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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9화 (187/192)

외전 19화

아무스가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긴 머리카락이 사라락 흘러내렸다.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나는 흑단 같은 머릿결인데도 하림에게는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무스는 앞발을 천천히 움직여 하림의 머리통을 그러쥐었다.

“네 동생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이제 알겠나?”

하림은 얼굴이 찌그러진 상태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씩씩거렸다.

말을 꺼내려 해도 찌그러진 입 안에서 혀가 제대로 움직일 리 없었다.

“으그억! 어으억!”

고통 섞인 비명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아무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누구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왔어야 하는데.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몬도시완의 왕, 하림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이자의 말이 맞았다.

여기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공간인 게 분명했다.

아무스의 샛노란 눈동자가 하림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서 선명한 살기가 비쳤다.

……이 사람, 아니, 이 용도 정상이 아니다.

하림은 빠르게 제가 살 궁리를 찾기 시작했다.

“어억캐! 어억캐 하언 댈까요!”

한 나라의 왕인 제가 목숨을 구걸하는 게 비참했다.

하지만 살아남지 못한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림을 필사적으로 다시 소리쳤다.

“어억캐 학까요!”

“네가 잘 생각해 봐야지. 다만 하나만 알아 둬.”

아무스는 하림의 머리에서 손을 떼 냈다.

달콤한 공기가 폐부로 들어오는 감각에 하림은 얼른 숨을 들이마셨다.

허업, 하고 숨을 내쉬는 순간 다시 뒤통수가 잡혔다.

사과를 박살 내듯 사람 머리를 잡아 쥔 아무스가 하림을 들어 올렸다.

뒤통수가 뜯어져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비명을 지를 순 없었다. 바로 눈앞에 아무스의 빛나는 노란 두 눈이 서슬 퍼렇게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 으으…….”

하림은 발버둥조차 치지 못했다.

아무스는 하림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솔레아는 내 짝이다. 나의 사람이야.”

“으, 그, 그럼…… 아사라에게 찾아가시지…….”

“이런. 우린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구나.”

아무스는 하림을 던지듯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그러곤 싱긋 웃으며 그의 이마를 툭 쳤다.

“아무래도 우리는 공통 주제가 필요할 것 같아.”

하림은 아래로 떨어졌다.

정확히는 바닥이 무너지는 감각을 느꼈다.

방처럼 꾸며져 있던 공간이 완전히 암흑으로 변했다.

마치 누군가가 저를 잡고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갑자기 놓아 버린 것 같았다.

두려움에 눈을 꾹 감았다.

그런데 아무리 떨어져도 끝이 나질 않았다. 하림은 겨우 눈을 떠 옆을 바라봤다.

제 동생이 여자들을 장난감 취급 하며 막살 때, 저는 그것을 방관했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저놈이 저리 쓰레기처럼 살면 제 입장에선 오히려 도움이 되는 거니.

정말로 그랬다.

하림은 아사라의 부도덕한 소문들 덕에 손쉽게 왕이 됐다.

아사라 파울의 더러운 여성 편력을 비웃었다. 그에게 넘어간 여자들도 한심하다 여겼다.

제 잘못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과거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낙하는 끝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진작! 진작 말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장면이 바뀌었다.

아사라 파울이 특유의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 껄떡거리고 있었다.

아마 저이가 용이 말한 ‘솔레아 공녀’인 듯했다.

“말리겠습니다! 제가 말리겠습니다!”

그래도 낙하는 끝나지 않았다.

하림은 허공에서 구토를 했다. 팔다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아사라 파울의 자식들 중 죽은 아이들과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여자와 아이들이 보였다.

“저, 저건 제가 잘못한 게 아닌데!”

그딴 말에 이 긴 낙하가 끝날 리 없었다.

“제가!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니까아아악!”

그제야 추락이 끝났다.

하림은 아까처럼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는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미친 듯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용을 향해 무릎을 꿇고 말했다.

“당장 제국에 도망가 있는 동생을 잡아 와 처벌하겠습니다!”

