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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3화 (181/192)

외전 13화

늦은 밤, 랏샤는 다시 보물 창고로 걸어갔다.

용을 불러내는 보물이 팔찌라는 걸 알아낸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보물창고에 있는 팔찌의 종류는 차고 넘치게 많았지만 엘루의 말대로 그중 딱 하나만 팔에 찼을 때 다른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는, 팔을 중심으로 온몸이 다른 것으로 변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같은 환상을 봤다.

용의 등을 타고 전장을 누비는 짧은 환상을.

선대 황제들은 몰랐을 것이다. 이게 용을 부를 수 있는 보물이라는 걸 알았으면 창고에 처박아 둘 리 없었을 테니.

아마도 초대 황제가 귀중하게 여기던 물건이라 대대로 황제의 물건이라 여겨지며 전해져 내려온 듯했다.

요요하게 빛을 뿜어내던 커다란 은색 팔찌는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랏샤의 팔에 맞게 크기가 줄어들며 스스로 빛을 감췄다.

자세히 보니 팔찌에 박힌 빛이 나는 초록색 보석 안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틀림없이 왕을 수호하는 용을 불러낼 수 있는 매개체라는 증거였다.

랏샤는 팔찌를 소매로 가린 후 제 방으로 올라왔다.

물건을 찾았으니 용을 불러내야 하는데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황궁 정원은 보는 이가 너무 많았다.

랏샤는 작게 한숨을 쉬며 창밖을 내려다봤다.

솔레아가 말한 것처럼 대단한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속박되어 있는 이 용이 딱하다고 생각했을 뿐. 그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을 투영하며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그런 건 아니었다.

……고 생각한다.

더 미룰 수 없겠군.

이 용에 대한 생각이 길어지면 쓸데없는 감상에 빠질 것 같았다.

랏샤는 얼른 이 말 많은 용을 풀어 주고 각자 갈 길 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황제는 창가 앞 의자에 미동도 없이 앉은 채 가만히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물러가.”

그러자 어둠 속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폐하, 어디에서 위험이 닥칠지 모릅니다.”

“괜찮으니 물러가.”

“처음 저희를 불러 모으셨을 때 절대로 곁을 비우지 말라는 명을 내리신 것은 폐하이십니다.”

“……내가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해야 될 정도로 힘이 없는 황제라니.”

그제야 ‘어둠’들이 물러나는 게 느껴졌다.

비밀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야 비밀이었다.

눈치 빠른 솔레아가 제 마음의 빈틈을 알아채고 물음을 던진 것은 의외였지만, 그런 약삭빠른 점 때문에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던 거니 탓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용을 풀어 주는 순간 해이해질 게 분명한, 자유롭게 하늘을 가르며 멀어질 용을 멍하니 바라볼 자신의 얼빠진 표정은 누구에게도 보일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 황제가 된 어린 여자는 팔찌와 종이 두 장을 겹쳐 용의 이름을 불렀다.

“엘루.”

물건도 찾아냈고, 용의 이름도 불렀으니, 설령 황궁을 부서뜨리며 그가 나타난다 한들 놀라지 않으리라고 랏샤는 각오를 마쳤다.

그런데 엘루는 이전처럼 목소리만 들려주었다.

“사피! 가 아니라 사피의 후손. 찾아냈어?”

혹시 맹약에 다른 주문이라도 걸려 있는 건가?

“……그래.”

“다시 맹약을 맺자. 그럼 내가 널 지킬게. 너의 용이 되고, 네가 원할 때 어디든지 갈 수 있도록 내가 너의 자유가 되어 줄게.”

랏샤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어제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너는 왜 황제와 맹약을 맺는 거지? 황제의 말에 거역할 수 없게 되니, 족쇄를 차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걸 하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야.”

“이득이라곤 쥐뿔도 없는 약속을 여태 지키며 다 찢어져 가는 이 종이 쪼가리에 남아 있었던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말해 봐. 괜찮으니.”

“나는…….”

종이 건너편의 용은 말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랏샤가 피곤한 두 눈을 손으로 꾹 눌렀다 떼어 냈다. 그녀의 참을성이 바닥나기 직전, 용이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다시 불러 줄래?”

“뭐?”

“내 이름. 한 번만 다시 불러 줘.”

“이름에 힘이 있나? 그러고 보니 솔레아도 아무스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약속을 했다고 했지. 너도 그런 약속을 한 건가? 혹시 나를 속이려는 거면…….”

