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3화
프러포즈에 앞서, 아무스는 엘 벨다르를 찾아갔다.
황제를 보좌하느라 바쁜 건지 엘은 영 성가신 눈치였다.
하지만 엘 말고는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질문이 있다. 엘.”
“바빠. 빨리 말해라.”
같이 있으면서 닮아 간 건지, 엘의 말투는 랏샤와 비슷했다.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나?”
“없다.”
“좀…… 생각을 하고 말을…….”
곤란한 걸 눈치챘는지 문서를 보고 있던 엘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엘과 눈이 마주친 아무스는 나름대로 간절한 신호를 보냈다.
솔레아에게는 언제나 먹히는 초롱초롱 눈빛이었다.
엘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같은 용에게는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엘의 시선이 다시 문서로 향했다.
하지만 다행히 아예 통하지 않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엘의 입이 열렸다.
“……메롱 해 봐.”
“……메롱.”
“소리 내지 말고 혀를 내밀어 보란 뜻이다. 인간들 곁에서 살았다면서 그것도 모르는가.”
그제야 아무스가 혀를 내밀었다.
“용으로 변해 봐라.”
“가지가지 시키는군.”
투덜거리면서도 아무스는 일단 엘이 시키는 대로 했다.
저보다 훨씬 오래 산 용이니 아는 게 더 많을 거란 판단 때문이었다.
“황제와 함께 일한 뒤론 말투도, 성격도 변한 것 같은데.”
“주인을 닮아 가는 거지.”
“자유를 찾은 거 아니었나?”
“내가 모시는 사람을 정하는 것도 내게 주어진 자유다.”
엘은 용이 된 아무스를 이리저리 살피곤 말했다.
“혀도 선분홍색으로 맑고, 비늘도 윤이 난다. 발톱도 빠진 것 없이 성하다. 당장 100년 안에 병사할 일은 없을 거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 아무스는 빠르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고맙다, 엘!”
“……그 인간한테 청혼할 건가 보지? 인간의 아비가 걱정하던데.”
“맞아. 매번 내 등을 내려치지만 그래도 나를 걱정하는 친절하고 착한.”
“아니. 딸의 결혼을 걱정하던데.”
“아…….”
아무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두 눈이 시무룩하게 처진 게 꼭 비 맞은 강아지 꼴이었다.
엘은 검은 용이 어리긴 어리군, 하고 생각하며 어색하게 말을 붙였다.
“인간들은 자손의 번영을 늘 걱정해. 그럴 수밖에 없다. 그이는 용을 사위로 맞게 될 거라곤 예상도 못 했을 테니 더욱 그렇겠지.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다.”
“엘, 만약 네가 결혼을 한다면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모시는 주인에게 청혼을 하게 된다면.”
부질없는 가정을 하는 게 제 장인과 닮았다.
“……이미 가족 같은데.”
“뭐라고?”
“아니다. 계속 말해라.”
엘이 손을 내젓자 아무스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어 말했다.
계속 종종거리는 게 꽤나 초조해 보였다.
“너도 장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장인이 호락호락하게 허락을 해 줄 리가 없잖아.”
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무슨 소리. 나는 단번에 허락받을 수 있다.”
“……나이 많다고 유세 떠네.”
“너도 네 주인과 똑 닮았군. 특히 그 교만한 말투가.”
“이렇게 말해도 사랑해 주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너완 달리 말이야.”
“결혼 허락도 못 받은 주제에.”
“거의 받았어, 거의. 아직 정식으로 청혼하지 않아서 그렇지. 너야말로 결혼은 꿈도 못 꾸지 않나? 황제와 용이라니.”
“내가 마음만 먹으면 랏샤와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다.”
“용과 인간 사이에선 애를 가지기도 힘들 텐데, 선황은 물론이고 국민들이 가만히 두고 볼 것 같나?”
“아, 너는 애를 가지고 싶어서 결혼하나 보지?”
“아니야. 황제니까 후손이 중요하잖나. 내가 너보단 낫지.”
“글쎄. 나은 구석이 없으니 결혼 반대당하고 낑낑 앓은 거 아닌가?”
두 용 사이의 기류가 묘하게 공격적으로 변했다.
한참 말없이 서로를 꼬나보던 둘은 동시에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엘은 선황이 있는 방으로 들이닥쳤고, 아무스는 디에르고가 있는 집무실 벽을 부수고 들어갔다.
“디에르고 장인! 결혼을 허락해 줘!”
“선황 전하. 결혼을 허락받으러 왔다.”
천둥 같은 두 용의 우렁찬 외침이 온 황궁을 뒤흔들었다.