“좋아.”

“예, 예! 예!”

몇 번이나 거듭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 고개를 든 줄 알았는데 눈을 떴다.

침대였다.

“……전하, 무슨 꿈을 꾸셨길래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세요?”

옆에서는 제 왕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림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이, 망할 아사라 개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그때, 그의 눈에 카펫에 선명하게 찍힌 용의 발자국이 보였다.

“……허읍.”

하림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 아사라 파울을 잡아 와야 했다.

방금 그 환상이 악몽 따위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 * *

아무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정말이야. 그쪽 왕과 그냥 대화를 나눴어.”

그레이는 미심쩍은 눈으로 아무스를 보다가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뭐. 너 알아서 해라. 난 간다.”

“처형. 이거 가져가.”

아무스가 주먹만 한 보석을 던졌다.

검은 보석 안에서 노란빛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네가 지금 가장 원하는 걸 가리키고 있어. 그 정도는 괜찮잖아.”

“……뭐, 고맙다.”

그대로 방을 나서려던 그레이는 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망설이듯 입을 달싹이던 그레이가 겨우 말을 꺼냈다.

“그……, 우리한테는 너밖에 없는 거 알지.”

“처형. 말을 덜 배웠나.”

“우, 우리를 처형이라고 부를 만한 놈은 너밖에 없다고! 이 용대가리는 알아들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네! 야, 됐어! 됐어!”

그레이는 씩씩거리며 이미 부서진 방문을 발로 차고 나갔다.

아무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찻잔을 기울여 차를 마셨다.

“맞아, 나밖에 없어. 솔레아에게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그 자리에 맞는 이는 나밖에 없어.”

아무스는 앞으로 다가올 솔레아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는, 달콤한 꿈을 꿨다.

* * *

아사라 파울이 잡히는 데에는 이틀도 채 걸리지 않았다.

32시간 만에 잡힌 아사라 파울은 새벽녘에 항구에서 밀항을 하려던 중이었다.

정확히는 이미 밀항하던 중이었다.

그레이는 코앞에서 놓쳐 버린 배를 보고 땅을 치다가 순식간에 웃옷을 벗어 던지고 허리춤에 맨 검을 빼낸 뒤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공자님!”

뒤에서 사람들이 말리건 말건 그레이는 미친 듯이 수영했다.

배는 이제 막 출발한 터라 아직 속도가 붙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도, 작지만 이것도 배다.

뛰어든 자는 그래 봐야 인간이고.

아사라 파울은 서서히 멀어지는 항구를 보며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이대로 다른 나라로 가서 숨어들면 돼. 돈만 있으면 못 살 곳은 없어! 형이 왜 갑자기 지랄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

저 하나 잡겠다고 바다에 뛰어드는 멍청한 공자라니.

자꾸 웃음이 터져 나와 결국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하하하! 크하하하!”

그때였다.

배 앞머리가 천천히 돌더니, 다시 항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뭐야! 선장!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돈을 얼마나 줬는데!”

아사라 파울은 비틀거리며 황급히 선장실을 향해 돌아섰다.

선장은 어디 가고 물에 쫄딱 젖은 적갈색 머리의 사나이가 타륜을 잡고 있었다.

이제 보니 선장실 바깥으로 선장의 상체가 보였다.

기절한 거다.

배에 올라타서 선장부터 잡은 저 괴물 같은 그레이 공자 때문에!

“마, 말도 안 돼! 안 돼!”

그레이는 물에 젖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타륜을 신나게 휘리릭 돌렸다.

“가자. 범죄자 새끼야.”

“안 돼! 안 돼에엑!”

아사라 파울은 바다로 뛰어들려고 몸을 틀었다.

그레이는 타륜을 고정시킨 뒤 선장실 밖으로 나가 아사라를 향해 그물을 집어 던졌다.

고기잡이배라 곳곳에 그물이 있어 다행이었다. 물론 그물이 없었더라도 그레이는 무슨 수를 써서든 놈을 잡았겠지만.

