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화
아무스는 쉽사리 질투를 하지 않았다.
그런 너절한 감정을 가질 시간조차 아깝다고 여겼기에.
그리고 솔레아에게 조금이라도 애틋한 감정을 지녔던 이들은 금방 마음을 접곤 했다.
아무스와 솔레아가 함께 있는 모습을 몇 번 보여 주고, 정령들이 꿈속으로 들어가 짧은 악몽을 몇 번 보여 주면 충분했다.
하지만 아사라 파울은 아니었다.
타고나길 긍정적으로 태어난 놈인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아무스와 솔레아가 그 흔한 ‘약혼 서약’도 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솔레아에게 껄떡거렸다.
솔레아가 대놓고 거절하지 못하게 일부러 사람 많은 장소만 골라 가며.
게다가 공식적으로 꽃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앞으로 이런 놈이 또 없으리란 법은 없다.
비늘 끄트머리를 툭툭 잡아 뜯던 아무스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어린 시절에나 하던 짓을 다시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만큼이나 초조한 모양이었다.
산을 처음 만나던 때에 가지고 있던 습관이 되살아나다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물론 솔레아는 보통 인간보다 오래 살 것이고, 저 역시 용치고는 일찍 죽겠지만 꽤나 길게 살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지금도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걸 볼 때마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워 죽을 것 같은데.
달 옆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볼 때마다 솔레아와 함께할 내일을 꿈꾸는데.
아무스는 벌떡 일어나 인간으로 변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깔끔하고 정숙한 옷차림을 갖추고 디에르고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인간들의 결혼에는 반드시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했으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디에르고는 공작저 집무실에 없었다.
“공작은 어디 갔어?”
“공작님이요? 당연히 출근하셨죠. 아, 황궁으로요.”
집무실에서 서류들을 정리하던 라트엘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라트엘의 답을 들은 후 곧장 몸을 돌려 나가려던 아무스는 생각을 바꿨다.
“라트엘. 나 어때 보이지?”
“아무스 님이 제 이름을 제대로 부르신 게 처음 같지만 뭐, 그건 차치하고. 음……. 멀쩡해 보이시네요. 꽤나 인간적인 모습이시고.”
“장인에게 결혼 허락 받으러 가는 인간 같아 보여?”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갈 거면 선물을 들고 가셔야, 악! 뭐라고요?!”
라트엘이 너무 박진감 있게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밀려나다 못해 거의 날아갔다.
“이, 이거 누가 알아요?”
“아직은 보좌 인간밖에 몰라.”
“공, 공작님이 아시면…… 아니, 그 전에 도련님들이 아시면…… 아니, 그 전에 솔레아 아가씨는 허락하신 건가요? 지금 엄청 바쁘실 텐데.”
“산이 바쁘니까 결혼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해야겠군.”
“와, 추진력 봐.”
보좌 인간 라트엘이 순수하게 감탄할 때, 아무스는 다시 용으로 변해 황궁으로 날아갔다.
중요한 일이니 순서를 정해 차근차근 진행해야 했다.
1. 공작에게 먼저 언질 해 놓기.
2. 솔레아에게 청혼하기.
3.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결혼 허락 받기.
4. 약혼식은 생략하고 결혼식 성대하게 올리기.
5. 신혼여행 가기.
6. 끝내주는 첫날밤 보내기.
마지막 계획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온몸이 긴장돼 얼어붙을 것 같았다.
6번까지의 계획을 완벽하게 이루려면 일단 오늘 공작에게 슬쩍 말을 던져 놓는 것부터 성공해야 했다.
그러나 빠르게 실패했다.
“……조금 이르지 않나.”
“공작. 솔레아와 나는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를 기다려 오며…….”
“알지, 알아. 그런데 이제 음……. 지금이 많이 바쁜 때이기도 하고, 우리 베르고가 영주민들의 신임을 얻고, 귀족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아지는 시기니까 조금 더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핑계였다.
아무스는 공작의 두 눈에서 망설임을 읽었다.
친구인 줄 알았던 은발은 사실 친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령들 말대로 은발 놈이었다.