두 개의 목소리가 뒤섞인 탓에 시끌벅적한 빨래터에서 이불을 빨고 있던 하인은 엉뚱한 소리를 해 댔다.
“디에르고의 장인이 선황 전하랑 결혼을 한다고 했어요, 방금?”
다른 하인들은 그의 머리를 빨랫방망이로 마구 치며 빨래나 똑바로 하라고 화를 냈다.
“억! 아야! 악!”
하인 핌은 얼이 빠진 채로 빨랫방망이에 얻어맞았다.
비록 맞고 있진 않았지만 디에르고의 반응 역시 핌과 비슷했다.
“아니, 뭐, 뭐? 아니, 어, 허락한다고는 했지. 했는데 벽을 부숴? 이게 다 국세인데 이 자식이.”
“디에르고. 지금 허락해라!”
“지금?”
“지금 허락해라! 빨리! 솔레아랑 결혼하러 가야겠다! 내가 놈보다 빨리 결혼할 거니까!”
“아무스. 누구와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을 상대로 자존심을 세우는 게 썩 보기 좋진 않구나. 그리고 결혼이 얼마나 큰일인데 이렇게 다짜고짜 들이닥쳐서…….”
“엘, 그 나보다 나이 많은 용이 나보고 결혼 못 할 거라고 비웃었다!”
“……폐하의 용이? 지는…… 결혼할 수 있다니?”
“그래서 나도 비웃어 줬지. 그런데 자신하더군. 황제 인간과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다고 말이야.”
지기 싫어하는 디에르고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딸의 인생이 걸려 있는데 고작 이런 자존심 싸움에 끼면 안 되지만, 안 되지만…….
우리 아무스 놀리는 건 우리 가족만 하고 싶은, 그런 묘한 심리가 스멀스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디에르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가자! 아무스! 예식장부터 고르자고!”
“좋아! 친구! 아니, 장인!”
“장인에겐 존댓말을 써야지!”
“갑시다! 장인!”
“대륙에서 제일 큰 예식장을 잡아야지!”
아무스가 용으로 변해 장인을 등에 태웠다.
그리고 부서진 벽에 발을 올리고 힘차게 날아올랐다.
“가자! 용 사위!”
“그래! 인간 장인!”
한편, 선황은 겁에 질려 이불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나가, 나가 주시오. 나가시오. 제발.”
“선황. 나는 사위로 나쁘지 않은 상대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예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았던 터라 엘 벨다르는 아무스보단 존댓말에 능했다.
“랏샤를 누구보다 잘 보위할 수 있으며 나와의 국혼은 국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강대한 제르노아를 원하지 않습니까?”
“나는 모릅니다. 모르는 일이야.”
“그대의 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들오들 떠는 선황의 모습은 그가 한때 나라를 통치했던 황제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 열려 있던 방문 너머에서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누구와 결혼을 꿈꾸는 거지?”
엘은 예상했다는 듯 전혀 놀라지 않고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
랏샤가 서 있었다.
“만약 폐하께서 누군가와 결혼을 하신다면 그 상대가 저였으면 합니다.”
“가정부터가 틀렸잖아. ‘내가 결혼을 한다면.’ 그거 말이야.”
“폐하께서는 황제시니, 언젠가는 결혼을 하시게 될 겁니다. 그때 옆자리에 설 이가 누가 있습니까?”
“너는 내 옆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 인재다?”
“옆자리에 설 만한 인물인지는 폐하가 판단하셔야죠. 다만 제가 인재라는 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것 때문에 남의 아버지에게 추태를 부리는 건가?”
“인간들은 결혼할 때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선황 전하에게…….”
“성치도 않은 내 아비를 괴롭히면서 결혼 허락을 구하려 했다?”
“……죄송합니다.”
서슬 퍼런, 진짜로 퍼런 눈동자에 엘은 조용히 물러났다.
엘은 고개를 숙이고 선황에게 송구하다는 말을 올린 뒤 방을 나왔다.
방문을 닫으려 했지만 아까 들이닥칠 때 문고리가 고장 난 건지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던 엘은 순식간에 마법을 써 방문을 원래대로 고쳤다.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도 없는데도, 이상하게 주인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건 아무스나 저나 똑같았다.
앞서 복도를 걸어가던 랏샤가 나직하게 말했다.
“결혼이라…….”
“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글쎄. 나를 이길 만한 자라면.”
“……어떤 종목을 원하십니까. 저는 어지간해선 모든 내기에 능합니다.”
“술도?”
“예?”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짐승의 간인데. 하물며 수천 년을 산 늙은 간이 젊고 싱싱한 내 간보다 앞설까. 난 다행히 술 내기라면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고.”
“……술을 많이 안 드셔 보신 건 아닙니까?”
