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화
헤이먼은 눈물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정령들 덕이었다.
‘얘들아. 내가 오른손으로 눈꼬리를 만지면 눈물을 흘리게 해 줘.’
‘아이고, 웬 잡놈 때문에 내 새끼 눈에서 눈물 나네. 가만 안 둬! 알았어! 타이밍 꼭 맞출게!’
정령들과 작당도 미리 해 뒀다.
헤이먼은 새로운 제품을 설명하는 개발 설명회를 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솔레아가 꼭 짙은 푸른 바지에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셔츠를 입으라고 해서 그렇게 입었다.
그게 잘 먹힌다나 뭐라나.
아무튼 헤이먼은 기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제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평범한 시계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이건 연결석을 이용해 멀리 떨어진 사람과 목소리로 상호 간 대화를 할 수 있는 기계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혁신적이죠. 거기에 한 가지 기능을 더했습니다. 바로 사람의 심장 박동을 재는 기능이죠. 마법의 힘이 반영구적으로 깃들어 있기 때문에 필요한 일일 운동량도 실시간으로 계산해 줍니다. 예를 들어 하루에 만 보를 걷기로 설정해 두면…….”
한참 동안 제품에 대해 설명하던 헤이먼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달콤한 말로 거짓을 말하는 이를 가려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순진한 이가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헤이먼은 마치 눈꼬리가 가려운 사람처럼 손가락을 슬쩍 가져다 댔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물이 또르륵 흘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실수를.”
그때 헤이먼이 차고 있던 시계에서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장 박동이 올라갔어요! 헤이먼 님은 슬퍼요!”
“체온이 올라갔어요! 헤이먼 님은 화가 났어요!”
마력석을 심어 미리 설정해 둔 정령들의 맑은 음성이었다.
“아, 왜 눈물이 멈추질 않지……. 정말, 죄송합니다. 집안일 때문에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꽃처럼 고운 헤이먼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는 모습은 마치 조각 같았다.
제품 설명회에 모여 앉아 있던 사람들은 홀린 듯 헤이먼을 올려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름답…… 아니, 공작저에 무슨 슬픈 일이 있다고 우시는 거지?”
“잠깐만, 저 시계가 말을 한 거야?”
“대단한걸!”
“제품도 제품이지만 공자님이 우신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지금 그래서 기사를 뭘 써야 되는데! 아름답게 눈물을 흘리신 걸 써야 돼, 아니면 저 놀라운 제품을 써야 돼?”
몇몇 기자들은 정답을 알고 있었다.
솔레아가 일찍이 포섭해 놓은 신문사 기자들이었다.
‘베르고에 뼈를 묻기로 함. 당연함. 땅 매우 따듯.’
마틸다는 제 신념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며 기사를 써 내려갔다.
「발명가로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터진 눈물, 원인은 최근 논란 때문인가.」
샹, 내가 울면 안 되는데.
공녀님 절대 지켜. 아무한테도 안 넘겨.
마틸다는 일부러 ‘스캔들’이 아니라 ‘논란’이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기사를 마무리했다.
「눈물의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달콤한 말로 거짓을 말하는 이를 가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발언에 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베르고 공작저에 달콤한 말을 건넨 이는 누구일까. 우리는 모두 답을 알고 있다.」
마틸다만 이런 식으로 기사를 쓴 게 아니었다.
여러 신문사에서 누군가를 의심하는 듯한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
당연히 국민들의 관심이 쏠렸다.
티온은 헤이먼의 제품 설명회가 끝나고도 부지런히 소문을 부풀리러 다녔다.
“아무래도 이상한 질문을 받아서, 여러분께 고민을 나누려 합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티온 공자가 모임에 먼저 찾아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고민까지 나누다니!
귀공자들은 반색하며 티온의 곁에 바짝 모여들었다.
“공자! 뭐든지 말씀해 주세요!”
“공자의 고민이 뭡니까!”
티온은 진지한 표정으로 제가 데리고 온 커다란 마수의 턱을 긁어 주며 말했다.
“아사라 파울 왕자가…… 선상 파티에서 제게 ‘마수를 길들이는 방법이 뭐냐.’라고 묻더군요.”
