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5화 (183/192)

외전 15화

엘 벨다르는 랏샤에게 모든 과거를 보여 주지 않았다.

사파테아도가 앙심을 품은 8 왕국 왕자들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복수심에 불타던 그녀는 저주 같은 약속을 내뱉으며 죽어 갔다.

‘절대로 이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야. 반드시 다시 태어나서, 그놈들을 찾아서 모조리…… 죽여 버릴 거야. 그놈들의 후손도……. 엘루, 도와줘. 도와줘.’

차라리 살려 달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피는 알고 있었던 거다. 자신이 틀림없이 죽을 거란 것을.

온몸에 독이 퍼진 이후였다. 왕자들의 조력자 중 마법사가 있었던 모양인지 해독 마법이 전혀 듣지 않았다.

사피도 마법사니까 저 스스로 치료 마법을 써 봤겠지.

나를 불러내기 전에 이미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을 거야.

이젠 꼼짝없이 사피가 죽는다는 것을 실감하자 눈물이 흘렀다.

사피는 피를 토하면서도 엘루의 두 눈을 꿰뚫을 듯 응시했다.

‘엘 벨다르, 나의 엘루. 기다려 줘. 내가 그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다시 태어날 테니까.’

‘알았어, 알았어. 사피, 이제 그만 말해. 제발, 그만…….’

그게 끝이었다.

얼음 속에서 태어난 용이 좋아한다는 고백을 할 틈도 없이 위대한 빛은 꺼져 버렸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위대한 빛이 다시 나타나길, 다시 얼음 속에 빛을 비춰 주기를.

“이젠 내 이름을 알잖아, ……날 다시 불러 줘. 사피.”

엘루의 떨려 오는 목소리가 랏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랏샤의 푸른 눈동자는 가만히, 아주 오랫동안 엘 벨다르를 바라봤다.

솔레아와 그레이는 그런 랏샤와 엘루를 지켜보기만 했다.

실은 끼어들 수가 없었다.

아무스와 사랑을 약속할 때는 저런 ‘맹약’을 맺은 게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강력한 에너지는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솔레아는 두 귀를 꼭 막고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용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고막 안에서 징징거리며 울리는 것 같았다.

용과 인연을 맺은 솔레아에게만 강하게 느껴지는 건지, 그레이는 그런 솔레아의 어깨를 묵묵히 감싸 안아 줄 뿐이었다.

“오빠. 이상한 소리 안 들려?”

“……소리는 안 들리지만…… 누군가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같이 느껴져. 아마 저 용이 맺고자 하는 맹약 때문이겠지.”

솔레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후 랏샤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서서 엘루를 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이 열렸다.

“엘 벨다르. 너와 맹약을 맺겠다.”

엘루의 녹색 눈이 반짝 빛났다.

“나, 엘 벨다르는 카라샤펠 로즈 폰 사파테아도…….”

“아니.”

랏샤는 그의 말을 끊었다.

“맹약 조건은 내가 제시하지.”

“하지만…….”

“내가 주인이라며.”

황제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카라샤펠 로즈 폰 사파테아도 드 제르노아, 엘 벨다르의 주인은 맹약 조건으로 그에게 ‘자유’를 주겠다.”

“뭐?”

“엘 벨다르는 이제부터 왕을 수호할 운명을 지닌 용이 아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혹은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다.”

“잠, 잠깐만……. 사피, 아니, 로즈. 나는 그런 게 아니야.”

“아니. 이게 내 명령이다. 엘 벨다르.”

내내 건조한 표정으로 그를 보던 랏샤의 눈에 순간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물론 이내 잠잠해졌지만.

“방금은 내 호의고, 지금은 경고야. 잘 들어. 다시는 날 누군가의 대신으로 여기지 마. 물론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랏샤는 엘루를 등지고 솔레아와 그레이에게로 걸어갔다.

“이제 돌아가자. 할 일은 끝났어. 아, 참.”

잊고 있는 게 생각났다는 듯 랏샤는 짧은 탄성을 내뱉더니 제 팔을 바라봤다.

팔찌가 채워진 자리였다.

그녀는 미련 없이 팔찌를 빼내고 뒤로 던졌다.

엘루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로즈!”

그걸로도 모자라 랏샤는 종이 두 장도 머리 위로 높이 던져 버렸다.

“속이 시원하네. 겨우 며칠이었지만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로즈! 아니, 랏샤!”

랏샤는 그제야 뒤돌았다.

“그래. 내 친구는 나를 랏샤라고 불러. 로즈도, 사피도 아니라. 네 마음대로 질척대지 말라고. 자, 이제 가. 가서 네 남은 평생을 즐겨. 환생이든 뭐든 간에 난 사피가 아니니까. 나는 나야. 그리고 난 네게 자유를 주고 싶었고. 이제 꺼져.”