그물 안에서 아사라는 발버둥 치느라 생선 비늘을 온몸에 묻히며 악을 질러 댔다.

그는 결국 항구에서 대기하던 호송대에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는 아무스가 건네준 검은 보석에서 노란빛이 번쩍 빛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걸 보며 씩 웃었다.

보석을 하늘 높이 던졌다가 잡으니 쾌감이 배가됐다.

그레이는 환한 얼굴로 뒤돌아서서 제가 데려온 기사들에게 외쳤다.

“이제 집으로 가자!”

‘집’

단 한 글자임에도 포근하며 안정감을 주는 단어라고, 그레이는 달리는 말 위에서 생각했다.

몬도시완 본국으로 호송된 아사라 파울은 제 혐의를 부인했다.

용을 길들여서 반역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재판장에서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이미 국민들에게 상종 못 할 쓰레기로 낙인찍혀 있었다.

몬도시완의 재판장에 증인으로 출석한 티온이 영상석을 제출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긴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걸 보시죠.”

선상 파티에서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영상석에서 아사라 파울은 내내 솔레아 공녀의 곁을 맴돌며 걸리적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티온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수를 잘 길들이신다면서요?’

‘……그렇소.’

‘그럼 아주 포악한,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마수라 할지라도 길들일 수 있습니까? 방법이 있나요?’

‘길들인다기보다는…… 마수도 생명과 이지를 가진 존재니 시간이 지나 차차 익숙해지면 마음을 열겠지.’

‘완전히 복종시킬 수도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 명령에 무조건 반응하도록…….’

‘질문의 의도가 뭐지?’

‘하하! 그냥 뭐, 공자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관심 있어 하실 만한 주제를 꺼내 본 거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큰 짐승을 길들이고 싶은 로망이 있잖아요?’

영상석에서 나오던 영상이 끝났다.

해석의 여지에 따라 혐의를 완전히 입증할 순 없으나 용의 주인인 솔레아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표한 것이나 제국 아카데미에서 굳이 ‘제왕론’ 수업을 들은 것, 아사라의 사병 숫자가 몬도시완의 국법 기준을 넘은 것 등, 앞뒤 정황을 살펴봤을 때, 용을 이용해 반역을 꾀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다음은 죄인 아사라 파울의 부도덕한 행동이 왕국의 국격을 떨어뜨렸다는 안건에 대한 건데…… 이건…… 입증할 수가 없으니…….”

그때 재판장의 문이 열렸다.

“반갑습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될 뻔한 솔레아 폰 베르고입니다. 제가 다른 증인들까지 다 모으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그녀의 뒤로 수많은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모두 아사라 파울이 가운뎃다리를 함부로 놀리고 다닌 결과였다.

양육비 한 번을 주지 않았고,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했고, 저택에 찾아갔을 땐 오히려 몰매를 맞고 쫓겨나기도 했다는 증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재판부 결과는 곧장 왕에게 전해졌다.

왕의 최종 판결은 다음과 같았다.

‘아사라 파울은 더 이상 몬도시완의 왕자가 아니다. 그를 거세하고, 북부 노역장에서의 124년 노역을 명한다.’

아사라는 괴성을 질렀다.

“124년? 그만큼 살지도 못해! 어쩌라는 거야! 나보고 거기서 죽으라는 거야?! 내가 누군 줄 알아?”

그때 재판장에 앉아 있던 이 중 하나가 목소리를 냈다.

분명 평범한 외모의 인물이었는데 입 밖으로 음성을 내뱉는 순간 반짝이는 빛을 뿜어내며 모습이 변했다.

긴 흑발에 빛나는 노란 눈동자, 아무스였다.

“수명 정도야 내가 딱 맞게 늘려 주지. 124년 동안 노동을 하고, 모든 죄를 갚는 날 숨이 멎을 수 있도록. 그 전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마.”

아사라 파울은 눈만 끔뻑거리며 멍하니 서 있다가 간수들에게 끌려 재판장 밖으로 사라졌다.

아무스는 빙긋이 웃었다.

감히 누굴 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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