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오늘 벨리아르 공작이 헤버튼을 지난대.”
낮에 이안이 전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헤버튼은 수도에서 살짝 떨어진 한적한 도시였다. 그런 도시의 외곽 길이 구경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정말 그 공작님이 이 길을 지나간단 말이야?”
“곧 지나갈 때가 되었는데…….”
“어, 저기 온다, 저기!”
소란스럽게 들뜬 사람들 너머로 후드를 깊게 눌러쓴 벨라가 걸음을 멈췄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녀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본능적인 호기심이 앞선 탓이다.
“세상에, 기사가 몇 명이야. 황제 폐하 행렬보다 더 규모가 큰 것 같아.”
“……사실상 이 나라의 실질적인 황제는 벨리아르 공작 아니야?”
“얘, 무슨 그런 말을! 너 그러다가 큰일 나.”
“내가 틀린 말 했어? 황제가 벨리아르 공작의 허수아비라는 말은 지나가던 똥개도 알겠다.”
“……하긴. 두 분이 독대할 땐 황제 폐하께서 공작님 발아래에 바짝 엎드린다더라.”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늘 소문이 뒤따랐다.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소문의 주인공인 그녀 역시 돌고 도는 소문에 귀가 열리니, 자신을 질타하는 사람들을 탓할 자격이 없었다.
벨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다시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걸음 하려는 찰나, 또 하나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인가 봐. 벌써 이백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저렇게 젊음을 유지하다니…….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야. 분명 마녀가…….”
말소리에 집중해 귀를 기울이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부드럽게 웃는 이안이 있었다.
“벨라.”
“……이안.”
“저기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에 있으라니까.”
벨라는 저 멀리 보이는 공작의 행렬로 눈길을 주었다. 기세등등하게 펄럭이는 공작가의 문장, 수많은 사람이 따르는 화려한 마차, 그 안에 있는 고귀한 단 한 사람. 그녀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검은 마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런 거 처음 봐서.”
“조금 보다 갈래?”
“……아냐. 숲으로 돌아가자.”
벨라는 미련 없이 숲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계속 보고 있자니 쓸데없는 욕심이 싹텄다.
적막한 깊은 숲으로 들어오자 편안함에 몸이 풀렸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심적으로는 더 편했다. 벨라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이안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이안. 혹시 베른에 가 본 적 있어?”
“베른? 거긴 제국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잖아. 그리 먼 곳까지는 안 가 봤지. 근데 갑자기 베른은 왜?”
“아…… 그냥.”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사람들이 하는 얘길 들었는데, 베른에 마녀가 숨어 산대. 마법도 쓴다던데?”
마법이라니.
땔감을 정리하던 이안은 어이없는 듯 웃었다.
“그런 소린 또 언제 들었대?”
벨라가 “그치, 말도 안 되는 소문이지?” 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활짝 웃으면 더욱 예쁠 텐데.
이안은 외로움과 슬픔에 잠겨 반짝이는 벨라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야말로 신비로운 마법과 같았다.
사람들은 오로지 저 눈동자 때문에 그녀를 배척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피어났을 작은 소문은 마치 예언처럼 변질되어 온 나라에 깊이 뿌리내렸다.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마녀가 막강한 힘으로 제국을 세웠지만, 결국 그 힘으로 제국을 멸할 것이라는.
듣고 싶은 대로만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결국 마녀에 대한 경외보다 공포와 불안이 더욱 크게 자리 잡았다. 그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깊은 숲에 홀로 살아가는 이유였다.
“벨라.”
“응?”
“나중에 나랑 같이 베른에 가 볼래?”
“그 먼 곳까지?”
“응, 내가 꼭 데리고 갈게.”
벨라는 이안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서 걷는 상상을 해 보았다. 역시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 보였다. 벨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벨라, 있잖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이안을 보며 벨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뭔데 그리 뜸을 들여?”
“……내일 밤에 나랑 만나 줄 수 있어?”
“오늘 밤에도 만나고 있잖아.”
“응, 근데 내일 밤엔 꼭 만나야 해.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주고 싶은 것도 있고, 할 말도 있고……. 아무튼 많아.”
“그래, 그러자.”
그녀의 허락에 이안은 주머니 속에 있는 펜던트를 꼬옥 쥐었다. 부끄러움에 차일피일 미루던 고백이었지만, 내일은 기필코 마음을 전하기로 다짐했다.
다음 날, 해가 떨어지자마자 집을 나서려던 이안은 안으로 들어오던 어머니와 마주쳤다.
“이안, 지금 나가려고?”
“친구랑 잠깐 만나기로 해서요.”
평소라면 흔쾌히 다녀오라고 했을 리사 부인은 오늘따라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 큰 아들이니 걱정은 안 한다만……. 그래도 오늘은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되겠니? 그 친구 내일 만나도 되잖니.”
“오늘 꼭 전해 줘야 할 게 있어요.”
“마을 분위기가 영 별로야. 아까는 무장한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가지 뭐니.”
순간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기사들이요?”
“그래. 다행히 저 숲 쪽으로 가는 것 같긴 하던데. 그래도 오늘 밤은 좀 그러니까…….”
이안은 리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금방 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안! 얘!”
그는 다급히 숲을 향해 내달렸다. 자꾸만 좋지 않은 예감이 따라붙었으나 애써 떨쳐 냈다. 이미 여러 명이 지나간 숲의 흔적을 외면하는 것도 일이었다.
미친 듯이 기도하며 달려온 곳엔 애처로운 저항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벨라는 없었다.
“……벨라.”
이안은 그곳에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결국 마녀를 잡지 못해 주위 도시까지 수배령이 퍼졌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한동안 마녀 이야기로 소란스럽던 헤버튼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일상을 되찾았다.
