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6화
황궁 파티에 참석한 어느 타국 왕자가 사건의 발단이었다.
“공녀님, 저와 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네, 그러죠.”
모두가 즐거운 파티니 춤이야 얼마든 출 수 있지.
라고 그때의 솔레아는 생각했다.
사건이 이렇게 커질 줄 모르고.
이틀 뒤, 공작저로 꽃이 배달되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붉은 꽃과 보랏빛 꽃이 공작저 앞을 가득 채웠다.
“몬도시완 왕국의 아사라 파울 왕자님께서 보내신 꽃입니다!”
“와…….”
솔레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꽃을 전부 불태우려는 아무스를 뜯어말렸다.
“참아! 가만히! 아무스! 친절이야! 이건 친절이야!”
“타국의 왕자가 꽃을 보냈잖아!”
“그래, 맞아! 누가 봐도 꽃이지! 그리고 네 말대로 타국의 왕자님이야! 불태우면 안 되지! 그리고 꽃만 보냈을 뿐 아무 말씀도 안 전하셨잖아.”
솔레아는 저택 안에서 길길이 날뛰는 아무스를 겨우 다독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사라 파울의 시종은 저택 앞 계단 아래에서 두 손을 맞잡은 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꽃은 마음에 드십니까, 공녀님?”
“네.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하지만 부담스러우니 앞으론 이런 건 주지 않으셔도 된다고도 전해 주시고요.”
“아! 부담스러우셨군요.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께 말씀 전하겠습니다!”
시종은 허리를 깊이 숙여 공녀에게 인사하고 냉큼 돌아갔다.
그리고 제 주인에게 전했다.
“공녀님께서 보라색 눈을 커다랗게 뜨시면서 ‘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하다고도 하셨고요!”
“그리고, 그리고?”
“꽃은 부담스럽다고 하시더군요! 화려한 생김새와 달리 검소하신 분 같았습니다.”
“그래? 하긴……. 공작저에도 꽃은 많을 테니까.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아사라 파울은 작전을 바꿨다.
베르고의 공녀가 주최한 자선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정말 감동적인 오페라였습니다! 기부금을 내고 싶습니다!”
“학생들의 실력이라고는 믿기 힘든 연극이었습니다! 기부금을 내고 싶습니다!”
“버려진 강아지와 고양이를 위해 보호소를 설립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기부금을 내고 싶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라니! 정말 사려 깊으십니다. 기부금을 내고 싶습니다!”
그때마다 솔레아는 한결같이 서비스적 미소로 응대했다.
“네, 그러세요. 맘껏 내세요.”
돈은 죄가 없으니까.
몬도시완 왕국에서 제국으로 유학을 왔다는 이 어린 왕자는 아무래도 제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용의 주인이라는 명성 때문에 생긴 호기심이 크겠지만.
이런 적이 처음인 것도 아니고.
솔레아는 무덤덤했다.
공신가 집안이며 황제의 최측근인 베르고의 공녀가 미혼이니, 당연히 들이대는 사람도 많았다.
용의 주인이라고만 알고 있지, 용과 연애한다는 사실은 다들 몰랐으니까.
그들의 러브 스토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베르고 공작저 사람들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바깥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처음에야 혹 연인 사이가 아닐까 하고 추측했지만, 정말로 둘이 연애 감정이 있다면 여태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둘은 결혼하지 않았다.
솔레아가 성년을 훌쩍 넘긴 스물한 살이 되었음에도.
물론 디에르고 공작과 티온, 헤이먼, 그레이의 격렬한 반대에(가족이 된 지 이제 겨우 1년인데, 혹은 2년인데!, 조금 지나자 3년인데! 결혼이라니! 등등) 부딪친 거지만, 바깥사람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 아무스와 솔레아의 관계가 연인에서 점차 친구 관계로 비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사라 파울 왕자 역시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기에 들이댄 것이고.
그전에 들이댔던 놈들이 공작가의 불꽃 디펜스에 대시를 포기했던 건 아직 모르고 있었다.
아무스도 씩씩거리기야 했지만 그가 이내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여태 솔레아에게 호감을 표시했던 모든 이들을 멋진 처형들이 처리했으니까.
물론 죽이진 않았고, 경고만 했다.
베르고가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만 보여 줬을 뿐인데도 다들 포기했으니까.
아무스는 아사라인지, 아가리인지 모를 놈도 곧 그럴 거라 여겼다.
