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남자에게선 명백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순간, 남자는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기리라는 것을. 작은 토끼를 무참히 살해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순 없으니 도망치는 시도라도 해야 하는데, 무언가에 꽁꽁 묶인 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남자는 총구를 살짝 내리곤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뭐 해. 안 도망쳐?”
이 땅의 바람처럼 서늘한 음색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남자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마땅히 두려움에 떨며 도망쳐야 할 사냥감이 주저앉아 있기만 하니 지루하다는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제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이러고 멍청하게 있을 게 아니라 당장 도망쳐야 한다.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던 저 손에 잡힌다면 아마 자비란 없을 것이다.
몸의 모든 감각이 당장 저 남자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소리쳤다. 벌벌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땅을 딛고 일어섰다. 주춤거리며 뒤를 돌아본 순간에 토끼의 사체가 보이며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그래도 앞을 보고 달려야 했다. 무엇이 발목에 매달리든, 저 남자에게서 기필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남자에 대한 두려움, 그의 시선이 닿는 등허리의 오싹함, 눈앞에 아른거리는 토끼의 모습.
가슴을 짓누르고 발을 무겁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힘겹게 끌어안은 채 미친 사람처럼 숲을 헤쳐 나갔다.
이렇게 열심히 달리는데 왜, 도대체 왜 저 남자는 멀어지지 않는 걸까.
그 서늘한 시선이 자꾸만 등 뒤로 따라붙었다. 목 끝까지 흐느낌이 차올랐으나 울음을 토해 낼 여유조차 없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남자가 다시 총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뒤이어 또 한 발의 숲을 울리는 커다란 총성이 울렸다. 총알이 어디로 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반사적으로 몸이 고꾸라졌다.
“으윽…….”
심장이 하도 쿵쿵 뛰어 대는 바람에 묻혀 있던 감각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자잘한 돌멩이며 뾰족한 나뭇가지에 쓸린 손바닥, 마구잡이로 숲을 헤치고 달린 탓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몸, 총알에 맞은 건지 돌부리에 세게 부딪힌 건지 화끈하고 둔탁한 통증이 느껴지는 발목.
남자가 다가오는지 마른 나뭇잎들이 발아래 바스러지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벨라는 가쁘게 차오른 숨을 깊게 토해 냈다. 이 꼴로 다시 도망갈 수는 없을 테니, 단념의 숨이었다.
남자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그녀의 상태를 보곤 짧게 혀를 찼다. 뒤이어 퍽 다정한 손길로 발갛게 부어오른 발목을 쥐었다.
“이런, 발목을 다쳤네.”
얼핏 가엾다는 듯 중얼거리는 어투에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살짝 발목을 빼내려 하는 순간 접질린 발목에 강한 통증이 가해졌다. 남자가 발목을 쥔 손에 바짝 힘을 준 탓이다.
“흐윽.”
남자는 우악스럽게 발목을 쥔 채 그녀의 반응을 살피듯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다간 발목이 부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아 두려움이 일었다. 점점 거세지는 통증에 겨우 입을 떼 자그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놔, 놔주세요. 아파요.”
벌어지는 입술이며 애처로운 목소리며, 모든 것이 가엾게 떨어 댔다.
겨우 용기 내어 한 말에 무자비한 폭력이 뒤따르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발목을 쥐고 있던 손이 거둬졌다. 대신, 이번엔 턱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사람의 눈을 이렇게 마주 본 적이 언제더라.
기억의 시작부터 되짚어 보지만, 떠오르는 건 눈을 마주치면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경멸하거나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시선뿐이었다.
생경한 경험에 보랏빛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헤맸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다시 말을 꺼냈다.
“외지인인가? 겁도 없이 여길 들어와서 마음대로 헤집고 다닌 걸 보면.”
말투에서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사유지인 줄 알았다면 절대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시선을 내리깔다가 남자의 옆에 놓인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흠칫 몸이 굳어졌다.
사람들은 저 잔혹한 쇠붙이를 ‘총’이라고 불렀다. 어느 순간 악마의 마법처럼 나타나 무엇이든 무참히 숨통을 끊어 버리는 물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인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제발 살려 주세요. 다신 오지 않을게요.”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횡설수설했지만 한 치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런 무자비한 사냥꾼의 숲엔 절대, 절대로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설핏 웃었다. 이 상황에 웃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벨라는 제 눈을 의심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믿고 싶기도 했다. 살짝 휘어지는 짙은 핏빛의 눈동자가 지독히도 아름다웠기에.
