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1화 (179/192)

외전 11화

“……눈치 게임 할까. 1.”

“2.”

“얘들아. 폐하께서 열심히 일하고 계시잖니. 그런데 너희가 놀면 안 되지. 조용히 집중해서.”

“3. 공이 졌어.”

“와! 아빠가 졌다. 그럼 아빠가 마무리하고 오세요.”

“폐하. 우리는 잠깐 쉬러 가요.”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온종일 책만 들입다 파고 있던 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고, 허리야.”

“허리가 아프다고? 너 운동 더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레이 공자는 솔레아를 운동선수로 키울 건가 보지?”

“얘가 보기와 다르게 연약해서 그래요. 너 진짜 괜찮아? 아프면 내가 업어 주고.”

“……얘들아. 아빠도 조금쯤은 걱정해 주렴. 아빠는 이제 눈이 하나밖에 안 보이잖니.”

효자, 효녀긴 한데 불 속성을 띠고 있는 불효자, 불효녀는 잠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책이 너무 많았고, 해는 졌고, 허리도 아팠다.

“그럼 다 같이 쉬고 올까?”

“좋아요!”

황제의 제안에 불효자와 불효녀는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넷은 휴게실로 걸어가며 평소처럼 수다를 떨었다.

“아빠. 왜 책을 들고 가세요?”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잖니. 혹시 몰라서 책을 한 권 챙겨 봤단다. 쉬면서 읽으려고.”

“그럴 거면 도서관에서 계속 읽지 그래.”

“……폐하.”

“랏샤 말은 쉴 때는 맘 편히 쉬라는 뜻 같아요. 욕처럼 들리지만 폐하의 속내는 어쩌면 아마도, 진짜 착하실 수도 있어요.”

“야. 방금은 네가 폐하 욕한 거 아니냐.”

“들켰어?”

“키히히.”

“크큭.”

“감히 황제를 놀리다니. 너희 둘 다 처형이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폐하.”

네 사람이 낄낄대며 걸어가던 중 정원에서 익숙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솔레아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창가로 향했다.

“아무스 왔나 봐!”

그레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황제를 힐긋 쳐다봤다.

“아무스가 우리 산윤솔 데리러 온 게 몇 번인데 전, 폐하의 궁인들은 아무스만 보면 괴물이라도 본 듯 소리를 지릅니까?”

“글쎄. 워낙 거대해야 말이지. 너는 꼭 내가 마음에 안 들 때만 전 폐하라고 하더군. 나를 폐위시키고픈 너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구나.”

“무슨 복도에서 반역 얘기를 하십니까. 자, 다들 밖으로 나가…… 레아? ……벌써 나갔구나.”

또 순간 이동 마법을 썼는지 솔레아는 정원에 서 있었다.

아무스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려 뻗은 채였고, 용무스는 커다란 머리를 숙여 솔레아에게 안겼다.

“아무스. 이 밤에 어쩐 일이야.”

“네가 집에 안 오길래 왔어. 네가 안 오면 내가 와야지. 내가 네 집이 돼 주기로 했잖아.”

“헤헤.”

용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솔레아가 용무스의 머리를 안고 부비작거렸다.

“커흠! 흠! 흠!”

정원으로 나온 공작이 과하게 헛기침을 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어 랏샤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잘 왔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으니.”

인간으로 변한 아무스와 네 사람은 함께 휴게실로 향했다.

랏샤는 아무스에게 대충 상황 설명을 하고 종이 두 장을 꺼내 보여 줬다.

“이 문양을 알고 있나?”

“이건…… 왕을 수호하는 사명을 띤 용의 문장이다.”

“왕을 수호한다고?”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정확히는 모른다. 그저 예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지. 물론 모든 나라에 용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제르노아를 수호하는 용이 있었다는 거군,”

“아. 다르다.”

“뭐가?”

“‘나라’를 지키는 게 아니야. 본인이 선택한 ‘왕’을 지키는 거야. 내가 솔레아의 곁을 지키는 것처럼.”

“너네처럼 뽀뽀라도 대차게 해야 한다는 건가?”

“폐하! 아빠 앞에서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얼굴이 빨개진 솔레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괜찮단다, 레아. 아무스는 네 목숨을 구했잖니.”

“그래. 아무스 말고 네 짝은 없어. 우리 가족은 아무스를 인정하고 있어.”

