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엘루와의 통신을 통해 알게 된 건, 그를 불러내기 위해선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나도 몰라, 사피. 네가 내게도 숨겼잖아.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며. 문양을 새겨 놓긴 했지만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해 놓았다고 했어.”
“문양도 안 보이면 어떻게 찾으란 거야?”
“사파테아도의 손이 닿으면 알 수 있어. 네가 만지면 반응이 올 거야.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이니까.”
“마력으로는 찾을 수 있는 게…….”
엘루가 솔레아의 말을 끊고 답했다.
“보통 마법으론 안 돼. 초대 황제가 세상에 태어난 첫 번째 마법사였으니까.”
“그래서 책에 선구자라고 적혀 있던 거구나.”
엘루는 그 이후로도 사피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였으며, 천재적이었는지 설명했다.
‘쟤가 얼마나 오랜만에 말을 해 본 거겠어요. 참으세요, 폐하.’
주변인들의 만류에 5분 정도 참을성 있게 엘루의 이야기를 들어 준 랏샤는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렇게 너를 아끼던 사피는 왜 사후에 남자로 기록되었고 너는 왜 거기 갇힌 거야?”
“인간들이 여황제의 업적이 너무 잔혹하다고 말했어. 얼마나 많은 업적을 세웠는데…….”
“대충 알겠으니까 이제 뒤의 질문에 대답해.”
랏샤는 상황을 빨리 정리하고 싶은 듯했다. 원래가 요점 정리를 좋아하는 빨리빨리 인간이었다.
“나는…… 사파테아도의 종이니까. 오직 그녀만 모시기로 맹약을 맺었으니까.”
“왕을 수호하는 용이라서?”
“응.”
“그럼 다른 왕을 수호했던 용들도 모두 너처럼 어딘가에 갇혀 있나?”
“……아니야. 내가…… 다 죽였어. 아니, 죽이는 데 동조했어. 아홉 개의 나라를 통일하던 때.”
“동족을 죽였다고? 왜?!”
아무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파테아도가 그러길 원했으니까. 그녀는 강력하고 완전한 통일을 원했어. 독립은…… 절대 꿈꿀 수 없는 완전한, 9 왕국의 통일을……. 그래서 내가 용들과 싸워서 그들을 붙잡았고, 인간들이 역린을 찔렀어.”
다들 말을 잃었다.
“황권 강화를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어. 다른 왕국의 왕들과 용을 죽여야 통일을 할 수 있었으니까.”
통일을 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선 엘루의 말대로 하는 것이 맞았다.
다만 동족인 용들을 죽여야 했다고 말하는 엘루의 목소리는 괴롭기 그지없었다.
“……사파테아도와 서로 사랑을 한 건 맞나?”
“……난 그랬는데, 사피는, 아니었을 거야…….”
대화를 이어 갈수록 엘루의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랏샤가 엘루의 말을 끊으며 제안했다.
“일단 너를 부를 수 있는 물건이 뭔지 찾아보겠다. 그 이후에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하지. 일단 난 사파테아도가 아니야. 환생이건 뭐건, 난 카라샤펠이다.”
“그래, 네가 사피가 아니라면…… 난 괜찮아. 더 이상 찾아 주지 않아도. 난 정말 괜찮아, 사피.”
그 말을 끝으로 엘루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빛 또한 사라졌다.
처음으로 엘루 쪽에서 통신을 끊은 것이다.
적막이 찾아온 가운데, 그레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일단 엘루를 불러낼 수 있는 물건부터 찾아볼까요?”
“……그래.”
다소 무거운 랏샤의 대답과 함께 수색이 시작됐다.
솔레아의 마법으로도, ‘이전의 마법’이긴 했지만 첫 마법사의 마법을 풀 수는 없었다.
결국 다섯 명은 황궁 지하 창고에 산처럼 쌓인 보물들 중에서 추정되는 것을 골라 확인해야 했다.
지도, 두루마리로 둘둘 말린 문서, 각종 보석과 목걸이, 반지, 왕관, 화병 등등.
그리고 셀 수 없이 넘치는 양의 금화들까지. 사람 키만큼 쌓인 금화는 하나씩 살펴보기도 힘들었다.
주저앉은 채로 금화들을 살피던 그레이는 이내 머리를 아래로 처박았다.
“아! 졸려! 아무스! 지금 몇 시야!”
“밤 11시 27분이다.”
