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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4화 (182/192)

외전 14화

메리의 충언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더 강건한 황제가 되는 것.

언제가 솔레아에게 제안했듯 누구도 무시 못 할 자리에 올라가는 것은 랏샤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일찍 죽은 황비 때문에 장녀임에도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모든 황자들이 죽고 나서, 심지어 선황마저 정신을 놓은 후에야 황제가 되지 않았던가.

대놓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지금도 랏샤의 자질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솔레아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밝혀진 용의, 단 하나뿐인 주인이기 때문에 그녀가 반란을 일으킬까 봐 불안해하는 귀족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엘루와 맹약을 맺는 것은 카라샤펠이 황제로서 제 황권을 다지는 가장 쉽고 확실한 길이었다.

대륙 전체에 전쟁이 일어날 위험은 있지만 용이 두 마리나 있으니 군사력이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솔레아는 저를 배신할 만한 인사가 아니며 아무스는 솔레아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명제를 두고도 랏샤는 메리에게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강한 황제여야 했다. 신하 앞에서는 더더욱.

이렇게 감정에 휩쓸리는 멍청한 황제가 될 거라면 차라리 어린 시절 납치당했을 때 죽었어야…….

그만하자.

망설임을 거둔 황제는 메리를 향해 명령했다.

“주인을 앞서 나간 충직함은 불충과 다름없다. 그게 너의 죄다.”

“……폐하.”

“내 최측근인 베르고 공녀가 마법사 협회장이 되고, 마법진을 그리지도, 주문을 외우지도 않은 채 고급 마법을 운용하니 그에 조바심이 일어서 성급하게 행동한 게 아닌가? 넌 내가 부리는 유일한 마법사 시녀였잖아, 메리. 그 자리가 위태로워져서 미친 짓을 한 거지?”

정곡을 찔렸는지 메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카라샤펠은 꼿꼿이 선 채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메리를 한껏 깔보며 말했다.

“그래도 친구와 신하는 구분할 줄 알았어야지. 네 주제를 알았어야 한다는 뜻이란다.”

못 알아들을까 봐 친절히 뜻풀이까지 해 준 랏샤는 몸을 돌려 지하 감옥을 지키는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처분은 생각해 보겠다. 당분간은 여기 있도록. 다들 올라가지.”

카라샤펠은 무명천에 곱게 싸인 종이 두 장과 팔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곤 뒤에 있는 시녀에게 그것을 챙기라 명했다.

지금 엘루를 만나고 싶진 않았다.

업무를 보고 있는 도중에도 계속 사파테아도와 엘루의 이야기, 메리가 꺼낸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굴지만 결코 유일하지 않으며 완벽을 위한 서로의 한 조각인 솔레아와 아무스의 관계도 떠올랐다.

“하…….”

자신답지 않게 고민이 길다.

결국 카라샤펠은 팔찌와 종이 두 장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따라오지 마.”

집무실 내의 검은 어둠을 향해 말하자 곧장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폐하. 바로 어젯밤에 저희를 물리셨다가 중요한 물건을 도둑맞지 않으셨습니까.”

어둠들은 랏샤의 성격을 훤히 아는 자들이라 굳이 ‘용’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랏샤는 그들의 언행에 내심 흡족해하며 답했다.

“그래서 이번엔 믿을 만한 자들과 가려고. 자네들은 늘 걱정이 과해.”

마침 베르고 일가가 출근했다.

랏샤는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눈치 게임 1.”

“2!”

“3!”

“……혹시 제가 또 졌습니까?”

디에르고는 업무를 위해 남기로 했다.

사실 랏샤는 일부러 그를 겨냥해 눈치 게임을 한 것이었다.

꽉 막힌 황궁 놈들 입장에선 나이 많고 박식한 디에르고 공작이 가장 믿음직스러울 테니.

랏샤는 용과 끝장을 보고 올 생각이었다.

눈치 게임은 그냥, 산윤솔이 하는 걸 보니 재밌어 보여 한 거고.

매번 당하는 디에르고 공작의 떨떠름한 얼굴을 보는 것 역시 웃겼지만.

“자, 승자들은 가자고.”

“어디요? 또 지하 창고로 가요?”

“아니. 하룻밤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어. 오늘은 그 용과 끝장을 볼 거야. 작은아버지뻘인 공작에게는 다녀와서 말해 드리지.”

랏샤는 솔레아에게 용이 튀어나와도 될 만큼 널찍하고, 그 누구도 훔쳐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 부탁했다.