“살려 줘?”
짧은 물음에 벨라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살려 주세요.”
직전에 본 미소 때문인지, 어쩌면 자신을 살려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남자는 다시 물었고, 그녀는 다시 생각했다.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태껏 죽지 못해 살아왔으니.
자신이 살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지금 역시, 이 무자비한 남자의 손에 죽고 싶지 않았다.
“……네, 살고 싶어요.”
“내가 널 살려 주면, 넌 나한테 뭘 줄 수 있지?”
그녀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쯤 되더라.
벨라는 자연스레 제 생명의 대가로 돈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주머니에 든 것은 고작 은화 몇 닢뿐이고 당연히 모아 둔 재산도 없었다.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남자는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천천히 그녀의 행색을 훑었다.
“돈? 설마 지금 나한테 널 살려 주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는 건가?”
아무리 바닥에 엎어져 흙먼지가 묻었다지만 옷은 원래부터 해질 대로 해져 비루한 상태였다. 그에 비해 눈앞의 남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제야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사냥꾼이라면 절대 이런 옷을 입고 사냥을 나오지 않을 텐데. 뒤이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잇따랐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돈은 아니라는 것.
벨라는 자신의 어리석은 물음을 후회했다. 남자는 그녀의 턱을 바짝 잡아당기며 입매를 비틀었다.
“발칙하네.”
내내 턱을 붙잡고 있던 손이 거둬졌다. 잡혀 있을 땐 몰랐는데 제법 세게 쥐었던지 턱이 조금 아렸다.
남자는 일어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높이가 달라지니 남자의 체구가 얼마나 큰지 확연히 느껴졌다. 거센 위압감이 묵직하게 몸을 내리눌렀다.
그는 바닥에 놓아두었던 총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벨라의 어깨가 단박에 굳어졌다. 작은 머리통 위로 짧은 명령이 떨어졌다.
“일어서.”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일어서는 데에도 꽤 애를 먹었다. 제대로 발을 딛고 일어서려 애쓰는 동안에도 머릿속엔 이후에 일어날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 가거나,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팔려 가거나, 신전에 고발되어 기사들에게 잡혀가 불에 타 죽거나.
어느 쪽으로 가든 처참한 결과뿐이었다. 그녀가 일어서기 무섭게 남자는 또다시 명령했다.
“뒤돌아.”
지금은 딱히 그를 거역할 수도 없었다. 벨라는 다가올 미래를 체념한 채 뒤를 돌았다.
남자의 행동이 보이지 않으니 불안감은 더욱 거세졌다. 두려움을 잊어 보려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감싸 쥐었다. 생각지 못한 손길에 작은 몸이 크게 흠칫거렸다.
귓가로 숨결이 전해질 만큼 남자는 가까이 다가왔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도망쳐.”
무슨 의미일까. 정말 도망치게 해 주려는 걸까, 아니면…….
남자는 이미 한번 그녀에게 도망칠 기회를 주었었다. 비록 정신없이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며 지루한 듯 허공으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이번엔 정말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할 거야. 다시 또 내 손에 잡히면…….”
죽여야지.
그는 입안에 맴도는 말을 삼킨 채 그녀의 등을 툭 밀었다.
“뛰어.”
이번에도 그저 유희 삼아 던진 장난일 수 있겠지만 힘없는 자에겐 간절한 기회였다.
그녀는 걸어왔던 길을 따라 필사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남자의 환영을 떨쳐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한번 머릿속에 각인된 붉은 눈동자는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남자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서 놓아주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작은 체구의 여자를 보며 나른하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차가운 바람에도 휩쓸려 가지 않는 손안의 온기가 낯설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살려 달라고 빌던 모습이 선명하게 맴돌았다.
문득 시선을 내린 곳엔 여자의 흔적이 있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지닌 손수건이 어리석게도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딱히 고민 없이 집어 든 손수건은 그의 마음속 파묻혀 있던 작은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Bella’
떠올리고 싶지 않으면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세상 곳곳을 뒤지면 수백 명은 나올 그 이름이 참 지독히도 그를 괴롭혀 댔다.
벨리아르는 손수건에 새겨진 이름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자신을 한없이 잔혹하게 만들고 한없이 약하게 만드는 것.
그의 손안에서 천 쪼가리가 맥없이 구겨졌다.
“오랜만에 자비를 좀 베풀어 보려고 했더니.”
잔인한 우연 앞에서 비틀린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