“자신 있나 보지?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티 안 나게 질 자신은 없습니다.”
“좋아. 술 내기로 하지.”
랏샤는 곧장 시녀들에게 지하 술 창고에서 술들을 있는 대로 가져오라 명했다.
“괜히 객기 부리시는 거 아닙니까? 저는 살아온 세월만큼 술이 셉니다.”
“그럼 내가 너 같은 늙은 금수랑 순순히 결혼할 줄 알았나?”
“제가 이기면 정말 결혼하는 겁니까?”
아무스가 하도 건방을 떨며 약을 올려 대 얼떨결에 선황의 방을 찾긴 했다.
하지만 랏샤와의 결혼을 이렇게 얼렁뚱땅 결정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애정은, 이렇게 엉킨 실타래를 싹둑싹둑 잘라 독에 퍼붓듯 내보이는 게 아니었다.
소중히 여기며 매듭 하나하나 눈에 담고 싶은, 그런 게 애정이고 사랑이었다.
그런 제 속마음을 알아챘는지 랏샤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건 승자가 결정하는 거지. 물론 내가 이길 테고 말이야.”
작은 티 파티를 열어도 될 정도로 커다란 테라스로 향한 랏샤는 여유롭게 의자에 앉으며 시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마시겠다.”
결코 선해 보이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강인하게 느껴졌다.
그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제 기억 속 누군가와는 확연히 달라서 엘은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몇 시간 후, 커다란 오크 통 열한 개가 바닥을 보였다.
“너. 지금. 꼬리가 밖으로 나왔잖아.”
“하하.”
말을 뚝뚝 끊어서 하는 걸 보니 랏샤는 이미 취한 것 같았다.
엘은 그녀를 내심 비웃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뒤돌았다. 제 눈에는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폐하가 취하신 게 분명했다.
“악!”
뒤돌아보니 랏샤가 옆통수를 감싸 쥐고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누가 폐하를 쳤습니까?!”
분노한 용의 음성이 테라스를 울렸다.
뒤쪽에서 콰광 하는 굉음이 들렸다. 엘은 빠르게 다시 뒤쪽을 돌아봤다. 이번엔 테라스 옆에 세워 둔 조각상이 부서져 있었다.
덩치가 어마어마한 이가 몰래 들어온 게 분명했다.
“폐하! 몸을 피하십시오. 아무래도 침입자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보통 배포가 아닙니다! 폐하가 이곳에 계신데 정면으로 들이닥치다니!”
시녀와 시종들은 해가 질 때까지 술을 마시는 두 사람의 객기에 질려 멀찍이 자리를 비킨 참이었다.
다시 말해, 랏샤를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폐하! 얼른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셔야 합니다!”
랏샤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쿵 소리가 나도록 쳤다.
언제나 예법을 벗어나진 않았던 랏샤치곤 퍽 과격한 행동이었다.
“네가! 꼬리를! 흔들잖아!”
“제가 꼬리를 쳤습니까? 폐하께?”
“그래! 뿔도. 나왔다고! 뿔이! 네 머리에! 뿔! 하, 시종들을 물리길 잘했지! 네 꼴을 좀 봐라!”
하지만 엘은 평소보다 더 위압적인 랏샤 때문에 제 꼴을 살필 겨를조차 없었다.
자세 때문인가?
랏샤는 두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발목을 꼬았다.
등받이에 완전히 몸을 기댄 랏샤는 소리를 지른 후 평온을 찾고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여 독주를 한 모금 또 들이켰다.
“황궁 부수지 말고. 너. 얌전히 있어라.”
“……예, 폐하.”
명령이니 따르자.
다른 누구도 아닌, 주인의 명령이니 따르자.
자유를 주고, 새 삶을 준 이의 말이니 따라야 한다.
엘 벨다르는 테라스 바닥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순한 사냥개처럼 랏샤를 올려다봤다.
“마셔. 아직. 안 끝났으니까.”
랏샤가 술잔을 내밀었다.
“예, 폐하.”
엘의 머리에 뿔이 돋고, 거대한 꼬리가 테라스를 가득 채웠다. 심지어 엘의 얼굴에도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둘은 대작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술상을 치우러 들어온 시녀들은 기함하고 말았다.
테라스가 거대한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박살이 나 있었다.
게다가 황제 폐하는 최근부터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 비서의 찢어진 옷으로 추정되는 거적때기를 머리에 베고 일자로 곧게 누워 주무시고 계셨다.
그리고 폐하의 비서는 벌을 서듯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올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실 한 오라기도 없이.
그 모든 일은 아침 일찍, 해장 수프를 먹는 폐하의 명령에 의해 비밀에 부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