어둠들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으며, 굳이 몸을 움직여 따라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제국 최고의 마법사와 정치범 사냥꾼 황궁 기사가 있는데 누가 감히 공격을 하겠는가.

솔레아는 마법으로 적당한 장소를 찾다가 다 함께 소풍을 갔던 북부 국경 근처로 모두를 이동시켰다.

눈을 감았다 뜨니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보였다.

랏샤는 곧장 손목에 팔찌를 끼웠다.

은은한 빛이 주변을 감싸며 또다시 ‘사파테아도’의 기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맹약을 맺던 때의 기억 같았다.

‘엘 벨다르. 내 명령에 복종할 수 있겠어?’

‘……응, 사파테아도.’

‘내가 널 엘루라는 이상한 이름을 불러도?’

사파테아도는 두 눈을 휘며 웃었고, 엘 벨다르라 불린 자 역시 소리 내어 웃었다.

‘네가 부르는 게 내 이름이 될 거야. 내가 그렇게 살게.’

‘그러도록 해. 넌 이제부터 내 거니까.’

그 기억 속에서 사파테아도라고 불린 이는 놀랍도록 저와 닮아 있었다.

랏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주변에서 솔레아와 그레이가 가만히 서 있는 저를 걱정하며 부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만 집중했다.

‘나, 엘 벨다르는 사파테아도를 수호하는 용이 되어 그를 위대한 빛으로 이끌 것을 약속합니다.’

사파테아도의 푸른 눈에 비친 은색 용의 화려한 비늘이 번쩍거리며 빛을 뿜어냈다.

이건 엘루의 시선에서 재현된 기억이었다.

왜지? 저번엔 분명히 사파테아도의 기억이었는데.

의문을 가지자마자 화면이 바뀌었다.

또 전쟁터였다.

엘루는 하늘 위를 날아다니며 입 속에서 차가운 얼음을 내뿜었다.

그의 숨결에 맞은 인간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가 산산조각 나며 깨지고 말았다.

시체조차 찾기 힘든 전투가 몇 날 며칠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엘 벨다르는 고통에 힘겨워했다.

다친 상처 때문이 아니라 많은 인간들을 죽이고, 제 동족인 용을 죽이는 데 동조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사파테아도 역시 가슴 아파했다.

감정이 동요한 모양인지 그녀 역시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9 왕국을 통일해야 할 ‘위대한 빛’이었다.

‘엘루. 내 어머니는 안디라노 사람이고, 할아버지는 알테이몬에서 오셨어. 그리고 나는 제르노아인 아버지와 함께 이 제르노아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컸어. 그리고 끝없는 전쟁 때문에 모두 잃었지. 그들의 삶과 고통을 모두 아는 내가 아니면 누가 9 왕국을 통일해 제국으로 세우겠어. 이 의미 없는 전쟁을 내가 끝낼 거야. 그러니 엘루……. 약해지지 마. 제발.’

엘루의 시야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고개를 끄덕인 모양이었다.

엘루의 기억 속에서 얼음 계곡 사이로 떨어져 온몸이 바스러진 사파테아도가 보였다.

얼음 용과 인간의 첫 만남이었다.

사파테아도는 전설 속 잠든 용을 깨우기 위해 홀로 얼음 산을 오르다가 얼음 계곡 사이로 떨어지며 엘루를 얻은, 용기 있는 자였다.

역사 속 선구자는 모든 것을 깨달은 성녀가 아니라 모든 이가 피한 길을 끝까지 파헤친 용사였다.

사파테아도의 용기에 반한 엘 벨다르는 제 이름을 가르쳐 준 뒤, 그녀의 바스러진 몸을 고쳐 줬다.

얼음 아래에서 맹약을 맺고 다시 제르노아로 돌아간 사파테아도는 빠르게 9 왕국 통일 전쟁을 끝냈다.

은색 용이 뱉어 내는 얼음으로 얼리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사파테아도는 세상이 제 발아래에 있는 듯했다.

그렇게 9 왕국을 통일한 뒤 세워진 제국은 평화로웠다.

신하들이 떠들어 대기 전까진.

‘폐하의 업적을 그대로 실록에 실으려 하니, 마치 악인과도 다름이 없습니다.’

‘……자네들은 내가 남황제였어도 그리 말했을까? 호방한 성정으로 전국을 통일한 위대한 왕이라 칭송했을 것 같은데.’

