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2화 (190/192)

외전 22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스는 제 몸이 어딘가로 옮겨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손 하나 깜짝할 수 없어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폭신한 침구가 부드럽게 몸을 감쌌다.

편하다, 라고 생각한 다음 순간 순식간에 온몸이 비닐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어, 용으로 변하는 건가.

우드드득 소리가 들리며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집 안에서 용으로 변해 벽을 부순 모양이었다. 스스로 변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아무스!”

솔레아가 소리를 지르며 저를 불렀다.

눈을 떠야 하는데.

이름을 부르면 눈을 뜨고, 찾아가기로, 안아 주기로 약속했는데.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두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웠다.

성장통을 겪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물가물한 의식 사이로 디에르고와 처형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내랑 결혼 못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됐다고? 그게 말이 돼?”

“몸에서 독은 발견 안 됐다며. 그럼 진짜 상사병인 거잖아.”

“캬. 우리 동생 멋지네. 이 큰 용을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쓰러뜨렸네.”

“그레이. 그래도 사람이 쓰러졌는데 흥미롭다는 듯이 말하면 안 되지.”

“용이잖아요.”

“지금은 사람이잖니.”

“어, 다시 용 됐다.”

“……용의 상사병은 원래 이 정도인가.”

바람 소리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걸 보아 하니 밖인 것 같았다.

힝. 야속하다. 친구.

자네는 역시 은발 놈이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아무스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아빠! 아픈 사람을 왜 밖에 두자고 하신 거예요!”

“하지만 아무스가 용으로 변신할 때마다 집을 부수잖니. 네가 몇 초에 한 번씩 수리하는 것보단 발작이 멎을 때까진 후원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랬단다.”

“그래도, 추울 텐데…….”

뜨거운 불꽃이 제 몸을 감쌌다.

따듯하긴 한데 뭔가…….

그레이가 말했다.

“산윤솔. 너 지금 죽은 용으로 통구이 바비큐 하는 미친 마법사 같아. 왜 불을 붙이고 그래?”

“이거 진짜 불 아니란 말이야! 왜, 왜 그런 말을 해! 불안하게! 우리 아무스 익는 거 아니야?!”

갑자기 몸이 차가워졌다.

“막내야! 그렇다고 아무스를 얼릴 필요는 없잖아!”

다급하게 솔레아를 말리는 티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난 지금 얼음 속에 있구나.

제 짝은 생각보다 마법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아무스가 살짝 웃어 보이자 헤이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었어! 얘 지금 웃었다고!”

“정신 드는 거 아니야?”

“얼음이 효과 있는 것 같아!”

“아가! 아무스를 다시 얼려 보렴! 열이 나니까 차가운 게 효과가 있었나 보구나!”

아니야, 그건 아니야.

아무스는 눈을 뜨고 고개라도 젓고 싶었지만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쩌면 산을 잃었을 때 수명을 많이 깎아 써 버려 남아 있는 수명이 다했는지도 모른다.

반쪽 용이니 다른 용들보다 수명이 짧을 수도 있다는 걸 왜 생각 못 했을까.

그리 생각하니 솔레아와 결혼 안 하길 잘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과부보다는 미혼이 낫지.

이번엔 내가 먼저 죽고 솔레아 혼자 남겠구나.

그럼 솔레아도 나만큼 아플까. 그러면 안 되는데.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다시 가슴이 아파 왔다.

“운다! 아무스 울어!”

디에르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빠! 소리 좀 지르지 마세요! 어떡, 어떡하지!”

또 몸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다.

정령들이 귓가에서 ‘아이고, 우리 주인 죽네!’ 하고 소리를 쳐 대 정신이 없었다.

“레아. 아가! 그만! 아무스가 상사병이 아니라 진짜 큰 병에 걸린 거면 어쩌니!”

“아버지가 결혼 반대했으면서.”

“결혼 좀 천천히 생각해 보자는 말에 이렇게 앓아누울 줄 알았나!”

“대놓고 말하면 누구라도 상처받아요.”

“맞아. 아빠가 심했네.”

“아버지……가 심하셨습니다.”

“너희는 진짜…….”

베르고 가족들이 아웅다웅하는 건 듣기만 해도 재미있었다.

사이좋은 가족이구나, 싶었다.