“우리 아무스가 무슨 헤이 카카오도 아니고 그렇게 부르지 마!”
“그게 뭐야, 솔레아. 설명해 봐. 나 힘들거나 심심해서 그런 거 아니고 진짜 궁금해서 그래.”
“그레이 공자. 놀지 말고 일하지 그래.”
그렇게 말한 랏샤는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묵묵히 보물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이젠 아예 금화 위에 드러누운 그레이가 랏샤를 향해 물었다.
“폐하. 다른 사람들도 불러서 같이 찾으면 안 될까요?”
“아직 확실한 것도 없는데 알릴 순 없어.”
“사람들이 안 믿을까 봐 그러십니까?”
“……아니. 내가 사람들을 믿지 못해 그러지.”
반지를 비롯한 보석 종류를 모아 랏샤에게 가져다 대 보고 있던 솔레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폐하를 측근에서 모시는 기사들이나 시녀들은 폐하의 말을 믿지 않을까요? 그들은 랏샤에게 충성하니까. 폐하가 아니라, 랏샤에게 말이에요.”
“……그건 모를 일이지.”
랏샤는 허리를 숙인 상태로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난 그렇게 살아왔어. 이게 내 방식이야.”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살아온 내내 모두를 의심했기에 황제가 된 랏샤였다.
제 곁을 스치는 모두를 불신하는 것이 그녀에겐 당연한 삶이었다.
“피곤하다면 돌아가도 좋아. 지금은 9 왕국이 통일되던 시절처럼 황권이 약한 것도 아니니 용의 힘이 급하게 필요하지도 않잖아. 여차하면 아무스가 산윤솔을 지키기 위해 나서 줄 테고. 여긴 산윤솔이 사는 나라니까 말이야.”
랏샤는 모두에게 돌아가라고 명령을 내리고 난 후에도 보물들에 눈을 떼지 않았다.
“다들 돌아가. 내일 아침에 출근만 하면 돼. 내 작은아버지뻘인 공작과 그나마 있는 친구들을 고생시키는 게 미안하군.”
“……아니, 뭐, 언제부터 그렇게 아끼셨다고.”
그레이가 작게 투덜거리며 다시 보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디에르고가 묵묵히 일하는 랏샤의 팔뚝을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폐하께선 이 나라의 주인이십니다. 밤을 새워 일하지 마시고 폐하께서도 주무시러 가시지요. 내일 아침에 다시 찾으면 됩니다.”
다정한 말을 들은 랏샤는 본능처럼 그의 진심을 의심하며 비꼬았다.
“내가 용을 찾아 꺼내면 자네 딸과 그 곁의 용을 죽일까 봐 겁이라도 나는 건가? 초대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디에르고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랏샤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짝, 하는 소리가 창고에 울려 퍼지고 모두가 깜짝 놀란 눈으로 디에르고를 바라봤다.
황제 또한 누군가 제 몸에 손댄 게 처음인지 꽤 놀란 눈치였다.
“폐하가 그러실 분이 아니란 건 압니다. 저희를 믿으시니 여기까지 데려오신 게 아닙니까. 지금은…… 작은아버지뻘 되는 연장자로서 말하겠습니다. 가서 자라, 랏샤. 밤이 늦었잖니.”
“…….”
잠깐 굳어 있던 카라샤펠은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공에게서 농담하는 법을 배워야겠어. 이렇게 사람을 웃게 만들다니. 알았어. 다들 올라가자고.”
그제야 랏샤는 모두와 함께 지하 창고를 벗어났다.
이미 밤이 깊어 황궁 사람들 대부분이 잠들어 있었다.
랏샤는 제 아버지를 재우러 가야 한다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내가 재워 주지 않으면 잠드는 것도 까먹어서 말이야. 다들 잘 가고, 내일 보자고.”
솔레아는 모두에게 정원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뒤 조용히 랏샤의 뒤를 밟았다.
“랏샤.”
“왜.”
황궁 복도에 구름에 반쯤 가려진 달빛이 은은하게 비춰 들었다.
“사실은 엘루를 풀어 주고 싶은 거죠?”
“……뭐?”
“엘루는 동족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힘들어하고 있었잖아요. 그 맹약을 깨고 싶어 하시는 거죠?”
“네가 보기엔 내가 그런 거 같아?”
“네.”
솔레아의 대답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맑은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그녀가 이어 말했다.
“폐하는 따듯한 분이시잖아요. 랏샤는 그래, 내가 알아.”