“자네가 진짜 내 친구라면 그렇게 모질게 말 못 해.”
“네가 내 친구면 내 딸이랑 결혼하면 안 되지! 나이 차이가 몇인데!”
“그렇게 따지면 솔레아가 검은 공간 안에서 몇 년이나 있었는지 알아?! 따지고 보면 산이랑 나랑 나이 차이 별로 안 나!”
“우리 윤솔이는 지금이 세 번째 삶이다! 너랑은 다르지, 이 용대가리 놈아!”
“산만 빼놓고 말하지 마! 이 은발 놈! 말이 심하군! 자네가 그러니까 정령들이 자네만 보면 이를 가는 거야!”
“하! 그래! 정령들도, 용도 싫어하는 나는 반댈세! 이 결혼 반대야!”
“솔레아는 아닐 테니 자네는 결혼식에 입을 연미복이나 준비하고 있지 그래!”
아무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는 황궁의 집무실 벽을 부수고 나갔다.
“이거 고치고 가!”
“싫다! 넌 장인 취급 안 할 테니 그런 줄 알아라!”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은 결혼은 불법이다, 아무스!”
“흥! 윤지윤 아빠는 다른 세계에 있는데 알 게 뭐냐!”
“뭐, 뭐야?! 지윤이도 솔레아도 다 내 딸이야!”
“욕심쟁이! 넌 이제 친구 아니다!”
아무스는 황궁 지붕을 뚫어 버릴 것처럼 위협적으로 날갯짓을 하다가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황제는 황궁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도 느긋하게 찾아와 디에르고에게 전말을 전해 들었다.
디에르고는 황제가 놀랄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꽤나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렇군. 엘, 고쳐.”
“예, 폐하.”
엘이라는 마법사 신하 역시 무감한 얼굴로 벽을 고쳤다.
엘은 빠르게 벽을 고친 후에도 자리를 비켜 주지 않고 황제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디에르고 공작이 잠깐 자리를 비켜 달라는 말을 한 후에야 황제를 바라봤다.
“내 작은아버지뻘이자 내 친구와 다름없는 분이니 어지간하면 말했을 때 한 번에 따르도록 해. 지금으로선 내게 손댈 수 있는 유일한 연장자니.”
엘의 두 눈이 움찔 떨렸다.
어쩐지 익숙한 눈빛이었다.
서늘하고, 냉기 어린, 적을 대하는 눈빛.
이상하게 아무스가 생각이 났다.
용인가?
아니, 그럴 리 없지.
엘루라는 용은 폐하가 풀어 줬다고 했으니.
저도 모르게 검에 손을 가져다 대려던 디에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폐하의 사람과 싸워서 뭐 하겠나 싶었다.
“폐하. 다른 이들 앞에선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누가 들으면 제가 진짜 폐하를 때리는 줄 알겠습니다.”
“틀린 말도 아닌데 뭘 그래.”
“주무시라는데도 하도 말을 안 들으시기에 손등 한 번 찰싹한 걸로…….”
“공작 부인이 들었으면 바로 이혼 감이야. 전엔 헤이먼 공자 엉덩이도 때렸다지.”
디에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전히 말싸움에 약했다.
“내게 할 얘기가 뭐야. 설마 시시콜콜하게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섭섭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맞습니다.”
“예상한 일 아니었나. 그럼 솔레아가 달리 누구와 결혼을 해.”
“……폐하는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안 하셨으니까 우리 애도 그 정도까진 시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진 가족들과 함께 있지 않을까 하고……. 제가 너무 느긋하게 생각했던 겁니까?”
일하기 싫어서 붙잡았나, 라고 생각했던 랏샤의 예상과는 달리 디에르고는 정말로 고민을 나눌 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랏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공은 친구가 없군.”
이런 고민을 동년배도 아니고 내게 털어놓다니.
라는 뒷말은 조용히 삼켰지만 의미는 잘 전달된 듯했다.
디에르고는 잠깐 황망한 눈으로 랏샤를 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그간 영지만 돌보다 보니 애들이 커 가는 모습도 제대로 눈에 담지 못하고, 이럴 때 말을 나눌 만한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그러니까 말이야.”
