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7화 (185/192)

외전 17화

아사라 파울의 인터뷰 내용은 가관이었다. 온통 솔레아에 대한 환상이 적혀 있었고, 저 혼자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내가 상상해 왔던 완벽한 이상형, 그 자체다. 흰 피부와 타오를 듯 붉은 머리칼과 입술, 신비한 보라색 눈동자. 신이 있다면 마치 그녀와 같은 모습일 것이다. 아름답고 자애로우며 강하면서도 여린 모든 모습을 갖춘 그녀를 보고 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솔레아 공녀님이 용의 짝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나.」

「글쎄, 내 사랑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두 사람이 아직 맺어지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장애물이 있어도 뛰어넘는 게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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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밑으로도 아사라 파울의 (지한테만) 숭고한 짝사랑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졌다.

솔레아가 방을 박차고 나가기 전, 오빠 셋이 방문을 뜯을 듯 열고 들어왔다.

아니, 뜯었다.

티온은 제 손에 들린 방문을 보며 잠깐 당황했지만 이내 문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막내야! 미안! 고치라고 할게! 미안! 근데 이 새끼 뭐야!”

티온은 제 손에 들린 신문이 아사라 파울의 멱살이라도 되는 듯 짤짤 흔들었다.

순하디순한 티온의 입에서 ‘이 새끼’라는 말이 나온 역사적 순간이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솔레아뿐 아니라 그레이와 헤이먼도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티온을 올려다봤다.

모두 당황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데도 티온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지 이를 악물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책상 위에 신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올려 뒀다.

“이 자식은 뭔데 너한테 허락도 안 받고 너에 대해서 맘대로 떠드는 거야?!”

“형, 화난 건 알겠는데 일단 레아는 큰 소리 치는 걸 싫어하니까…….”

성난 티온을 막으려 하던 헤이먼이 입을 다물었다.

허공에서 정령들이 폭포처럼 튀어나와 시야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왕주인은 우리 용주인이랑 결혼할 건데!”

“왕주인은 하나도 자애롭지 않은데!”

“왕주인은 이렇게 맥락 없이 들이대는 놈 싫어하는데!”

“왕주인! 이놈이랑 결혼하지 마! 우리 용주인 좋아하잖아, 흐어엉!”

“불곰 처형이 막아 줘. 불곰 처형이 혼내 줘어어. 으앙! 싫어! 우리는 싫단 말이야!”

“아가 호랑이 처형도 목 베어 버려! 죽여 줘! 왕주인 못 줘! 으아앙!”

“분홍아! 내가 이 꼴을 보면서 살아야겠니. 아이고, 오래 살아 봤자 좋은 꼴 못 보는구나! 내가 이 꼴 보자고 주인들 밑에서 천 년을 살았을까.”

허공을 치며 포르르 날개를 펄럭대는 정령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티온의 악문 턱에서 아드득 소리가 들려왔다.

“막내야. 나는 네가 너를 아껴 주는, 너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랑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 형.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주먹 펴고 말해. 이왕이면 인상도 펴고. 지금 산윤솔 죽이러 온 거 아니잖아.”

그레이가 어깨를 잡아당기며 말리자 티온은 그제야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돌렸다.

제 화난 얼굴을 막내에게 보이기 싫었는지 그는 창문을 향해 섰다.

새삼 전장에서 마수와 인간들의 목을 베고 다녀 전장의 귀신이라고 불린다는 그의 별명이 실감이 났다.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어깨와 등의 성난 근육들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빨랫감을 들고 창밖을 지나가던 하녀들이 티온의 얼굴을 보고는 괴성을 지르며 빨래들을 내던지고 도망쳤다.

평소 같으면 주눅이 들었을 티온은 그 모습을 보고도 씩씩거리며 창가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평소와 다른 티온 때문에 얼떨결에 화가 싹 가라앉은 솔레아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이놈 싫어. 사실은 누군지도 몰라. 얜 그냥 내가 마법사라서 신기하기도 하고, 용의 주인이라니까 호기심이 동한 것 같아.”