인적 없는 깊은 숲속에 살던, 요정 같던 아이.
이안은 그 아이를 마음속에 소중히 품은 채 매일 예배당을 찾아가 여신께 벨라의 안녕을 빌었다. 그리고 동시에 여신을 원망했다.
거창한 고백도 아니었다. 그저 예쁜 펜던트 하나 건네주며, 좋아한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 소박한 행복 하나 전해 줄 생각이었는데, 벨라에겐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어찌 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나.
* * *
헤버튼에서 도망친 후 열흘 정도가 지났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보니 헤버튼에서의 기억이 점점 멀어졌다. 그래도 떠올려 보면 선명한 것들이 있었다.
달빛에 비쳐 반짝이던 호수와 그 위로 날아들던 반딧불이의 불빛, 그리고…… 기사들의 묵직한 발소리. 이안에게 제대로 인사도 전하지 못하고 헤버튼을 떠나야 했던 밤이었다.
비단 헤버튼뿐만이 아니라 어느 도시를 가건 뒤를 쫓는 기사들이 있었다. 기사들을 피해 위쪽으로 도망치다 보니, 결국 베른에까지 발이 닿았다. 여기서마저 도망가야 한다면, 국경을 넘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베른은 신전이 없는 유일한 도시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베른에 발을 들이자마자 신전 기사들의 자취가 말끔히 사라졌다.
분명 늦가을임에도 이 혹한의 땅엔 겨울 향이 그득했다. 아직 제대로 된 겨울이 오지 않았는데도 매서운 추위에 살이 떨렸다. 그제야 베른에 온 것이 실감 났다. 이런 식으로 오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이안…….”
나중에 꼭 베른에 같이 가자던, 그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그리움마저 자신에겐 사치였다.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조차 점점 버거워지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여유 따윈 없었다. 어쩌면, 이안과 그렇게 헤어지게 된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벨라는 헐겁게 흘러내린 후드를 다시 깊이 눌러썼다. 인적 없는 숲속이건만 습관처럼 눈을 내리깔고서 걸었다.
쉴 새 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자꾸만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해가 많이 기울어진 걸 보니 시간이 꽤 지났을 텐데 애타게 찾는 것은 도통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런 숲속엔 하나쯤은 있을 텐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벨라는 저 멀리 무언가를 발견하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깊은 숲속에 버려진 낡은 오두막이었다.
그녀가 찾던 것은 단순히 몸을 뉠 곳이었다. 임시로 묵기엔 동굴도 괜찮았고, 다 쓰러져가는 낡은 집도 좋았다.
해가 지기 전에 머물 곳을 찾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찾지 못한다면 마을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여태 했던 것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헝겊으로 눈을 가린 채 맹인 행세를 하며 여관에 묵어야겠지.
혹여 누군가에게 들킬까 마음 졸이며 말이다. 어차피 눈을 가리면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벨라는 지친 몸을 이끌고 오두막에 앉았다. 오랜 시간 걷다 보니 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지냈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생각보다 깨끗하네.”
한낮엔 볕이 잘 들어오는 곳인지 방안을 들여다봐도 곰팡이가 피어 있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곳이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이리 온.”
나무 뒤쪽에서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기웃거리는 작은 털북숭이 하나.
다정히 부르며 손짓하니 경계하면서도 조금씩 다가오는 새하얀 토끼 한 마리가 매서운 추위를 녹일 만큼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다.
사람을 잘 본 적이 없어서 오히려 경계하지 않는 걸까. 토끼는 신기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손에 몸을 비볐다.
추위에 얼어붙었던 손으로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자 그녀의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가 번졌다. 작은 동물은 따스한 햇살이었다.
“뭐 좀 먹었니? 이럴 줄 알았으면 먹을 걸 준비해 오는 건데…….”
시간에 쫓겨 급하게 숲으로 들어오느라 차마 먹을거리를 챙기지 못했다. 토끼에게 소중한 온기를 받았으니 저 역시 무엇이든 좀 주고 싶은데.
뭐든 해 줄 것이 없나 싶어 골똘히 생각하던 중,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동물일 수도 있겠지만 숲속에서 그런 기척이 들리는 것은 딱히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불안감에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저 멀리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보아하니 남자인데. 자세히 보니 무기를 들고 있다. 사냥꾼인가. 더욱 좋지 않은 예감이 몰려왔다.
“저기, 저는…….”
무언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얼어붙어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가 움직이자 무언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가 들고 있는 물건을 자주 접해 본 건 아니어서 자세히는 잘 모르지만, 지금 순간에 하나만은 확실했다.
언젠가 한번 신전의 기사단에 쫓길 때 느꼈던 공포. 쇳덩이의 작은 구멍이 자신을 향했을 때 보았던 반짝임.
“아……!”
잔인한 기억 속의 총구가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웅크렸다. 여기서 꼼짝없이 죽을 게 분명했다.
탕――!
귀를 찢는 단 한 발의 총성.
그러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떠 불안한 시선을 내리니 사랑스러운 온기를 건네주던 토끼가 한순간에 피로 물들어 있었다.
눈도 감지 못한 채 쓰러져 있는 토끼를 보자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분노일까, 두려움일까.
삽시간에 가빠진 숨을 내뱉자 새하얀 입김이 짙게 피어올랐다.
그동안 남자는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빠르게 지나간 행동들이었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건조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했다.
“당신……!”
남자와 눈을 마주하자 순간 말이 멎었다.
자신을 보던 사람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짙은 핏빛 눈동자에 얽히자마자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사람이 아니야.
그 역시 불안과 공포를 한가득 머금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붉게 일렁이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는 다시 총을 겨눴다.
이번엔 토끼가 아니라 그녀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