라고 말하긴 했지만 디에르고와 그레이의 주먹은 펴질 줄을 몰랐다. 심지어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비록 네가 이제 겨우 한 살이지만…….”

“좀! 아빠!”

“그래…….”

겨우 디에르고의 주접이 멈췄다.

아무스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사랑을 할 필요는 없어. 그 용은 그저 다른 용과는 달리 자기 인생에서 인간을 선택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야. 용이 선택한 인간이 왕이 된다는 말이 있었다는군.”

“아! 그 전설은 이번에 해석한 고서에 있었어. 제르노아가 아홉 개의 분리된 나라였던 시절에 있었던 말이지?”

“응. 산, 맞아.”

어쨌든 그 종이 용이 한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엇.”

책을 빠르게 훑어보던 공작이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여기 제르노아 건국 전설이 기록돼 있는데 그때 당시에 성녀가 있었다는구나.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성녀가.”

“어디 봐요.”

디에르고 공작은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펼쳐 놓은 페이지에는 삽화가 실려 있었다. 비록 흑백이지만 옆에 적힌 글귀에는 분명히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선구자가 나타났다. 백성들은 그녀를 성녀라 불렀다.’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용에 대한 이야기는 없네.”

“그래도 이 성녀가 용의 선택을 받은 건 분명해. 이 종이 속 용이 초대 황제 사파테아도를 친구라고 말했으니까.”

“슬슬…… 저희한테 종이 용을 보여 주시죠. 폐하.”

그레이가 랏샤가 쥐고 있는 종이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몇 시간 동안 직접 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그래, 이젠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이게 누군가가 마법으로 농간을 부린 게 아니라는 확신이 생기는군.”

그레이와 솔레아가 휴게실의 커튼을 친 후, 아무스가 공간 차단 마법을 걸었다.

랏샤는 조용히 종이 두 장을 겹쳤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지?”

“혹시 공간의 특수성 같은 게 있는 게 아닐까요? 지하의 황궁 보물 창고에서는 제대로 발동이 됐다면서요.”

“거기에 있는 초대 황제의 물건과 함께 작용해서 시동이 걸린 걸 수도 있겠군.”

나머지 사람들이 산윤솔의 말에 동의했다. 다섯은 곧장 황궁 지하 보물 창고로 향했다.

다행히 전과 같은 장소에서 종이를 겹치니 종이 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피! 사파테아도! ……를 닮은 사람!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 줘! 주세요……. 얼마 만에 말을 해 보는 건지 모르겠어요. 사피, 제발…….”

디에르고, 그레이, 아무스, 솔레아는 사파테아도, 라는 이름을 가진 황제를 다소 냉정한 눈으로 쳐다봤다.

“무슨 짓을 했길래 용이 저렇게 싹싹 빌어요?!”

솔레아가 랏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조용히 물었다. 랏샤는 굳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평소처럼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저 내가 내게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듣고 싶었을 뿐인데. 용은 생각보다 심약하군.”

“아니다, 황제. 네가 생각보다 악랄한 것이다.”

랏샤의 목소리뿐 아니라 이쪽의 소리도 종이 너머에 전부 들리는 듯했다.

종이 너머의 용은 애처로울 정도로 다급하게 제 신변을 밝혔다.

“제 이름은 엘루입니다. 엘루요. 엘! 루!”

랏샤가 종이를 떼어 냈다.

“폐하! 뭐 하시는 겁니까!”

“귀 잘 들리는데 소리를 빽빽 지르잖아.”

“얼굴도 안 보이는데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렇다고 다짜고짜 전화를 끊으면 어떡해요! 전화 예절이 엉망이에요!”

“전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예절은 주로 상대방 쪽에서 내게 지키는 편이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솔레아의 잔소리를 더 이상은 듣기 싫었는지 랏샤는 다시 종이를 겹쳤다.

엘루와 연결된 순간 솔레아가 그레이의 등을 쿡 찌르며 작게 속닥거렸다.

“오빠. 내가 진짜 동생으로서 하는 말인데 폐하는 절대로 안 돼. 청혼받겠다 싶으면 바로 도망을 치란 말이야, 알았어?”

“갑자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돌았냐?”

그레이가 검지를 제 관자놀이 옆에 대고 빙빙 돌리고 있는데 종이에서 찢어질 듯 큰 소리가 흘러 나왔다.