“아냐, 왕주인 예뻐서 그래!”

정령의 말에 헤이먼이 동의했다.

“그래. 우리가 괜히 너 어디 가서든 꿀리지 말라고 매번 꾸며 줬나 보다. 이제 좀 꿀리게 하고 다니자.”

헤이먼은 들고 온 분홍색 빗으로 솔레아의 머리를 적당히 헝클어뜨리며 빗어 올렸다.

“자, 이렇게. 좀 미친 사람처럼 하고 다니자. 네가 예뻐서 그래. 아니지, 그 새끼 잘못이지. 넌 잘못 없어. 아니 시발 근데 내 동생이 왜 이런 꼴을. 아니 그래도 조금만 덜 꾸미면…….”

귀여운 헤이먼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헤이먼 오빠.”

솔레아는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횡설수설 떠드는 헤이먼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레이는 허리춤에 달고 있는 검 위에 묵묵히 손을 올렸다.

“죽일까?”

“전쟁 일으킬 일 있어?!”

스캔들 당사자는 솔레아인데도 다들 솔레아보다 크게 분노했다.

마치 제가 모욕을 당한 것처럼.

아니지, 멀지 않은 예전에 정말로 본인들이 모욕을 당했을 땐 그저 무시하며 넘겼던 이들이었다.

어느새 그들은 이런 조롱에 분노하며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변했다.

밀려드는 감동을 남몰래 슬쩍 누른 솔레아는 차분히 말했다.

“아무스가 내 짝이라고 발표하면 돼. 그렇게 하면 해결될 일이야. 이 멍청이는 조용히 밟자고. 대놓고 하면 국제적으로 분쟁이 일어나. 이 멍청이가 이래 봬도 왕자잖아.”

딱히 끌리는 방법은 아닌지 그레이와 헤이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직도 내가 아무스와 연인인 게 마음에 안 들어?”

내내 창밖을 보며 서 있던 티온이 다시 몸을 돌렸다.

“우리도 물론 네가 만약 누군가와 연인이 된다면 그 상대는 아무스 말고는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딴 일 때문에 둘의 관계를 공표하는 게 싫어.”

“불곰 처형이 맞는 말을 하는군.”

부서진 문 너머에서 아무스가 걸어 들어왔다.

그 역시 신문을 봤는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아무스는 곧장 솔레아에게 걸어가 따스한 노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네가 준비됐을 때 발표해도 난 괜찮아.”

“하지만 아무스, 난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미룬 게 아니고 그냥…… 이대로가 좋아서 조금 더 이렇게 지내고 싶었던 거라…… 만약 네가 불편하다면.”

“알아. 나도 지금이 좋아. 그리고 이 사람 네 스타일 아니잖아.”

아무스는 안심하라는 듯 장난스럽게 킬킬 웃으며 솔레아를 부드럽게 안았다.

“네가 하고 싶을 때 하면 돼, 뭐든. 난 그러기 위해 네 옆에 있는 거잖아. 이놈을 세상에서 없애고 싶으면 그렇게 해 줄게.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지울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싫지?”

“……어, 그건 좀.”

“그래. 그럼 그냥 있을게. 넌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고, 나도 여기 있어. 변하는 건 없어. 화내지 마, 산. 우린 계속 함께일 테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글부글 끓던 짜증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솔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스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래도, 난 그놈한테 빅 엿을 먹여야겠어.”

“그러자, 그럼.”

솔레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선상 파티에서 황제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도 있으니 그걸 써먹으면 될 것 같았다.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선 오빠들의 도움도 필요했다.

그런데 오빠들은 모두 등을 돌린 채 먼 산이나 텅 빈 벽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솔레아와 아무스의 갑작스러운 스킨십 때문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빠처럼 헛기침을 하지는 않았다.

“다, 다 끝났냐?”

어색하게 말은 더듬긴 했지만.

솔레아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그놈을 처리할 방법에 대해 얘기했다.

솔레아는 공간을 열어 랏샤의 집무실과 연결했다.

“폐, 랏샤!”

“응, 그래. 폐위시켜라, 그래. 다 해라.”