솔레아도 에둘러 거절했으니까 눈치가 있는 놈이면 알아듣겠지.
‘내 짝은 매력적인 인간이니까.’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아무스는 별일이 아닐 거라 여기며 솔레아의 동그란 이마에 짧게 키스하곤 방을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공작저에 찾아온 아사라 파울은 솔레아에게 다음 선상 파티에서 제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청했다.
선상 파티는 디자이너 마리에가 주최하고, 솔리안 상단이 후원한 파티로, 솔레아가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마리에 살롱이 솔리안 상단의 산하 기업으로 완전히 들어온 뒤 처음으로 준비한 아동 옷 컬렉션을 론칭하는, 나름의 패션쇼였다.
“아뇨, 난 파트너가 있어요.”
“그 용 말입니까? 아니면 공작님이나 공자님들이십니까?”
이 호쌍새가 내 용은 높여 부르지를 않네?
솔레아는 잠깐 떠오른 생각을 얼른 머릿속에서 치워 버렸다.
거칠게 나가지 말아야지.
진짜 ‘솔레아’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젠 저가 솔레아의 이름으로 살고 있고, 그 이름 또한 제 것이라 여기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처음처럼 막 나가진 않을 거라고 결심한 지 오래였다.
‘공녀’라는 이름에 맞게 살겠다고, 그게 아빠와 오빠, 그리고 솔레아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솔레아는 한 번 참았다.
“네, 아무스와 함께 갈 거예요. 아무스와 가지 못한대도 아빠와 오빠들과 가면 됩니다.”
그녀의 싱그러운 거절을 들은 아사라 파울은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기대에 가득 차 반짝이던 눈동자가 침울한 빛으로 뒤덮였다.
“아…… 그러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아사라 파울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솔레아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돌아갔다.
솔레아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눈치란 게 존재하는 놈이라면, 저를 꺼린다는 걸 알아챘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대망의 선상 파티 날, 솔레아는 가족들과 함께 배 안으로 입장했다.
당연히 마리에가 디자인한 옷으로 단장한 채, 아무스의 팔짱을 끼고서(디에르고 공작은 한쪽 눈으로도 분노를 표현할 줄 알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빌! 오랜만이에요. 세상에, 사라. 갑자기 키가 훌쩍 컸네요! 성장기는 다르구나.”
간만에 만난 사라는 애티를 훌쩍 벗고 아가씨가 된 것 같았다.
“그럼요! 공녀님, 저 곧 공녀님만큼 커질 거라고요!”
“이제 슬슬 사라의 짝도 찾아야 하니 제가 걱정이 많습니다! 아직 어린앤데!”
“내가 무슨 어린애야! 내 친구 중엔 결혼한 애도 있어!”
“공녀님은 아직 결혼 안 하셨잖아, 사라. 실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니, 난…….”
이대로 아무스랑 아빠랑 오빠들이랑 사는 게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건데.
솔레아가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내젓고 있자 빌이 사라에게 따끔하게 말했다.
“공녀님은 너보다 나이도 많고, 연애하는 용도 있으신데 아직 결혼을 안 하셨잖니! 그리고 결혼 안 한 당사자 앞에서 결혼을 빨리 해야 한다는 티를 내는 건 실례야. 우리는 좀 더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다, 사라.”
“……그걸 내 앞에서 말하는 빌도 실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거 알죠.”
“하하하하!”
빌은 웃으며 넘어갔다.
솔레아 역시 능청을 떠는 빌 때문에 웃음이 터져 그만 웃고 말았다.
공작님과 춤을 추는 것을 시작으로 티온, 헤이먼, 그레이와 연달아 춤을 췄다.
“딸. ……박자는 좀 빠르지만 전보다 훨씬 잘 추는구나.”
아빠 왜 우세요.
공작은 눈물을 훔쳤다.
“이제 춤 잘 추네, 우리 막내.”
티온은 흔들리는 선상 위에서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보다가 울컥한 듯 벌게진 눈으로 솔레아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하늘로 솔레아를 들어 올렸다.
“우리 막내!”
“좀!”
티온은 여전히 솔레아를 인형 잡듯 들어 올렸다.
“레아, 발이 좀 가볍지 않아? 정령들에게 도와 달라고 했어.”
생긋 웃는 헤이먼의 얼굴에선 여전히 정령들의 사랑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산윤솔. 넌 어떻게 된 게 춤을 배워도, 배워도 늘질 않냐.”
“전문 선생한테 배운 게 아니잖아! 지가 가르쳐 놓고 그래.”