정말로 개운하다는 듯 랏샤는 활짝 웃으며 솔레아의 어깨를 둘러 안았다.

“용이란 것들은 왜 이리 집착이 심한지, 니네 아무스도 네가 받아 줘서 망정이지.”

“랏샤. 우리 아무스는 기다린 거라니까요. 내가 기다리라고 말해서?”

“그래, 알았으니까 빨리 집에나 가자고.”

“저희 집이요? 폐하 집이요?”

“…….”

글쎄.

황궁이 집이라고 불릴 만한 공간이었나.

하지만 누군가에게 납치될 때마다 차라리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러니 그런 것도 집이라면 집이지.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 난 황제가 될 몸이었고, 이젠 됐는데 뭐 어쩌겠어. 될 대로 되라지.

황제는 씩 웃으며 답했다.

“내 집.”

뒤에서 엘루가 소리쳤다.

“사피를 죽인 8 왕국의 왕자들의 후손들이 아직 살아 있어! 살아 있단 말이야!”

“초대 황제의 하나뿐인 아들이 2대가 되었다더군. 그건 그럼 친자식이 아니었나?”

“……맞아. 카슬란 왕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당시에는 어렸지만…….”

“그럼 내 몸에도 8 왕국 왕자 중 한 명의 피가 흐른다는 거네. 어떡하지? 죽을까?”

랏샤는 순식간에 그레이의 품에서 단도를 꺼내 제 목에 가져다 댔다.

근처에 어둠도, 시녀들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가 보고 있었다면 발칵 뒤집어질 게 분명했다.

“어우, 폐하. 제가 왕년에 소매치기랑 앵벌이 좀 해 봐서 아는데 재능 있으시네.”

“오빠, 좀!”

이 와중에 그레이가 농담을 던지다가 솔레아에게 팔뚝을 맞았다.

랏샤는 제 목에 칼을 들이댄 채 엘루를 꿰뚫어 버릴 것처럼 똑바로 바라봤다.

“죽은 사람 붙잡고, 의미 없는 원망이나 수천 년 해 대는 게 사랑인가? 내가 기꺼이 죽어 줄 테니 답해 봐. 이젠 자유를 찾았잖아? 죽기 전에 그녀가 남긴 기다리라는 명령 때문이었으면 이젠 자유를 찾았으니까 말해 보라고.”

엘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제 안을 가득 채우던 열망과 그리움, 분노가 서서히,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랏샤가 건 맹약의 조건이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랏샤의 목 바로 옆에서 번쩍이는 칼날은 여전히 끔찍하게 느껴졌다.

이게 주인을 향한 열망이 아니라면 뭐지?

동정인가? 내가 감히 누구를 동정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건 동정이라기보다는…….

엘루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 카라샤펠이 대신 답했다.

“내가 볼 땐 그냥 징그러운 집착 같아, 엘 벨다르.”

그게 끝이었다.

랏샤는 칼을 다시 그레이에게 돌려주고 그들과 함께 돌아갔다.

“아 참, 여기 사유지니까 너도 빨리 다른 곳으로 가.”

라는 말을 남기고.

얼음 속에서 태어난 용이 제 감정에 대해 알아보기도 전에 위대한 빛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물론 사유지가 아닌 곳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들과 함께 섞여 살았다.

인간의 삶을 살며 엘루는 서서히 그들에게 녹아 갔다.

“계란 얼마예요?”

“10제르.”

“왜 이렇게 비싸요? 지난주에는 7제르였는데.”

“우리 닭이 아파.”

“어…… 알겠어요.”

아프면 어쩔 수 없지.

동네에선 잘생겼지만 조금 모자라고 순수한 총각이라 소문도 나 보고.

“엘, 좋아해요.”

“……미안. 너랑 나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

“대체 몇 살인데요?!”

“2천, 아니 3천…….”

“뭐?! 차라리 싫다고 해! 이 개자식아!”

“……용인데.”

고백받았다가 주먹에도 맞아 보며.

인간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사랑이 넘치고, 순수했다.

가끔 악한 인간들도 만났다.

누군가에게 원망도 받아 보고, 넘치는 친절에 감동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인간의 삶은 풍부했다.

바다도 넓었고, 땅도 넓었다.

가 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전 세계를 돌아본 후 엘루는 다시 ‘랏샤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사이에 랏샤는 꽤나 성숙해져 있었다.

“뭐야. 왜 왔어. 보초병들 다 목을 잘라야 하나.”

그리고 여전히 시큰둥했다.

“……결혼은 했어?”

“아니.”

“결혼을 하고 애도 키워 보고 해야 어른이 되지.”

