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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1화 (189/192)

외전 21화

솔레아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결혼을 왜 하려고 해?”

“그, 그건…….”

“아사라 파울 때문에 그래? 해결됐잖아.”

그는 몬도시완 왕국으로 추방당했고, 자국에서 거세를 당한 뒤 지금 노역 중이다.

아무스가 힘을 썼으니 아마 124년을 채울 때까지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눈꼬리가 올라간 동그란 눈을 치켜뜬 제 짝에게는 아무런 악의도 없어 보였다.

그저 정말로, 결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스는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책상에 가까이 다가갔다.

“산은, 왜 결혼이 싫어?”

“지금도 같이 살고 있는데 굳이 그렇게 떠들썩한 허례허식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무엇보다 결혼식을 올리려면 비용이 많이 들어가잖아.”

이 장사꾼.

아무스는 속으로만 조용히 투덜거리며 냉큼 반박했다.

“은발, 아니, 디에르고에게는 돈이 많잖아. 그리고 솔리안 상단을 운영하며 벌어들인 돈도 많고. 산이 마법사 협회장 하면서 받는 돈도 있고…….”

“그렇지. 근데 난 남들보다 더 오래 살잖아. 노후 자금을 지금부터 차근히 모아 둬야지. 그리고 오빠들도 결혼해야 하니까.”

“이 큰 공작가에 오빠 셋 결혼시킬 돈도 없겠어?!”

“너 아직도 성질나면 소리 질러? 천 살 넘었는데 좀 의젓해져야지.”

산은 늘 이랬다.

좋은 말로 타이르고, 달랬다. 정신을 차려 보면 지는 쪽은 항상 저였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정말 지기 싫었다.

아무스는 솔레아와 제가 서로의 짝이라는 걸 세상에 공표하고 싶었다.

다시는 누구도 솔레아를 넘보지 못하도록.

“난 널…… 부인이라고 부르고 싶어.”

그제야 솔레아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아무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빙긋이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또?”

“응?”

“나랑 결혼하고 싶은 이유. 꼭 결혼해야 하는 이유가 또 뭐가 있어?”

이상했다.

오랜 세월을 사는 동안 많은 인간들을 보며 그들의 삶에 무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참 괴상하게도 그녀 앞에만 서면 헤츨링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떼를 쓰고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곁에 있어 달라고 매달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산은 또 떠나겠지.

좁은 동굴을 떠나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것처럼.

그리고 그땐…….

과거를 회상하던 아무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가 힘껏 움켜쥐고 말았다.

“아무스, 왜 그래? 어디 아파?”

솔레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제게 다가왔다.

아무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그녀를 안아 제 품에 가뒀다.

“장난친 거였어? 그런 장난은 치지 마. 놀랐잖아.”

“……아니야, 진짜 끔찍한 기억이 생각나서 그랬어. 네가 옆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안았어.”

아무스는 솔레아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흉터가 있었던 자리를 따라 그녀의 얼굴 위에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아무스가 입을 맞추는 자리마다 열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솔레아의 얼굴이 천천히 붉어졌다.

“잠깐. 그만해. 낮이잖아.”

“부부가 되면 낮에도 입을 맞출 수 있고, 밤에도 너랑 같이 잘 수 있잖아.”

“가족들 다 있는데 어떻게 동침을 해.”

“그럼 분가해도 돼. 물론 네가 싫다면 안 할 거지만.”

절대 과거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고 아무스는 결심했다.

솔레아가 하고픈 대로 하게 두되, 가고 싶은 곳으로 갈 때 그녀의 날개가 되어 줄 것이다.

절대 혼자 있지 않도록.

아무스는 그녀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 두 팔로 얇은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산일 때보다 더 크고, 단단해진 몸이 저항 없이 아무스에게 안겨 왔다.

아무스는 건강해져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솔레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함께 있자, 산. 지윤아. 솔레아. 나랑 함께 있어 줘.”

아무스가 말을 할 때마다 더운 숨이 솔레아의 하얀 살갗을 간질였다.

“알았어. 좀, 조금만 떨어져서 말해.”

“왜 결혼이 싫어? 왜……? 나랑은 싫은 거야? 그러면 포기할게. 지금 이 상태로 만족할게. 내가 싫어?”

“아냐, 그게 아니라…….”

망설이는 솔레아의 미운 입술을 물끄러미 보던 아무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도톰한 붉은 입술을 천천히 물었다.

몇 번이나 입을 맞췄는데도 여전히 떨리는지 솔레아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였다.

저에 비하면 작은 두 손으로 옷깃을 꼭 말아 쥐고 있는 것도 여전했다.

아무스는 그런 솔레아가 사랑스러워 설핏 웃고 말았다.

긴 눈이 곱게 접히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본인을 놀리고 있는 걸 알았는지 솔레아가 살짝 입술을 떼 내며 아까보단 날카로워진 말투로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왜 웃는 거, 읍.”

위로 올라간 솔레아의 눈꼬리를 엄지로 살살 쓸던 아무스는 제 안에 들끓는 정염을 잠재우지 못하고 솔레아에게 달려들었다.

아까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불을 꺼뜨릴 수 있는 방법이 그녀의 입 속에만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스는 그녀의 입 안을 훑었다.

솔레아의 작고 말랑한 혀는 그런 아무스를 몇 번 받아 주다가 지쳤는지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아무스는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한 손으론 허리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론 뒤통수를 단단하게 잡고서 애원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무스가 말할 때마다 뜨거운 숨이 솔레아의 촉촉한 입술에 닿았다.

애처롭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에 솔레아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두 팔로 아무스의 목을 둘러 안았다.

