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베른은 참 특이한 도시였다. 폐쇄적인 느낌이 강하면서도 국경 근처의 마을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비록 여관까지 오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마을 풍경을 자세히 살피진 못했지만, 아무래도 서늘한 날씨 탓에 더욱 그리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도 낯선 마을의 여관은 제법 아늑했다. 벨라는 침대에서 양 무릎을 끌어안은 채 어깨 위로 이불을 걸쳤다. 따끈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파묻으니 나른하게 잠이 쏟아졌다.
이제야 좀 꿈에서 깬 듯했다. 이곳까지의 긴 여정이 마치 희뿌연 연기처럼 몽롱했다.
북쪽 땅에 마법을 부리는 마녀가 산다고?
“마녀는 무슨……. 다 헛소리야.”
애초에 자신 역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영락없는 마녀의 모습일 텐데.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어쩌면, 그 소문의 마녀도 자신처럼 기사들에게 쫓기다 베른에 오게 된 것은 아닐까.
잠깐의 여유가 쓸데없는 생각을 몰고 왔다. 뒤이어 고요한 방 안으로 바깥의 소리가 아득히 전해졌다. 복도를 드나드는 상인들의 말소리,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마을 주민들의 일상.
숲속에서 지낼 땐 늘 자연의 소리뿐이었는데. 그러니까, 제 곁에 있었던 건 오로지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소리가 마음속으로 몽글하게 파고들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기분 좋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질투가 났다. 자신은 감히 가질 수 없는 그런 따뜻한 것들에 대해.
복잡한 기분이 싫어 생각을 털어 내려 도리질을 쳤다. 그러나 원체 생각이 많은 탓에 머릿속은 또 다른 상념으로 들어찼다. 잠시 벌어진 틈새로 귀신같이 낮의 일이 파고들었다.
숲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 붉게 일렁이던 눈동자를 떠올리자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그녀는 살짝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끌어 올려 꽉 붙들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그 남자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숲을 헤쳐 달리던 그때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심장이 세게 요동치며 떨치지 않는 공포가 목을 조였다.
똑똑.
그 순간 들리는 노크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입을 벙긋거리며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문이 열렸다.
무심코 들어온 사람을 보려던 벨라는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몸은 좀 괜찮아요? 저녁도 안 먹는 것 같길래 빵이라도 좀 갖다주려고.”
“……네, 괜찮아요.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곤란했다. 혼자 있는 방이라고 너무 마음 놓고 있었나 보다.
지금이라도 헝겊으로 눈을 가릴까…….
그런 행동이 더 의심을 살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뜩이나 후드도 쓰고 있지 않아 훤하게 드러난 은빛 머리칼마저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여관 주인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벨라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머리 색이 특이하네. 먼 곳에서 왔어요?”
역시나,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블루벨의 사람들은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이 그리 다양한 편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보통 갈색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눈동자 역시 갈색이거나 검은색, 아니면 아주 드물게 초록색이나 파란색이었다.
주인은 옅게 보랏빛이 도는 그녀의 은발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 시선이 불편했던 벨라는 그냥 지그시 눈을 감아 버렸다.
“네, 다른…… 나라에서요.”
외국인이라고 하면 그나마 쉽게 수긍할 테니. 일부러 억양이나 발음도 조금 흘렸다.
주인은 연신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는 그녀가 다소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핑계 삼아 들고 온 빵이 담긴 접시를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무슨 죄지었어? 얼굴 좀 들어봐요, 응?”
자꾸만 얼굴을 보려고 하길래 벨라는 아예 반대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처음엔 그저 주눅 든 마음뿐이었는데, 자꾸 가까이 다가오려 하니 조금 불쾌해진 탓이다.
“눈을 다쳤어요. 어차피 앞이 거의 안 보여서……. 이러고 있는 게 편해요. 이해해 주세요.”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새까만 시야 속에 주인아주머니의 표정이 훤히 그려졌다.
“어이구, 저런. 어린 아가씨가 어쩌다가……. 그래서 길을 잘못 들었다가 그리 고생을 했나 보네.”
귓가로 들리는 옅은 탄식 소리. 동정과 멸시가 섞인 눈빛이 제법 따가웠다. 그래도 덕분에 쏟아지던 관심은 좀 잦아든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 이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먼저 나가 달라고 뜻을 내비친 것이 예상 밖이었는지 주인은 당황한 듯 허둥지둥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찌 보면 투명한 사람이었다.
“그래요, 그래. 내가 너무 시간을 뺏었네. 오랜만에 젊은 처자를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랬어요. 그럼 편히 쉬어요.”
“네, 감사합니다.”
주인은 갑자기 들이닥친 것처럼 순식간에 방을 빠져나갔다. 불현듯 찾아온 고요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완전히 닫힌 문을 보며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친 것처럼 고단했다.
일단 사람들과 부딪힐 우려가 큰 마을 중심부로 들어왔으니 눈부터 가리고 있어야겠다. 또 이런 상황을 맞닥트리게 되면 지금보다 더 곤란해질 수 있으니 말이다.
벨라는 방 한쪽에 개어 둔 겉옷을 뒤적거렸다. 항상 눈을 가릴 때 쓰던 헝겊은 무난히 찾았으나, 생각지 못한 것이 제자리에 없었다.
부적같이 지니고 다니던 손수건.
유일하게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아주 소중한 물건이었다.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차분히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대체 어디에서 잃어버린 걸까.