랏샤는 위로에는 재능이 없었다.
디에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이내 그녀가 고민을 나누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집안 사정뿐 아니라 솔레아의 이야기도 알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입이 무거웠다.
디에르고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민을 두서없이 쏟아 냈다.
“지윤이는 제겐 새로운 딸이잖습니까. 고생도 많이 했고, 의젓하게 제 할 일을 하면서도 제게 응석도 잘 부리지 않는 딸이고, 가족들을 아끼며 우아하고…….”
“칭찬 말고 자네 고민을 말해 봐.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거야?”
“웃으실 수도 있지만, 그냥 좀…… 우리 딸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 누굴 갖다 붙여도 우리 아가가 아깝고…….”
랏샤는 팔짱을 낀 채로 몸을 소파에 깊숙이 기댔다.
“난 자식이 없어서 모르겠군. 우리 아버지라도 데려다 놔 줄까? 비록 치매지만 그래도 그쪽은 애가 있어.”
“……됐습니다.”
이제 보니 황제는 위로뿐 아니라 수다에도 재능이 없었다.
“괜찮은 남자들을 다 데려다가 결혼시켜. 사위가 많으면 그래도 좀 균형이 맞지 않을까?”
“우리 레아가 황제도 아니고 첩들을 맞으란 말씀입니까?”
농담 역시 여전히 별로였다.
그래도 이젠 황제가 하는 농담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 축 처진 디에르고의 기분을 풀어 주고자 건넨 말인 듯했다.
디에르고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하신 대로 선황 전하를 뵙고 오늘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핑계 대고 일찍 퇴근하는 것 같은데.”
“들켰군요.”
디에르고는 아까보단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문 앞에는 형형한 눈빛의 엘이라는 신하가 서 있었다.
“……자네, 혹시 용은 아니지?”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쩐지 목소리도 익숙했지만 본인이 아니라는데 재차 물을 필요는 없었다.
“……실언했네. 그럼 이만.”
디에르고는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다시 몸을 돌려 엘에게 돌아갔다.
“용이라 치고.”
“예?”
“자네가 용이라 치고, 천 년 넘게 사랑한 여자가 있다고 치고, 그 여자에게 각별한 가족들이 있다고 쳐 보자고. 일단 자네도 남자니까 말이야. 이제 자넨 용이야.”
“……예.”
엘은 ‘이 인간은 눈치가 있는 듯 없는 듯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네.’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결혼 서약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니 그런 허례허식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
디에르고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변했다.
엘은 어쩐지 그를 골리고 싶어졌다. 랏샤가 디에르고를 자주 놀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엘은 일부러 말을 바꿨다.
“하지만 역시, 인간은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그렇게라도 묶여 있고 싶네요. 결혼하고 싶습니다, 꼭.”
“아……. 그래, 나도 그랬으니까 뭐…… 이해하지. 그래.”
디에르고는 눈에 띄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르고는 선황의 방으로 찾아가 그에게도 물었다.
선황의 대답도 비슷했다.
“그대의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가! 축하할 일이군.”
“허락 안 했습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결혼은 축하할 일이지. 어떤 용감한 사내를 사위로 맞게 되는 거요? 참 대단하군! 그런데 여긴 어디오. 나도 딸이 있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선황 전하. 만약 따님이 결혼하겠다고 하시면 허락하시겠습니까?”
“무슨 소리! 우리 딸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는데!”
선황은 정색하며 디에르고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황은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딸이 커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일단 조사를 해 봐야겠지. 내 딸에게 어울릴 만한 놈인지. 어중간한 놈에겐 절대 못 줘!”
“예! 제 말이 그겁니다!”
드디어 대화가 통하는 이를 만났다는 생각에 디에르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위 될 사람을 어떻게 검증할 생각이십니까, 선황 전하?”
“나는 일단 우리 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지가 제일 중요하니까…….”
디에르고가 치매 노인 선황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 그 시각, 아무스는 솔레아에게 차였다.
“결혼? 별로.”
아무스의 세상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