“그, 그건 평범한 질문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마수라 할지라도 길들이는 방법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표정이 어찌나 섬뜩하던지 뒷골에 소름이 쫙 돋더군요. 이젠 제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를 노리는 게 아닌지…….”
티온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헤이먼이 한숨을 쉬면 공기조차 아름답게 변했지만, 티온이 한숨을 쉬자 주변인들이 숨조차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너무 다른 이목구비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귀공자들이 냉큼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그, 그것참! 오만한 왕자가 아닙니까! 감히 신성한 용을 마수에 비하다니! 그리고 그걸 공자께 질문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그,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래 놓고 공녀님이 마음에 드는 시늉을 하다니! 그건 조롱이 아닙니까!”
마지막 말을 뱉은 자는 문장을 마치자마자 입을 다물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티온의 눈에 살기가 어린 탓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감히 누굴 입에 담는지…… 속상하네요.”
두 번 속상했다간 전쟁 일으키시겠어요, 티온 공자…….
모임에 있는 다른 귀공자들은 결국 티온과 친해지지 못했다. 너무 무서웠다.
랏샤도 바빴다.
랏샤는 선상 파티에서 솔레아에게 ‘저놈 소문이 안 좋아. 권력 있는 여자에겐 껄떡거리고, 권력 없는 여자는 강제로 안는다더군. 피해, 난 상대도 안 하는 자야.’라고 말했던 걸 떠올렸다.
솔레아는 그걸 토대로 아사라 파울에 대해 지독히 파고들며 조사했다.
아사라 파울과의 스캔들이 터지고 만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 솔레아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역시 구린내 나는 놈치고 털어서 안 나오는 새끼 없지.’
간만에 험악한 말투였다.
솔레아가 시공간을 뒤져서 찾아낸 그놈의 과거는 지저분하다 못해 너덜거릴 정도였다.
어지간한 인간 군상에는 놀라지 않는 황제 카라샤펠 역시 전해 듣고 내심 놀랄 정도였다.
주로 그의 더러운 여성 편력과 책임지지 않은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
아사라 파울은 여러 아이들의 아빠였다.
그는 강제로 안은 여성들에게서 아이들이 태어나면 모른 척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튿날, 어떻게 알았는지 몬도시완 왕국에서 딱 맞는 타이밍에 아사라 파울 왕자를 호출했다.
실은 호출이라기보다는 제르노아 제국의 황제에게 죄인 아사라 파울을 잡아 호송시켜 달라는 것에 가까운, 절절한 부탁이 적힌 문서였다.
카라샤펠은 이유도 모른 채 내 제국에 머무는 손님을 함부로 내칠 수 없다고 답했다.
일부러 솔레아의 말대로 아사라 파울을 바로 잡아들이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결국 몬도시완 왕국의 왕은 아사라 파울 왕자의 방탕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얘기를 제 스스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솔레아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사라의 형에게 직접 들으니 새삼 쓰레기였다.
아사라의 큰형인 몬도시완의 현왕이 제 손으로 동생의 잘못들을 낱낱이 적어 보낼 줄은 몰랐는데.
‘폐하가 살짝 찔러 보기만 해도 줄줄 알려 줄 거예요. 그동안은 죽일 만한 이유가 딱히 없어서 살려 둔 거예요. 그런데 도망친 제국에서, 군사력을 쥐고 있는 용의 주인을 거론하며 희롱했다?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는 걸 그쪽도 알아야죠.’
랏샤는 솔레아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편지는 구구절절 아사라 파울을 잡아 보내 주십사, 하고 부탁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지도자 간에 오간 문서라고는 해도 범죄자가 제 제국에서 멀쩡히 돌아다니며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일을 비밀리에 처리할 순 없다. 국민들도 알 권리가 있다.
……고 말하며 랏샤는 몬도시완 왕의 편지를 공개했다.
몬도시완 왕국은 문서가 공개되고도 별다른 제재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명서를 발표했다.