“아니야, 사피. 그런 게 아니야. 네 이름은 뭐야?”

“……카라샤펠 로즈 폰 사파테아도 드 제르노아.”

“엄청 기네!”

“그렇긴 하지. 선조들의 이름을 갖다 붙였으니까.”

“멋진 선조들처럼 너도 멋지게 살았으면 하는 염원이 담긴 이름인가 봐. 적어도 내가 아는 사파테아도는 엄청 강하고 멋있었어, 로즈.”

“아니, 내 친구들은 나를 랏샤라고 부르는데.”

“그럼 난 로즈라고 부를게.”

다정한 목소리에 랏샤는 저도 모르게 그러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래서 허하지 않았다.

약해지면 안 된다. 그런 것을 허락할 순 없었다.

“엘루. 자, 이름을 불렀어. 네가 궁금해한 내 이름도 말해 줬고. 이제 뭐 때문에 네가 그렇게 맹약에 목숨을 거는지 말해 봐.”

자꾸 조바심이 일었다.

이 용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얼른 날아가 버리면 좋을 듯싶었다.

그냥 잠이나 자고 싶었다.

동정은 해악이다.

적어도 랏샤는 그렇게 배우며 자랐다.

“이유 같은 건 없어.”

“한 번만 더 내게 거짓을 고하면 종이를 찢어 버리겠다.”

“아니야! 로즈, 거짓말 아니야. 정말이란 말이야. 나는 그냥 네가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한 번 더 불러 주기를, 아니, 수백, 수천 번 더 불러 주기를 바랐어. 네가 위험할 때 찾는 이가 나이길 바랐어. 그래서…… 기다린 거야.”

의외였다.

사람이, 아니, 용은 그런 사소한 이유로 천 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는 우매한 존재였나.

“쓸모없는 짓을 하는군.”

“로즈는 그런 적 없어?”

앉아 있는 것이 묘하게 버거운 듯해 랏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잠옷으로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모로 누웠다.

“어떤 거? 너처럼 이름만 불려도 좋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런 짓? 당연히 없지.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아니.”

“그래, 그 말대로 없어.”

“……그래서 외로워 보여, 로즈.”

일순간 말을 잊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 대놓고 말한 적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누군가의 눈에 외로워 보일 거라는 생각을 한 적조차 없었다.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이래서야 마치 허를 찔린 사람 같지 않은가.

랏샤의 복잡한 속도 모르고 용은 말을 이었다.

“난 네 목소리의 힘을 읽을 수 있어. 아주 강해.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듯하면서도 묵직해. 너는 강한 사람이야. 어쩌면 사파테아도보다 더.”

“그런데?”

랏샤는 팔을 벤 채 겹쳐진 종이 두 장 사이로 빛을 뿜고 있는 문양을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인지 그 무거운 목소리가 너무 외롭게 느껴져. 왜일까. 난 그냥 네 목소리를 들으면 네 옆에 있고 싶어져.”

“하! 감상적이군. 계획도 없이. 지금 솔레아의 용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주변국의 경계가 강화됐다. 그런데 제르노아에 용이 두 마리가 있다고 하면? 당장은 황권이 강화되겠지만 주변국과의 외교에 큰 변화가 일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나라들이 연합을 맺어서 공격할 수도 있지. 넌 용이 두 마리면 든든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지금은 네가 초대 황제를 지켰을 때와 많이 달라. 새로운 무기들도 생겨났고, 인구수도 훨씬 많아졌지. 아무리 네가 하늘을 날아다녀도, 결국 인간의 발전에 지게 돼 있다고. 쓸모없는 죽음이 될 뿐이야. 나도 전쟁에 패한 쓸모없는 황제로 남게 되겠지.”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그리고…… 꼭 쓸모가 있어야 하는 걸까, 로즈?”

“왜 자꾸 아까부터 멍청한 소리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랏샤가 종이를 내려다봤다.

또 헛소리를 하면 종이를 떼어 낼 작정이었다.

“나는 로즈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로즈는 이미 잘하고 있어. 스스로를 닦달하며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랏샤는 종이를 떼 버렸다.

더 이상 용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황제가 된 여자는 팔찌를 뺀 후 두 눈을 꾹 감고 잠을 청했다.