서류에 얼굴을 박고 일을 하던 랏샤는 갑자기 공간이 연결됐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전에 선상 파티에서 저한테 아사라 파울의 얘기를 해 주셨잖아요. 기억하시죠?”

“그게 필요해?”

“네.”

“흠, 그래. 대충 알아들었어. 나 바빠.”

“예.”

솔레아는 랏샤가 엘 벨다르에게 무어라 명령하는 것을 보고서 얼른 연결을 끊었다.

그리고 작전 순서를 오빠들에게도 얘기했다.

퇴근 후에 불같이 성을 내며 귀가한 디에르고 공작은 화를 가라앉히는 데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작전을 실행하는 걸 납득했다.

비록 납득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씩씩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해 정령들이 마법의 힘으로 꿈속으로 데려가 주긴 했지만, 어쨌든 납득을 하긴 했다.

* * *

솔리안 백화점에서 구두 장사를 하는 그롬은 공녀님과 웬 듣도 보도 못한 왕자 놈의 스캔들에 웃을 수가 없었다.‘……여기가 용이랑 공녀님의 사연을 테마로 굴러가는 곳인데 다른 놈이랑 결혼하면 어떡하냐고. 아이고, 내 팔자야.’

그롬의 콧수염이 아래로 축 처졌다.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사장님. 한숨 좀 그만 쉬세요. 오던 손님도 돌아가겠어요.”

매대를 정돈하던 직원 파블 리가 약간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손님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 오늘 계속 이 백화점에 들어오는 손님들마다 입구에서 ‘용이랑 공녀님은 그럼 아무 사이도 아닌 거였나.’, ‘전엔 사랑이었는데 이젠 식은 거지!’라든지, ‘어쩐지. 뭔가 쎄하더라고. 난 이미 알고 있었어.’라고 떠들어 대는 걸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혔다.

진짜 아사라 파울이랑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이 백화점은 아사리 판이었다.

그건 안 되는데…….

물론 이안 사장님이 어련히 잘 운영하시겠냐마는, 솔레아 공녀님이 이 백화점을 지을 때만 하더라도 그 유명한 용과 결혼하실 줄 알았는데.

용 백화점으로 유명한 이곳에 구경하러 왔다가 물건을 사 가는 손님들이 꽤 많았다.

그 손님들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롬은 입 안이 썼다.

“그 왕자가 공녀님을 협박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니냐!”

“무슨 그런 얘길 하세요!”

“그런 게 아니고서야 공녀님이 용 님을 사랑하시는데 스캔들이 날 리가 없어!”

“작게 얘기하세요! 사장님! 그래도 타국의 왕자님이시잖아요!”

그때 백화점 안으로 귀공자 무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여기가 바로 그 티온 공자가 자랑하는 막내가 만들었다는 백화점이군.”

“용을 테마로 만들었다더니 엄청 화려해.”

“그나저나 티온 공자가 우리 모임에 자주 나오다니. 신기한 일이야. 그동안은 낯을 많이 가렸잖아?”

“이따 저녁에도 만나기로 했으니까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 잘 풀자고. 나 그분이랑 진짜 친해지고 싶단 말이야.”

“너희 그거 들었어?”

“뭐. 그 왕자 얘기? 야, 됐다. 티온 공자 성격에 동생을 그 먼 데까지 시집보내겠어?”

“그게 아니라 어제 티온 공자가 우리 소모임 나와서 하는 말이…….”

중요한 고객들을 따로 모시는 룸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며 한참 떠들던 그들은 하필 중요한 부분에서 목소리를 낮췄다.

“뭐?! 야. 그게 정말이야? 그러면 그 왕자가 노리는 게……!”

“쉿! 쉿. 아직 모르는 거야. 근데 뭔가 이상하지 않냐는 거지.”

“그, 그렇긴 하네.”

그롬은 몸을 점점 계단 쪽으로 기울여 봤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왕자가 노리는 게 뭔데! 뭘 노리는데!

나 장사 접어야 돼, 계속해야 돼?! 그것만 말해 주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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