‘자국에서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제르노아 제국으로 넘어가 용의 주인을 회유해 용을 제 수족으로 부리려 했던 아사라 파울을 이 나라의 왕제(王弟)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사라 파울이 잡히기만 하면 죽일 모양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감히 누굴 건드려.
랏샤는 깔깔 웃었다.
그녀의 곁에는 제르노아 제국과 몬도시완 왕국을 빠르게 오가며 편지를 전달해 준 엘 벨다르가 서 있었다.
용은 전서구가 아니지만 뭐 아무튼 그렇게 됐다.
몬도시완 왕국에선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 마법을 쓴 거냐고 신기해했지만 실은 그냥 날아간 거였다.
솔레아는 다른 일로 바빴다.
그런 상황에서 엘 벨다르는 유용했고, 랏샤는 유용한 인재를 아낄 줄 알았다.
뭐, 엘은 그걸로도 만족했다.
그리고 이제부턴 그레이의 시간이었다.
“나 도망간 새끼 잡는 거 잘해.”
“오빠만 믿는다.”
“근데 넌 며칠 전부터 왜 집에 안 붙어 있고 여기저기 다니는 거야.”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래. 얼른 아사리 판이나 잡아 와 줘.”
이젠 이름도 멋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사라 파울은 거처를 버리고 도망쳤다. 잡히면 죽는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오빠. 아사라 파울 어디 있는지 마법으로 알아볼까?”
“아니. 나 추적하는 거 좋아해. 딱 이틀만 줘.”
“……어, 그래.”
그레이는 범죄자 사냥이 천직인 듯했다.
“산윤솔, 근데 어떻게 몬도시완의 왕이 딱 맞춰서 공문을 보내온 거야?”
“그러게. 원래 정령들을 보내서 꿈에서 협박할 생각이었는데. 아니, 그런데 이 아사리 판 새끼는 또 왜 도망을. 아무튼 오빠. 빨리 잡아 와야 돼. 알았지? 나 나갔다 올게!”
솔레아는 급한 일이 있는 듯 말을 마치자마자 빠르게 방을 나섰다.
솔레아의 방에서 조용히 홍차를 마시던 아무스가 그레이에게 나지막하게 답했다.
“산이 내 짝이라는 걸 ‘공표’하는 게 싫다고 했잖아.”
“어? 응. 그랬지. 그게 왜?”
“공표가 아닌 다른 거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
“……너 몬도시완 왕한테 무슨 짓 했냐?”
“별짓 안 했어. 대화만 나누고 왔지.”
아무스는 찻잔을 기울이며 느릿하게 다리를 꼬았다.
* * *
우애가 좋진 않아도 하림은 제 이복동생 아사라 파울을 선뜻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덜떨어진 쓰레기다 보니 제 왕좌에 위협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가 왕위에 오른 뒤 아사라 파울이 도망치듯 제르노아 제국으로 유학을 떠났을 때도 굳이 잡지 않았다.
죽었다 깨나도 왕이 되진 못할 놈인데 뭐 하러 그런 수고를 들이겠는가.
그날도 하림은 편안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다.
그런데 아리따운 왕비가…… 없었다.
“부, 부인?”
“네 부인은 침실에서 잘 자고 있다. 여긴 다른 공간이고. 이리 친절히 설명해 준 내게 고마워해야겠지?”
긴 흑발의 남자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신문을 읽고 있었다.
“누구냐!”
그 순간 온몸이 무언가에 짓눌리듯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하림은 몸속의 모든 장기가 곤두박질치는 감각을 느끼며 쓰러졌다.
커다란 발이 위에서 저를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신문이 제 머리 옆으로 떨어졌다. 제국어가 적힌 제르노아의 신문이었다.
[처음으로 내 온 마음을 주고 싶은 사람 ―아사라 파울 왕자]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대화를 해야겠어. 보호자끼리 말이야.”
용의 샛노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아무스의 손 부분이 용일 때의 모양으로 변했다. 검은 비늘과 단단한 발톱이 하림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너한테 이 새낀 소중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겐 이 사람이 그 무엇보다 귀하거든.”
아무스의 손톱이 신문에 적힌 한 이름을 가리켰다.
‘솔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