져가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쪽 무릎을 굽혀 앉는 것을 보고선 확신했다.

그 남자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서늘한 밤공기 같던 목소리가 온몸을 내리눌렀다.

“다시 또 내 손에 잡히면…….”

남자는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자신을 보도록 만들었다. 남자의 눈을 보자마자, 벨라는 제 선택을 후회했다.

어찌 이것이 차악이라고 단정 지었을까. 과연 어떤 것이 최악일지는 아무도 모를 텐데. 이 남자는 결국 자신을 죽일 것이다.

남자는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입매를 따라 휘어지지 않는 눈동자는 여전히 살기를 담고 있었다.

원하던 것을 끝내 제 손에 얻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잔혹한 눈빛이었다. 인위적으로 매달려 있던 입가의 미소마저 한순간에 사라졌다.

“어떻게 한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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