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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3)화 (3/180)

3화

정신을 차렸을 땐 거짓말처럼 숲에서 빠져나온 뒤였다. 눈앞의 평지에 안도하며 뒤를 돌아보니 쫓아오는 남자는 없었다.

안 그래도 허름하던 옷은 여기저기 찢긴 데다 창백해진 안색 위로 식은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잠시 숨을 고르며 다시 숲 쪽을 돌아보았다. 기억 속에 선명한 그 남자를 만났던 것이 마치 꿈 같았다. 깨어난 뒤 심장이 쿵쿵 뛰어 대는 악몽.

그래, 차라리 꿈이라도 꿨다고 생각하는 게 더 현실적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머릿속 한구석엔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뒤늦게 발목의 통증이 느껴져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옷자락을 걷어 발목을 살펴보니 퉁퉁 부은 채였다.

“아야…….”

숲을 빠져나갈 땐 그리 힘차게 달려 놓고, 막상 상처를 확인하니 가만히 있을 때조차 욱신거렸다. 이래서는 마을까지 가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려면 눈도 가려야 하는데.

마차가 지나다니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뒤로 중년의 여성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기웃거리며 상태를 살펴보는 중에도 벨라는 눈치채지 못한 채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여자는 그녀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저, 괜찮아요?”

무심코 돌아봤다가 화들짝 놀란 그녀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네? 네, 네…….”

다행히 눈은 보지 못한 건지 여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옷차림을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아이고, 옷이 엉망이 됐네.”

그녀는 딱히 무어라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낯선 사람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움츠러드는 건 오랜 경험이 축적된 결과였다.

그러든 말든, 여자는 그녀 뒤편의 숲을 한 번 쳐다보더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설마, 저 숲에 들어간 거예요?”

그녀는 여자가 가리키는 숲을 힐끗 쳐다보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낮은 탄식이 이어졌다.

“세상에. 다른 지역에서 왔어요? 이 숲은 성역이라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에요.”

베른은 제국에서 유일하게 신전이 없는 곳이었다. 세간에 도는 소문으로는 그 유명한 벨리아르 공작이 현 교황과 엄청나게 앙숙이라 영지의 신전마저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 물론, 바깥의 이야기를 물어다 주는 이안의 입으로 전해 들은 소문이었다.

그런 도시에 성역이라니.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 아닌가.

“……몰랐어요.”

게다가, 베른에 마녀의 은신처가 있다면서 이 숲은 성역이라고? 정말 세간의 소문은 하나도 믿을 것이 못 된다.

“아무튼, 오늘 묵을 곳은 있어요?”

여자의 물음에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았다. 어스름해진 하늘에 더욱 쌀쌀해진 바람, 국경은커녕 코앞을 걷기에도 힘겨운 발목. 저도 모르게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별다른 대답이 없자 여자는 긍정으로 알아들었는지 그녀의 팔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일단 나랑 같이 가요. 마침 내가 마을에서 여관을 운영하거든요. 곧 해도 질 텐데 숙녀가 밤거리 돌아다니면 위험해요.”

건네주는 호의가 정말 고마웠지만 덥석 받으려니 묘한 불안감이 일었다.

이런 호의를 받아 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제 눈동자를 본 순간 공포에 질려 바뀔 태도 때문인지.

그렇다고 해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 호의를 거절한다 해도 어차피 마을로 가 숙소를 알아봐야 하고,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벨라는 실로 오랜만에 낯선 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 * *

에릭은 성으로 돌아온 주인을 보며 간결하게 예를 갖췄다.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성안에서 그를 맞이하는 건 보통 에릭 한 명이었다.

사용인들로 북적여야 할 커다란 성은 그의 차분한 발걸음 소리만 퍼트릴 뿐이었다. 에릭의 시선이 벨리아르의 손에 들린 총으로 향했다.

“물건은 어떻습니까?”

소문 많은 공작가에 유일하게 무기를 납품하는 헤론이 몇 달 전 직접 들고 찾아온 것이 바로 벨리아르의 손에 들린 ‘총’이었다.

기사들에게도 사용법을 익히도록 하라며 몇 자루를 더 들고 왔지만, 그에게 바친 것은 특별히 크리스털 장식이 덧붙여 있었다.

살상 무기라기엔 다소 호화스러운 총은 그다지 주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벨리아르는 총에 흘긋 눈길을 주고는 에릭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형편없어. 기사단에서 상용화하기엔 너무 성가신 점이 많아. 더 다듬어서 소수만 정예로 사용하도록 해야겠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 사용하기엔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많아 보였다.

그렇긴 해도 사냥용으로 쓰기엔 나쁘지 않았다. 본래 쓰던 활보다 파괴력이 셌고 그만큼 사냥의 성공률도 높았다.

사냥감의 가죽이 조금 더 상하긴 하지만 주로 몸집이 큰 짐승을 사냥하는 벨리아르에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헤론에게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사냥은 하셨습니까?”

에릭의 물음에 벨리아르는 숲에서 마주쳤던 발칙한 사냥감을 떠올렸다. 그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마음대로 쳐들어와 순진한 얼굴로 제집처럼 앉아 있던.