‘억측이십니다. 전쟁 도중 다소 과한 부분이 있으셨기 때문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의 용이 피에 미쳐 날뛰었다고 기록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는 내 명령에 충실히 따른 것뿐이다. 역사에 그를 욕되게 남기지 마라. 피에 미쳤다고 할 만한 이는 오히려 내가 아닌가?’

‘그러면 후대 백성들에게 폐하께서 잔혹하고 무정한 인물로 그려질 수도 있어…….’

‘내가 잔혹하고 무정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래도.’

‘무슨 상관이냐 물었다. 정확히 답해야 할 것이다.’

역사가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에도 의견은 절대 굽히지 않았다.

결국 사파테아도가 혼자 한 일이 아니라, 사파테아도가 부리는 용이 제르노아를 제외한 8 왕국의 멸망에 앞장섰으며 인자하고 성스러운 사파테아도는 미친 용을 잠재우고 황제가 되었다는 내용이 소문처럼 돌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네가 그런 게 아니야!’

‘괜찮아, 사피. 나는 괜찮아.’

‘엘루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한 전쟁으로 인한 희생이 컸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전쟁이란 건 그럴 수밖에 없잖아. 그 모든 일들이 왜 네 잘못으로 남아서…….’

‘난 그저 짐승일 뿐이고, 넌 인간들의 황제잖아. 사피, 난 괜찮아. 내가 짊어지고 갈게.’

‘……어딜 간다는 거야?’

‘잠깐 떠나 있으려고.’

그 순간 엘 벨다르의 속마음이 랏샤의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사피 네 결혼식을 볼 자신이 없어.’

사파테아도는 황권을 강화하고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제르노아를 제외한 8 왕국의 왕자들과 결혼을 진행했다.

이미 사파테아도에게 사랑을 느낀 엘루에게 그녀의 결혼식을 지켜보는 건 고문과도 다름없었다.

사파테아도의 결혼식 날 엘루는 제 마음 한 번 고백해 보지 못하고 조용히 시들듯, 종이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리고 수천 년 뒤 이달론 때문에 역사 속에서 용이 사라졌다.

전쟁광으로 묘사되었던 남성은 그대로 첫 황제가 되었고, 9 왕국의 통일은 그의 훌륭한 업적으로 남았다.

인자하고 성스러운 사파테아도는 이름을 뺏긴 채 그저 성녀로만 기억되었다.

엘루의 회상이 끝났다.

랏샤는 서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눈앞에 성채만큼 커다란 은색 용이 서 있었다.

그의 은빛 비늘은 햇빛을 받아 단단한 철제 갑옷처럼 번쩍거렸다.

그런 주제에 순해 보이기 그지없는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엘 벨다르는 머리를 아래로 숙여 카라샤펠과 눈을 맞추고 말했다.

“초대 황제 사파테아도의 후손이여 나와 맹약을 맺자.”

“……뭐 때문에?”

“방금 봤잖아. 나는 네게 통일된 제국을 안겨 줄 수 있어.”

“웃기지 마. 나를 네 짝사랑 대타로 삼으려는 거 아닌가? 미안하지만 난 누굴 대신하는 그런 인물이 아니거든.”

얼음 속에서 태어나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자랐던 엘 벨다르를 통째로 바꿔 놓았던 사파테아도.

그녀의 인생을 똑같이 따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네가 날 도왔다가 또 멍청한 놈들이 네가 저지른 전쟁이니 네 이름으로 기록을 남기자고 하면 어떡해. 진짜 잔악무도한 사람은 나인데 말이야. 역사는 반복되잖아? 안 그래?”

“……이번엔 그러지 않도록 할게. 그냥, 내가…….”

엘 벨다르, 엘루는 힘겨운 듯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바닥에 완전히 엎드렸다.

그러곤 랏샤가 아닌 다른 이에게 고백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네가 없는 공간에서 견딜 자신이 없어. 수천 년을…… 네가 어떻게 결혼했을지 상상하고, 괴로워하고, 후회했어. 미안해, 사피. 도망쳐서 미안해. 너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또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너를 겹쳐 보면서 도망쳐서 미안해…….”

엘루의 녹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런데 정말로, 더는, 네가 없는 세상을 견딜 자신이 없어.”

용의 죽음은 너무 멀었다. 처음 품은 감정은 죽음보다 더 지독했고.

엘 벨다르는 사파테아도가 죽던 날을 회상했다.

‘엘 벨다르, 나의 엘루. 기다려 줘. 내가 그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다시 태어날 테니까.’

지금이 그때라면, 반드시 로즈와 맹약을 맺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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