기억을 되짚어 보다 어느 한 부분에서 불현듯 멈추었다. 붉은 입술 새로 곤란한 듯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그 잔혹한 남자와 마주쳤던 숲. 하필, 악마의 성역에 가장 소중한 걸 떨어트리고 온 모양이다. 벨라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수건을 찾아보려면 다시 그곳으로 가 봐야 할 텐데. 생각만으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난밤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눈을 감고 누우면 손수건을 어찌 찾아야 하나 싶은 걱정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도 꽤 고단한 하루였던지라, 어느 순간 잠은 들었나 보다. 창문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새어 들어오는 걸 보니 말이다.
부스스한 눈을 떠 창문 쪽을 바라보니 동이 트는 중인 듯했다. 쌀쌀한 아침 공기가 촉촉하게 피부로 와닿았다.
하룻밤으로 풀리기엔 턱도 없는 피곤함이 온몸을 내리눌렀지만 그녀는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태평하게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잘 여유 따윈 없었다. 기지개를 쭉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어젯밤 미처 결론 내지 못했던 고민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원래는 해가 뜨자마자 짐을 싸서 국경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잃어버린 손수건 때문에 단박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서기엔 고작 손수건일 뿐인 작은 천이 너무도 소중했다. 그것마저 없다면,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 따스함이란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일단 숲 입구까지만 가 보자.”
그 뒤는 가서 생각해 보자.
결국 반 쪼가리 결정을 내린 채 탁자에 올려 두었던 헝겊을 집어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머리카락을 까맣게 물들이고 눈이 안 보이는 척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 살면 어떨까.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나. 그냥 국경을 넘어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시작하면 될 것을.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평범한 삶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유일한 답이었다.
간단하게 채비한 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는데 바깥에서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웅성거리는 말소리와 여러 발소리가 혼잡하게 섞여 들려왔다. 평소보다 조금 더 소란스럽고 묵직하고, 기분 나쁜……. 게다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여기인가?”
나무 문 하나를 두고 바로 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벨라는 다급히 문부터 잠갔다.
주저 없이 문을 열려는 손길에 낡은 문이 여러 번 쿵쿵거렸다. 동시에 그녀의 심장 박동 역시 급격히 빨라졌다.
“문을 부숴!”
곧이어 문에 거센 충격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동요하는 문에 그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벨라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창문으로 뛰어갔다. 헝겊을 내리고 바깥쪽을 내려다보니 기사들이 여럿 서 있었다. 저기로 몸을 내던지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숲에서 마주쳤으면 여기저기 숨으며 도망가기라도 하지. 이건 뭐, 꼼짝없이 궁지에 몰린 쥐 신세였다. 어차피 여기 있어도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몰려오는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와중에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부서지고 말았다. 혹시나 기사들이 아니길 바랐지만, 험악한 기세로 밀고 들어오는 건 어김없이 기사들이었다.
갑옷에 새겨진 여신의 문장. 새삼스럽게도 저 여신이 정말 싫다.
벨라는 여차하면 바깥에 뛰어내릴 심산으로 창문 쪽에 바짝 등을 붙였다. 앞에 서 있던 기사가 그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이렇게 무식하게 쳐들어온 걸 보면 이유는 뻔할 테니 굳이 눈을 숨기려 하진 않았다.
기사는 세차게 노려보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려 확인이라도 하듯 눈을 마주 보았다. 남자의 눈에 경멸이 한가득 차올랐다.
“틀림없는, 마녀로군.”
그의 말 한마디에 주위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웃기지 않는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자신을 두고서 마법이라도 부릴까 두려워 저리 긴장하는 꼴이.
곧이어 누군가의 간절한 목소리가 침묵을 뚫었다.
“저, 저는 몰랐어요! 제가 저 마녀를 숨겨 주고 있었다면 이리로 안내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미, 믿어 주세요!”
어젯밤 그녀에게 호의의 손길을 내밀었던 여관 주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당장 일러바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그제야 기사들이 어찌 이리 빠르고 정확하게 자신이 있는 곳을 찾아냈는지 이해가 갔다.
여관 주인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기사 뒤로 몸을 숨겼다.
저런 반응을 보이니 정말 자신이 악의 축이라도 된 것 같아 씁쓸했다. 그저 태어난 대로 살아갔을 뿐인데.
순간 억울함이 솟구쳐 화에 불이 붙었다. 벨라는 제 턱을 쥔 기사의 손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으윽!”
기사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맥없이 바닥에 쓰러진 그녀에게로 무자비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이년이 어디서 감히!”
기사가 한참을 씩씩대며 그녀를 폭행하는 동안 그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기사들 사이로 등장하자 그제야 남자는 발길질을 멈추며 자세를 바로 했다.
“오셨습니까, 단장님!”
아주 마녀 하나 잡겠다고 기사단장까지 출동했나 보다. 그녀는 결국 터진 입술 사이로 허망하게 웃고 말았다.
“뭐 하고 있어? 얼른 포박하지 않고. 그렇게 태평하게 있다가 저 마녀가 무슨 술수라도 부리면 어쩌려고!”
기사단장이라는 남자가 다가와 그녀를 살폈다. 마치 사냥한 짐승이라도 훑어보는 듯한 눈빛에 벨라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럴 땐 차라리 마법을 부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진 않을 텐데.
남자는 바닥에 넘어져 있는 그녀에게 비웃음을 던지며 일어섰다.
“베른에 마녀가 숨어 산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이곳에 왔을 때 상상이나 했을까.
소문의 그 북쪽 마녀가 내가 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