“이 늙은 용이 오랜만에 보자마자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우리 아버지도 안 하는 말을 하고 있네.”

“미안. 인간들이랑 섞여 살아서.”

“날아다니라고 했더니 걸어 다니고 있네.”

“……아버지 아직 살아 있어?”

“건강하시지. 요즘도 매일 아버지 재우러 간다.”

서른을 넘긴 카라샤펠은 아름다웠다.

처음 봤을 때처럼.

사피를 처음 봤을 때가 아니고, 종이 너머로 흐리게 봤던 그때처럼.

“사피랑 네가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그 여자는 멍청하게 제가 이룬 업적을 빼앗겼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역사가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 바로 옆에 있었거든. 검수도 직접 했어.”

어, 그렇게까지 차이점을 간단히 말할 줄은 몰랐는데.

“여기 찾아온 이유는…… 네가 사피의 역사를 되돌려 줘서, 그게 고마워서…….”

신문에서 봤다.

초대 황제는 사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으며 초대 황제의 초상화로 알려진 그림 속 인물은 9 왕국의 통일을 도왔던 황제의 용이었다고.

그걸 보고도 엘의 동네 사람들은 엘의 등짝을 두들기며 ‘총각! 미남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용이랑 똑 닮았네, 그려!’ 하고 허허 웃을 뿐이었다.

차마 거기다 대고 ‘제가 걔예요.’라고 말은 못 하고 엘은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오래 걸렸지. 사료를 찾아내기 힘들었거든. 하루 이틀 걸리는 일도 아니고, 내가 바빠서 말이야. 그래도 너한테 고맙다는 인사 들을 이유는 없는데? 여긴 내 나라야. 내 나라의 잘못된 역사를 고치는 건 내 일이지.”

여전히 당당하고.

“할 말 끝났으면 꺼져. 바빠.”

여전히 못됐다.

“뭘 봐. 나 사피 아니야.”

그런데 왜 자꾸 생각이 났을까?

당신은 기다리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유롭게 살라며 등을 떠밀었기에 그대로 살았는데.

왜 자꾸 당신 생각이 났을까.

“랏샤.”

“네가 내 친구야? 어딜 감히.”

“……폐하.”

“옳지.”

“……고마워.”

“‘뭐가’라는 질문은 너무 뻔하지? 그래. 알고 있다. 할 말 끝났으면 가. 정말로 바쁘니까.”

농담이 아닌지 책상 위엔 서류들이 한가득이었다.

엘은 책상에 놓인 서류들 위에 손을 올리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공립학교 건설 기획안, 지방 공공 마차 증대 제안, 내년도 예산 심의안, 역사서 재편찬 부서 설립 제안, 축제 예산 및 기획.”

랏샤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사피보다 훨씬 악랄해 보이면서도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엘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경이었나 보다.

본인이 태어난 자리를 원망하지 않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자신만만한 당신의 모습을 동경했나 보다.

엘은 이제 알 것 같았다.

사랑과 밀접하게 닿아 있어, 선을 조금만 넘으면 그렇게도 될 것 같았다.

엘은 이제야 남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게 눈앞의 이 사람이었으면 한다.

“저는 시골에서 올라온 엘이라고 합니다. 유능한 자만 곁에 두신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폐하. 보시다시피 능력을 넘치도록 갖추었는데 저를 곁에 두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흐음…….”

엘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랏샤에게 내밀었다.

“용의 비늘입니다. 지니고 있으면 행운을 불러 온다는 전설이 있죠. 미신이긴 하지만 적어도 칼에 뚫리진 않습니다.”

“좋군.”

또 꺼냈다.

“용의 손톱입니다. 갈아서 검으로 만드시면 그 어떤 철도 뚫을 수 있는 명검이 됩니다.”

“그것도 좋군.”

이번엔 팔에 차고 있던 무언가를 덜걱거리며 풀어서 내밀었다.

“용의 팔찌입니다. 단순한 팔찌처럼 보이지만 수천 년은 된 물건이죠. 어디에서나 용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좋지만, 난 그 용을 풀어 준 걸로 기억하는데?”

“그 용이 자유를 찾아 당신 곁으로 왔습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요.”

“난 내 인재를 맘껏 굴리는 편이야.”

“저도, 인간의 삶을 맘껏 즐기는 편입니다.”

“시골 평민 주제에 내 신하가 되겠다니, 꿈도 크군. 신하들의 반발이 있겠어.”

랏샤는 씨익 웃으며 서류 위에 놓인 엘의 손등을 두어 번 다독였다.

그녀 나름대로의 위로였다.

잘 지내는 걸 보니 좋다는, 따스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얼음 속에서 태어난 용은 인간의 온기 속으로 돌아갔다.

그게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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