“……디에르고와 피도 안 섞였으면서 말투가 비슷하군.”
“그럼요, 아빠잖아요.”
“하!”
헛웃음을 지은 랏샤는 선황의 방문 앞에 멈춰 선 채 솔레아에게 말했다.
“자유를 찾은 용이 어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그렇겠죠. 말 그대로 ‘자유’를 찾은 거잖아요.”
“나는 그가…… 내가 가지 못하는 곳을 날아다녔으면 좋겠어.”
처음으로 남에게 제 속내를 털어놓은 랏샤는 솔레아에게 짧은 눈인사를 건네고 선황의 방으로 들어갔다.
솔레아는 닫힌 방문 앞에서 허리를 숙여 황제에게 인사를 한 후 정원으로 나갔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선황은 늘 그랬듯 창가 앞에 서 있다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랏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제가 보이십니까?”
“네, 물론입니다.”
랏샤는 ‘오늘도 제정신이 아니시군.’ 하고 생각하며 그에게 걸어갔다.
“시간이 늦었어요. 주무셔야죠.”
“거참 이상하네요. 분명히 조금 전까진 낮이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가죠. 오늘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드릴까 해요.”
선황의 팔을 끌고 가 침대에 눕힌 랏샤는 성녀의 이야기를 했다.
위대한 힘을 가졌으나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역사에 남겨지지 못한 어느 여자의 이야기를.
보통 때 같았으면 벌써 잠들고도 남았을 시간임에도 선황은 눈을 빛내며 랏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성녀는 제힘을 이용해 용을 자신의 종으로 삼았답니다. 용을 마구 부릴 수 있는 마법이 걸린 물건을 이용해서요.”
“오오!”
“그 물건이 바로 이 황궁 지하 보물 창고에 있다고 하네요.”
선황은 어차피 랏샤가 아닌 다른 이와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 랏샤는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 보물은 대체 무엇일까요? 아버지.”
“나는 모르오. 용이 너무 불쌍해.”
“저도 그래요.”
“알려 주지 않을 거야. 용이 너무 불쌍해.”
“네, 저도 그가 불쌍하답……. 알고 계시는 거예요?”
랏샤가 목소리를 높이자 선황은 단박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불을 덮어썼다.
“저리 가! 저리 가! 살려 주시오! 누가 좀 도와줘! 살려 줘!”
몇 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선황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도와주시오! 도와줘요!”
랏샤는 한숨을 내쉬곤 방문을 열었다.
“아무 일도 아니다. 아버지를 재우는 도중에 환각을 보셨어.”
“아, 폐하와 함께 계셨군요.”
기사들은 안심하고 돌아갔다.
랏샤는 다시 선황의 곁으로 가 침대 옆 작은 스툴에 앉았다.
“늘 하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제 변덕 때문에 괜히 고생하시네요.”
그때였다.
선황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랏샤. 누가 네 손을 때린 거냐.”
“네?”
깜짝 놀란 랏샤가 선황을 바라봤다.
그는 정신을 잃기 전처럼 맑아진 두 눈으로 약간 발갛게 달아오른 랏샤의 오른손을 바라보더니, 이내 제 두 손으로 맞잡았다.
그러곤 노기 띤 음성으로 중후하게 말했다.
“감히 누가 짐의 딸의 몸에 손을 댔느냐. 당장 말해라. 가만두지 않을 테니.”
“아, 그게…….”
“아프진 않니?”
“저…….”
답지 않게 당황한 랏샤는 잠깐 말을 잇지 못하다가 늘 그랬듯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빙긋 웃어 보였다.
“전 괜찮아요. 친구가 저를 걱정해서 그랬어요. ……작은아버지뻘인 나이 많은 친구였지만요.”
“……휴, 또 몸 생각하지 않고 무리한 거니.”
선황은 랏샤의 손을 꼬옥 잡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말라서 어떡하니. 네게 물려주려고 준비해 놓은 팔찌가 헐렁하겠구나.”
“그런 것도 미리 주문해 두셨어요?”
“그럼. 역대 황제들은 모두 그 팔찌를 찼단다. 나는…… 그걸, 그걸, 이렇게 되기 전에…… 창고에 보관해 두고, 때가 되면 너에게 주려고…….”
중얼거리던 선황은 눈을 감더니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팔찌.
팔찌였구나.
랏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좋은 꿈 꾸시고요.”
그녀는 아버지의 주름진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