며칠 뒤 사냥을 나갈 예정이니, 그때 텅 빈 벌판에서 다시 불러내어 설득을 하든 협박을 하든 해서 쫓아낼 작정이었다.

다음 날 아침, 랏샤는 늘 정해진 시간에 눈을 떴다.

그런데 자기 전에 협탁 위에 올려뒀던 팔찌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종이도.

랏샤는 빠르게 어둠들을 불러냈다.

“……시타, 세스, 란, 아토.”

근처에 있었는지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예.”

“협탁 위에 둔 물건들이 사라졌다. 만약 누가 들어왔다면 내가 잠에서 깨지 않았을 리가 없어. 목격한 바가 있나?”

“저희는…… 어제 폐하께서 물러나라고 하신 후에 추가 명령이 없으셔서 다시 부르실 때까지 계속 침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거군.”

“……죄송합니다! 폐하.”

“됐어, 내가 아둔했던 탓이니.”

랏샤는 이를 악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상관없다.

어차피 그 용은 ‘사파테아도’의 부름에만 응답할 테니.

이대로 그 종이들과 팔찌가 세상을 돌아다니도록 두거나, 설령 파괴된다 해도 랏샤에겐 피해가 없을 것이다.

완전하지도 않은 용 따위 알 게 뭔가.

……하지만.

그럼 그 용의 자유는 누가 되찾아 주지.

그 용은 어떻게 다시 하늘을 날지.

하필 날씨가 맑았다.

하필 하늘이 너무 푸르고 청명해 눈이 시릴 정도였다.

그래서 랏샤는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폐하?”

뒤에서 쫓아오는 어둠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를 듣고도 대답하지 않고 일단 달렸다.

하늘이 맑고 청명해서. 그 하늘을 가르고 날아갈 어느 날개의 모습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 * *

범인은 시녀 메리였다.

고급 마법을 운용할 줄 아는 메리는 황제가 요 며칠 두문불출하는 이유가 무언가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마법을 이용해 그녀의 뒤를 몰래 밟았다.

랏샤는 어둠들을 이용해 황궁 사람들 가운데 거동이 수상한 자들을 찾아냈고 그중 랏샤의 최측근인 메리가 있었다.

“솔레아와 그녀의 용이 있는데 어떻게 몰래 마법을 쓴 거지?”

메리는 고문 때문에 이미 넝마가 된 몸뚱이를 하고서도 특유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래, 저런 인간이라 곁에 뒀던 거지.

적진에 붙잡혀 가도 이를 보이며 웃을 것 같아서.

“제가 원래 늘 폐하의 몸에 보호 마법을 걸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도청 마법도 같이 걸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훔쳐 가서 뭘 하려고 했나?”

“당연히 용을 불러내려고 했습니다.”

“도청을 했다면 그가 사파테아도의 부름에만 답하는 걸 알았을 텐데.”

“글쎄요, 원래 맹약을 걸었던 이는 죽었으니 자기 의지로 나올 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그 종이 안에 든 용이 나오기 싫어서 나오지 않는 거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용을 불러내서 나를 황위에서 밀어내려고 한 건가?”

“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두 팔이 천장을 향하도록 결박된 채 감옥 안에 갇혀 있는데도 메리는 보란 듯이 큰 소리로 웃어 보였다.

메리의 갈색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제가 모시는 황제는 카라샤펠 폐하, ……당신 하나뿐입니다. 나를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해 준 당신께 충성하는 것. 그것이 제 쓸모이자 삶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왜 내 의지를 반하고 이딴 도둑질을 저질렀지?”

묶여 있는 메리가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온몸을 튕기며 소리쳤다.

“폐하께서! 그 용을 풀어 줄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어떻게 그런 나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종으로 삼아 대륙을 집어삼키고 발아래 둘 수도 있습니다! 검은 용보다 오래 살았다고 했으니 훨씬 강하겠지요! 이달론의 간계에도 잡히지 않았으니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똑똑할 수도 있고요! 그런 용을 풀어 주려 하셨잖아요!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메리는 마치 어여쁜 인형을 쓰다듬듯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랏샤를 향해 무릎걸음으로 기어 왔다.

“왜냐하면 폐하께서는 더 대단한 분이시잖아요. 용의 자유보다, 그 쓰임을 깊게 생각하셔야죠.”

수년간 봐 온 충신의 충언인데.

처음으로 지친다는 감각이 랏샤의 온몸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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