제 아버지가 인간인 어머니를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도 가족들과 저렇게 살았을까, 하는 의미 없는 상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아무스는 짧은 꿈을 꿨다.

어릴 적 함께 놀았던 작은 동산 위에서 산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소소한 잡담을 나누던 산의 얼굴이 지윤이로 변했고, 또 금세 솔레아로 바뀌었다.

아무스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을 들어 솔레아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며 장난쳤다.

붉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두 사람만의 세상에 젖어 들어가고 있는 그때 멀리서 끔찍한 고성이 들려왔다.

“제물이 필요해!”

“그래! 그 망할 흉물 년이 원흉인 게 분명하니 그걸 바치자고!”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는 자들의 목소리였다.

산이 살던 ‘로 마하탐’ 마을의 주민들이었다.

아무스가 몸을 일으켜 용으로 변했다.

비늘을 바짝 세우고 날개를 활짝 펼치려던 찰나, 익숙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고 가족들이었다.

디에르고와 티온은 검을 꺼내 들고 주민들을 막아섰다.

“우리 딸이 뭘 잘못했다고 그러는가! 이 멍청한 것들!”

“막내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면 죽일 거다. 모조리.”

헤이먼과 그레이도 동산을 빠르게 뛰어 올라왔다.

“레아, 안 다쳤어? 놀랐지?”

“산윤솔! 야! 이런 일이 있었으면 우리한테 말을 했어야지! 가만있어 봐, 저것들을 확 그냥!”

다행이었다.

이젠 솔레아의 곁에 저 말고도 그녀를 지켜 줄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스는 잔잔하게 웃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젠 솔레아 곁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아도 됐다.

가족이 생겨서 정말 다행이야, 산. 네가 그렇게 바라던 미래가 드디어 온 거야.

더없이 충만한 행복이 아무스를 감싸 안았다.

그대로 꿈이 끝나려는데 디에르고가 아무스를 불렀다.

“아무스! 어디 가나!”

“뭐?”

“우리 딸만 두고 어딜 가냔 말이야!”

“난…… 그냥, 이젠 산에게 가족이 생겼으니까…….”

티온이 성난 얼굴로 척척 걸어오더니 용이 된 아무스의 거대한 뿔을 한 손으로 잡고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불곰 처형 이렇게 힘이 좋았단 말이야?

마수들을 사랑으로 길들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당황한 아무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티온은 아무스의 노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평소의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막내에게 가족이 생겼는데 넌 어디 가냐고.”

“난…….”

솔레아가 환하게 웃으면서 아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한텐 네가 필요해, 아무스. 너도 잘 알잖아.”

인간으로 변한 아무스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 솔레아가 아무스의 품으로 천천히 안겨 들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널 사랑하는 걸, 알고 있잖아.”

눈이 번쩍 뜨였다.

갈기갈기 찢겨져 있던 심장이 다시 한 군데로 모이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무스!”

“아빠! 나와보세요! 아무스 눈 떴어요!”

“야, 너 괜찮아?!”

후원 한가운데에서 눈을 뜬 아무스는 저를 둘러싼 베르고 가족들을 바라봤다.

다들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솔레아의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고, 다른 처형들도 평소보다는 초췌한 낯이었다.

저택에서 달려 나오는 공작 역시 늘 보던 깔끔히 넘긴 머리 스타일이 아니었다. 머리를 제대로 정돈하지 못하고 대충 넘긴 부스스한 꼴이었다.

“왜, 왜 다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스는 몸을 일으키며 제 몸을 덮고 있는 커다란 이불을 발견했다.

적어도 이불 아홉 개는 합친 것 같은, 거대한 이불이었다.

“이, 이게…… 뭐야?”

“네가 일주일 내내 용이었다가, 인간이었다 하면서 마구잡이로 변했거든. 옷을 자꾸 찢어 먹어서 그냥 이불로 덮어 뒀어.”

“아…….”

헤이먼의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목소리가 듣기 싫게 갈라지자 정령들이 공중에서 물방울을 만들어 내 아무스의 입 안으로 처넣었다.

“흐앙! 주인님! 죽는 줄 알았어요! 물 드세요!”

“웁!”

커다란 물방울들이 목구멍 안으로 마구 들어왔다.