“이게 어디 오빠한테 지라고 그래.”
“아, 짜증 나. 진짜.”
“크크큭.”
그레이는 늘 그랬듯 솔레아를 놀려 먹었다.
가족들과 춤을 추고 난 후, 뒤늦게 파티에 등장한 황제 폐하에게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랏샤의 뒤에는 늘 함께하던 시녀 메리가 아니라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은색 머리칼에 부드러운 녹색 눈을 가진 미남이었다.
“이렇게는 처음 보는군요. 반갑습니다. 엘 벨다르입니다.”
“엘 벨다르? 엘루 아니고 엘 벨다르?!”
그레이는 엘의 두 팔을 잡고 늘렸다가 위로 올렸다가 내리길 반복했다.
“아무스. 이놈 요으억!”
랏샤가 그레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비밀이야. 그렇게 살아 보기로 했거든.”
“황제 폐하가 사람을 걷어차요? 나라 꼴 잘 돌아간다.”
“이 자식이?”
그레이와 랏샤는 씩 웃으며 서로에게 농담을 건넸다.
뭇 여성들과 엘 벨다르가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랏샤와의 인사가 끝난 후 오빠들은 각자 자신을 찾는 무리로 섞여 들어갔다.
오빠들은 최근 인기가 좋아져 전처럼 파티에서 솔레아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기 힘들어진 상황이었다.
그제야 아무스가 춤 신청을 해 왔다.
“산, 나랑 춤출까?”
“좋…… 같네.”
“어?”
커다란 꽃다발을 든 아사라 파울이 과하게 부담스러운 미소를 띤 채, 오직 솔레아만을 보며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공녀님, 오셨군요. 달빛이 쏟아지는 찬란한 바다 위에서 뵈니 더욱 아름다우십니다. 신경 써서 준비한 이 꽃들조차 공녀님 앞에선 부끄러워지네요.”
욱.
솔레아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걸 꾹 참아야 했다.
아사라 파울은 위아래 강냉이 여덟 개를 선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꽃다발은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으니 일단 꽃 한 송이만 받으시겠습니까?”
“아니, 전…….”
그때 평범한 파티 참여자인 줄 알았던 이들이 은근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다가왔다.
그들은 차례차례 꽃이 그려진 머리끈, 꽃이 그려진 귀걸이, 꽃이 그려진 레이스 손수건 등을 내밀었다.
선물들을 내팽개치고 싶었지만 무슨 수를 썼는지 하필 그 순간 로맨틱하게 흐르는 음악과 이쪽으로 쏠린 시선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솔레아의 얼굴이 쪽팔림과 분노로 시뻘게졌다.
마지막으로 아사라 파울이 제가 들고 있던 꽃다발 중에 가장 큰 꽃 한 송이를 솔레아에게 내밀었다.
“그 어떤 꽃도 당신에게 비할 순 없지만, 받아 주시겠어요?”
솔레아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려 왔다.
자세히 보니 건네받은 선물들에 몬도시완 왕국의 국기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자기 나라 물건들을 들고 와서 선물한 것이다. 시발 지금 바닷물에다 던질 수도 없게.
그랬다간 국가적 분쟁 사유가 되겠지.
“와!”
뭣도 모르는 멍청이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아무스에게 미리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 사람들이 아직 용을 무서운 존재로 생각하니까.’라고 말해 둔 것까지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번 파티를 통해 귀족들에게 용의 이미지를 공포나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좀 친숙하게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아무스의 그르릉대는 하울링 소리가 솔레아의 귓가에 선명히 들려왔다.
솔레아는 앞으로 걸어가 제 손에 들려 있던 선물들을 모두 아사라 파울에게 안겨 줬다.
“이러지 마세요. 왕자님.”
“……혹시 쑥스러우신 거라면.”
“아닙니다. 그냥 싫은 겁니다.”
얄미운 면상을 휘갈기고 싶은 걸 꾹 참은 솔레아는 선상 파티 내내 굳은 얼굴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견뎌 냈다.
두 번 참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간만의 이슈에 환장하며 달려들었다.
한 주 내내 신문은 아사라 파울과 솔레아의 스캔들에 대해 떠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신문에 아사라 파울의 인터뷰가 실렸다.
[처음으로 내 온 마음을 주고 싶은 사람 ―아사라 파울 왕자]
이라는 개같은 제목으로.
솔레아는 신문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발 새끼, 세 번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