아무스는 신에게 숭배라도 하듯 신성한 손길로 솔레아의 머리카락에 입 맞췄다.

그의 입술이 밖으로 드러난 하얀 어깨부터 팔뚝, 손가락 끝까지 천천히 입 맞추며 내려갔다.

솔레아의 오른손 약지에는 디에르고가 선물한 베르고 가문의 문장이 찍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무스는 솔레아 약지 전체를 입 안에 넣고 천천히 혀를 굴려 반지를 빼냈다.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기묘한 감각에 솔레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스는 입을 벌려 제 혀 위에 놓인 동그란 반지를 보여 주고는 말했다.

“못된 짓 하려면 반지는 빼고 해야지. 결혼도 안 한 연인들이 할 만한 일은 아니니까.”

“……너, 너 갈수록 진짜…….”

잘 익은 체리처럼 붉어진 솔레아의 볼에 짧게 키스한 아무스는 반지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두 팔로 솔레아를 안아 올린 아무스는 제 눈앞에 있는 그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옷 위였지만 선명한 고동이 느껴졌다.

아무스는 솔레아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는 매 순간마다 황홀에 젖었다.

소파로 가 앉은 아무스는 제 다리 위에 앉아 있는 솔레아의 종아리를 천천히 매만지며 길게 키스했다.

짝의 몸이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아무스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아무스는 이를 악물고 차오르는 욕망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결혼도 안 했는데 이런 걸 할 순 없어.”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닌지 아무스는 솔레아를 어루만지던 두 손을 냉큼 떼 버렸다.

열감에 휩싸여 헐떡거리던 솔레아의 들뜬 눈동자가 빠르게 깜빡였다.

“뭐, 뭐라고?”

아무스는 솔레아의 허리를 붙잡아 안아 들고는 제 옆에 고이 내려 주었다.

“끝!”

“뭐, 이 자식아?! 사,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뭐?”

최근 마법사 협회장으로 일하며 고상하고 우아해졌던 솔레아가 다시 원래 성격으로 돌아왔다.

저 역시도 괴로웠지만 이거 말고는 솔레아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천 년이 넘게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 덕에 아무스는 그쪽 방면으로 꽤나 능통했다.

지금 솔레아의 온몸이 붉게 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손을 떼고 모른 척하는 게 죽기보다 더 힘들었지만, 죽었으면 죽었지 솔레아가 남의 것이 되는 건 절대 볼 수 없었다.

아무스는 미련 없는 척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혼하면 할 거야.”

“그걸 지금 협박이라고 해?”

“부부가 할 일을 결혼도 안 한 미혼의 남녀가 할 순 없지.”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보수적이었어?”

“나 원래 보수적이야. 천 살이 넘었는데 좀 의젓해져야지.”

솔레아가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아무스는 노란 눈을 예쁘게 접어 웃었다.

그리고 그는 책상 위에 올려 뒀던 가문의 문장 반지를 가져와 솔레아에게 직접 끼워주기까지 했다.

솔레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얄미운 제 용을 바라보다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무스. 난 지금 가족이 좋아. ……변하고 싶지 않아.”

아무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네가 언제부터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어? 내 산은 그렇지 않아.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야.”

아무스의 세로로 길게 갈라진 동공이 솔레아를 올곧게 바라봤다.

“그저 내가 너의 가족이 될 뿐이야.”

검은 용이 솔레아의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잘 길들여진 맹수 같은 몸짓이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네 가족이 되게 해 줘. 너와 같이 미래를 그리고 싶어.”

“……생각해 볼게.”

아쉬운 답이었지만 아무스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솔레아의 이마에 짧게 입 맞추고 말했다.

“그래. 그럼 그 전까진 부부가 하는 이런 스킨십은 하지 말자!”

“아, 진짜!”

아무스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이내 사라졌다.

후끈한 열감만 남기고 사라진 아무스 때문에 솔레아는 소파에 앉아 홀로 상기된 볼을 가라앉혀야 했다.

* * *

아무스는 정원 구석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가 팔을 베고 누웠다.

그러곤 밤늦도록 어떻게 하면 공작과 처형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기다리는 거라면 이골이 나 있지만 이왕이면 처형들도 젊고 생생할 때 솔레아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애처럼 조바심을 느끼는 스스로가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늘 산 앞에 서면 애가 되는 것 같았는걸.

바라는 거라곤 솔레아의 ‘가족’에 저도 속하는 것뿐이었다.

그래, 결혼을 공표해서 솔레아를 독차지하고 싶다는 유치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소망이었다.

나도 산의 가족이 되고 싶어.

그녀의 용이 아니라, 그녀의 하나뿐인 남편이 되고 싶었다.

근데 나랑 가족이 되는 걸 원하지 않으면 어쩌지.

‘결혼? 별로.’

‘난 지금 가족이 좋아. 변하고 싶지 않아.’

새삼 솔레아의 말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매 순간 그녀를 향한 열망이 심장 안에서 통통 튀어 다니는 것 같았다.

익숙해질 것 같으면서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온몸에 열이 돌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까부터 열이 나고 있었는데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 온몸 곳곳에서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성장통과 비슷한 감각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순식간에 손끝 발끝까지 퍼진 열감으로 인해 아무스는 나무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용으로 변했다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변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러지…….”

머리가 핑핑 돌았다.

멀리서 디에르고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스! 우리 아들들이랑 솔레아까지 대결을 겨룬 다음에 모두 자네가 이기면 결혼을 승낙, 아무스?”

“……친구. 나 아파.”

“왜, 왜?!”

“그냥, 솔레아랑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산이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아파…….”

누군가가 제게 독을 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디에르고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상사병인가?”

그게 뭐야, 친구.

묻지도 못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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