그는 로비를 가로지르며 제게서 벗어나기 위해 허겁지겁 숲을 헤쳐 가던 그 작고 가여운 뒷모습을 곱씹었다. 기억하고 상기할수록 미묘하고 불쾌한 감정이 치밀었다.

“잡았다가, 놓아줬어.”

“예? 놓아주었다고요? 그게 무슨…….”

놓아주었다는 소리에 에릭이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황당함에 차마 뒷말을 끝맺지 못하기도 했다.

벨리아르의 차가운 눈길이 닿자 그는 곧바로 입을 다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속에서는 아직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 상태였다.

제 주인은 한 번 잡은 사냥감을 절대 놓아준 적이 없었다. 하물며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냥감을 놓친 적도 없었는데, 이번엔 직접 놓아주었다니.

자비를 베풀었다는 말이 그리 좋은 징조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주인님, 대신전에서 보낸 전령이 와 있습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벨리아르를 향해 에릭은 잠깐 뒤로 밀어 두었던 화제를 꺼냈다. 마음 같아선 영영 뒤로 처박아 두고 싶지만, 상대는 교황이었다.

제국민들이 수군대길 이 땅에는 황권과 신권 말고도 또 하나의 위세 높은 권력이 있다고 했다.

북쪽 땅에 틀어박혀 조용히 지내고 있지만 절대 배제할 수 없는 가문, 벨리아르 공작가. 우스갯소리로 공권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벨리아르 공작은 황제와 교황을 적당히 무시하며 적당히 추대해 주었다. 오늘처럼 전령이 오면 적당히 대접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늘은 무시할 작정인 듯했다.

“그래? 그럼 이제 가라 그래.”

“성하께서 꼭 직접 전하고 오라는 말씀이 있답니다.”

“그럼 네가 듣고 나중에 나한테 전해.”

평소에도 대신전의 연락을 달갑게 여기진 않았지만 이렇게 전령을 아예 무시하는 건 드물었다. 이럴 땐 그냥 물러서는 게 최선이지만, 에릭은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뎌 보기로 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집무실을 열려던 벨리아르의 표정이 흠칫 구겨졌다. 뒤이어 짜증스런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상당한 분노가 쌓인 듯한 모습에 에릭은 조용히 한 발자국 물러섰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한 건지 그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건 그 여자뿐이었다.

너무 쉽게 놓아줬나? 쉬이 도망가지 못하게 발목이라도 부러트려 놓을 걸 그랬나.

총으로 그 여자를 쏴서 죽이는 상상을 해 봐도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럼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아무래도 간절한 얼굴로 제게서 달아나려는 그 모습이 매우 거슬렸다.

잡았어야 했나.

역시, 놓아주지 말았어야 했다. 한 번 찍은 사냥감을 놓아주는 건 심성에 맞지 않은 일인데 그리했으니 거슬리는 게 당연했다. 품 안의 구겨진 손수건이 그에게 답을 주었다.

벨리아르는 이 불편한 심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의했다. 그 여자를 죽이든 어찌하든, 일단은 다시 제 손안에 올려 두어야겠다고.

그렇게 결정하고 나니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했다. 벨리아르가 고개를 돌려 에릭에게 물었다.

“대신전에서 온 전령이라고 했나?”

변덕스러운 물음에도 에릭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살짝 고개 숙여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벨리아르가 발길을 돌려 응접실 쪽으로 향하자 조용히 뒤를 따르던 에릭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까 놓아주었다던 사냥감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워. 그래서 다시 잡으려고 해.”

원하던 답은 아니었지만 에릭은 충실한 심복답게 벨리아르의 말에 집중했다.

에릭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냥감은 털이 풍성하고 맹렬한 늑대거나 아니면 숲을 울릴 정도로 크게 포효하는 곰이었다.

무엇이든 제 주인이 아깝다고 말할 정도면 꽤 쓸 만한 가죽이 나왔을 텐데. 에릭은 나름 아쉬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빛깔이 고왔나 봅니다. 다시 잡아 오시면 털가죽을 벗겨 장식품을 제작해도 괜찮겠습니다. 아니면 정원에 박제해 놓을까요?”

박제라,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렇게 하면 눈동자가 빛을 잃을 테니 곤란했다.

살짝 물기를 머금어 햇빛에 반짝이던 보랏빛 눈동자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밤에 울리면 특히 아름답게 빛날 텐데.

“그럴 필요 없어. 이번엔, 눈동자가 탐났거든.”

에릭은 이번엔 짐승의 눈동자를 도려내어 보석처럼 세공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려면 제국 최고의 보석 세공사를 불러야 하는지도. 눈동자를 가공하는 기술자도 있던가?

제법 머릿속이 복잡하게 고민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응접실 앞에 다다랐다.

에릭은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문득 왜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는지가 떠올랐다. 고개를 돌려 주인을 보니 그는 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에릭에겐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주 조금 버릇없는 질문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근데 그거랑 갑자기 전령을 만나시겠다는 거랑 대체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그의 물음에 벨리아르의 입매가 비스듬히 휘어 올라갔다.

“덫을 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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