일단 그것들을 삼키고 있는데 헐레벌떡 달려온 공작이 커다란 손을 휘둘러 아무스의 등짝을 휘갈겼다.

짝, 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이놈 자식!”

“아야…….”

“아빠! 아무스를 왜 때려요!”

솔레아가 펄쩍 뛰며 말렸지만 디에르고의 표정은 여전히 매서웠다.

“결혼 안 시켜 준다고 했다고 단식 투쟁도 아니고! 자리보전하면서 드러누워?! 사람 걱정시키는 방법도 가지가지지! 이놈 자식! 이 불효자 놈! 못 일어나는 줄 알았네! 에라이, 이 자식!”

“아빠! 아무스 머리를 왜 쥐어박아요!”

“몇 년을 부대끼면서 살았는데 아주 그냥, 어?! 지 걱정은 안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빠아악! 그만 때려! 얘가 일부러 아팠어?”

“네 남편 될 사람이라고 벌써부터 감싸기는! 아무스가 결혼 안 시켜 준다고 앓아누운 거잖니!”

아무스가 멍하니 노란 눈을 깜빡이며 공작을 바라봤다.

“……디에르고. 솔레아랑 결혼해도 돼?”

“너 아니면 누구랑 해! 생각할 시간 좀 달라고 했다고 끙끙대다 앓아누워선!”

“공작이 왜 이렇게 화를 내지?”

이불을 잡고 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솔레아와 처형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입을 모아 아무스에게 대답했다.

“네가 아빠 걱정시켰잖아.”

“아…….”

인간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걱정시켰다는 이유만으로 화가 나기도 하는 건가.

공작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의술사도, 의사도, 심지어 수의사들도 불렀다. 다들 아픈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니 어찌나 속이 타던지……. 다른 용까지 불렀다! 이놈아!”

솔레아는 아무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이젠 엘 벨다르가 용인 거, 우리 가족들도 다 알아.”

“……비밀 아니었어?”

“아빠가 집 안에 환자가 있는데 어떻게 멀쩡히 출근을 하냐고 길길이 날뛰어서 폐하가 엘 벨다르에 대해 얘기해 주시고 그를 여기로 보내셨거든.”

“엘이 뭐라고 했길래……?”

“용족 중에는 가끔 마음의 병이 몸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대. 용들이 심약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너 내가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다고 한 게 그렇게 싫었어?”

“싫었다기보다는…….”

아무스는 솔레아의 눈치를 살피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말해 봐.”

헤이먼의 재촉에 아무스는 조금은 부끄러운 이유를 제 입으로 말해야 했다.

“네가 이미 완벽한 가족 속에 있어서, 나는 필요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솔레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끌어안았다.

“무슨 소리야. 네가 그랬잖아. 부족함 없이 행복할 때 널 선택해 달라고. 좀 더 자리 잡은 다음에 결혼하려고 했지. 일에 조금 더 여유가 생기…….”

이번엔 그레이가 솔레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웃기시네! 아무스 아프다고 일도 못 한 게 무슨 여유가 생기면 결혼을 해. 물 떠 놓고 지금 해라, 그냥!”

“아! 지도 일 하나도 못 해 놓고 나한테만 그러네! 이 오빠 새끼!”

“솔레아! 아빠 앞에서 오빠 새끼가 뭐니!”

이 와중에 티온이 흘러내린 아무스의 이불을 다시 꼼꼼하게 덮어 알몸을 가려 주며 말했다.

“나도 그렇고 다들 일주일 동안 일 못 했다, 아무스.”

베르고가가 명예를 되찾은 이후로는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런데 일주일이나 일을 못 했다니.

“……불곰 처형은 반대 안 해? 내가 가족이 돼도 돼?”

안 그래도 험악하게 생긴 불곰 처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아니면 누가 우리 가족이 된다는 거야?”

“그래. 사실 이미 가족이잖아.”

아무스의 귓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그의 시선이 제 옆에 주저앉아 있는 솔레아에게 향했다.

“산. 그럼 나랑 결.”

“안 돼!”

헤이먼이 달려들어 아무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동생한테 알몸으로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너 미쳤어?!”

“아.”

그런고로, 결혼 승낙은 받았지만 프러포즈는 뒤로 밀렸다.

아무스는 입이 막힌 채 한껏 미소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