“청혼이라니! 사파테아도!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찌나 큰 목소리였는지 보물 창고에서 엘루의 목소리가메아리치듯 웅웅 울려 퍼졌다.

당황한 솔레아의 눈동자가 팝콘처럼 튀었다.

정작 당사자인 카라샤펠 로즈 폰 사파테아도 드 제르노아 황제 폐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리 지르지 마라.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하지만 엘루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억울함이 가득했다.

“사파테아도,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잖아. 계속 기다렸단 말이야. 네가 다시 오겠다며.”

“나도 계속 기다렸었는데. 인간들은 왜 자꾸 기다리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아무스다.”

“용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너도 용인가?”

“그렇다. 나도 짝이 기다리라고 해서 수백 년을 기다렸어.”

“난 천 년도 훌쩍 넘어.”

“내가 갖다 버린 수명도 천 년이 넘어.”

“수명을 갖다 버렸다고 표현하다니. 네 짝의 가치를 낮추는 말이다, 아 무슨 용. 말을 조심하도록 해.”

“갖다 버린 건 나고, 내 짝은 잘못 없어. 그리고 잊혀서 종이 속에 갇혀 있는 주제에 말이 많군. 엘 무슨 용.”

솔레아가 아무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싸우지 마. 아무스. 뭐 하는 짓이야. 엘루의 말을 들어 봐야지.”

솔레아의 뒤에 서 있던 아무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억울하다는 나름의 표현이었다.

“커흠! 흠! 으흠! 헛! 흠!”

또 디에르고의 헛기침 소리가 커졌지만.

결국 그레이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엘루 네 말은, 초대 황제는 여자였다는 거지? 근데 우리가 찾은 전설에선 그때 성녀가 있다고 했어. 황제가 아니라 성녀였다고.”

엘루는 다소 성질이 난 말투로 이죽거렸다.

“인간들은 위대한 여성을 지도자가 아니라 도우미로 포장하는 병이라도 있는지. 쯧. 아직도 원래의 역사대로 바뀌질 않았단 말이야?”

“조금씩 변하고 있어. 지금 황제는 나다.”

“사피. 네 역사가 얼룩지지 않으려면 내가 필요해, 날 꺼내줘.”

“얼룩지게 될 거라는 근거가 어디 있지?”

“사피, ……역사는 반복돼. 인간들은 우매하게도 실수를 반복하잖아. 내가 곁에 있을게. 널 지킬게. 너의 업적에 내가 있게 해 줘.”

“그건 내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고, 이제 너와 사파테아도의 관계를 알고 싶은데.”

랏샤는 종이를 들고 있는 게 슬슬 귀찮은 듯했다.

종이를 든 오른손이 아래로 처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레이가 대신 들어 주려 손을 뻗으려는 순간, 디에르고 공작이 막았다.

디에르고가 대신 들어 주려는 순간, 솔레아가 막았다.

솔레아가 대신 들려는 순간, 아무스가 가로막고 제가 얼른 종이를 받쳐 들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사라졌다.

“……용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군.”

머쓱하게 말하는 아무스를 힐긋 바라본 랏샤가 그에게서 종이를 건네받고 다시 저 스스로의 힘으로 겹쳐 들었다.

“사피! 왜 자꾸 사라지는 거야!”

“나야말로 묻고 싶어. 왜 내게만 반응하는지.”

“네가 위대한 빛, 사파테아도의 환생이잖아.”

“아, 뭐. 그래. 예상했다. 다음 질문은…….”

“폐하! 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시는 거예요!”

“다들 예상했잖아. 아무튼 이봐. 네 목소리를 여기서밖에 들을 수 없던데 혹시 특정 장소에서만 반응하는 건가?”

“아니야. 장소는 중요치 않아. 나를 부르는 다른 물건이 필요해.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사피가 표시를 해 뒀다고 했어. 그걸 찾아 줘. 그리고 거기에 종이를 겹쳐 놓고 내 이름을 불러 줘. 그러면 내가 네 곁으로 갈게. 사파테아도.”

또…… 보물찾기를 해야 하는 건가.

이마를 짚은 솔레아와 또 시작된 보물찾기 놀이에 묘하게 들뜬 그레이와 아무스, 디에르고 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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